내게 <1%의 어떤 것>이라는 드라마는 추억이다. 절대 하지 못할 거로 생각한 일요일 아침 8시 기상을 실현하게 한 드라마니까. 당시 기숙사에 살던 난 아침 8시, 일어나서 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후 1층 휴게실에서 TV 리모컨을 손에 쥔 채 채널을 사수하고 있었다. 그러면 인사도 나누지 않는 기숙사생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대여섯 정도 되는 여대생들이, 눈곱 겨우 뗀 채로 끈질기게 본방송을 사수한 드라마. 여대생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는 드라마, 강동원을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한 발판이 된 드라마, 그게 바로 <1%의 어떤 것>이다.

13년이 흘렀다. 난 어느새 30대가 되었으며, 최소한 로코에 나오는 사랑놀이가 가장 달콤한 허상이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1%의 어떤 것>이 리메이크로 다시 돌아왔고, 나는 기대 반 걱정 반 마음을 안고 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많이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하면서도 같은 것들이 보이고…. 원작이 로맨스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에 초점을 뒀다면, 2016년 버전은 로맨스에 정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지금까지 드라맥스에서 방영한 8화까지는 주인공 재인과 다현이 만나고, 계약 연애를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점점 빠져드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로코에 질색하는 목석같은 사람도 원작과 비교하면 정말 달달하다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우리가 로맨스 소설을 읽고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보는 건, 가끔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간지러움을 감수하고라도 이 달달함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그 방면에서라면 2016년 버전은 그 목표를 성공적으로 이뤄가고 있다.

뜻밖에 달달함을 느끼는 건 주인공 두 사람의 케미다. 사실 처음 캐스팅 소식을 들었을 땐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전소민&하석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 어느 누구를 가져다 놔도 스무살 여대생의 마음을 흔든 강동원을 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강동원이 비록 까무잡잡하고 비쩍 마른 데다 (모델이니까!) 얼굴은 굳어서 표정 연기가 제대로 안 됐지만 잘생기고 멋진 건 한국 최강이었기 (그리고 지금은 더 최강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기우였다. 강동원이 그려낸 이재인이 딱딱하고 감정 없는 느낌이었다면, 13년 전 강동원에 비해 다년간의 연기 경험이 있는 현재의 하석진은 이재인이라는 인간을 만들어 낸다. 하석진이 해석한 재인의 냉정함, 일 중독, 오만함, 안하무인, 그리고 그런데도 눈앞에 보이는 평범한 여자의 1%를 발견하고 서서히 사랑에 빠지는 그 모든 과정의 감정을 표현하고 시청자들을 설득해낸다.

그리고 여기에 전소민이 있다. 김정화가 시원시원하고 다정하고 침착하지만 사랑스러운 느낌은 없었다면, 전소민이 해석한 다현은 정말 다다라는 귀여운 별명이 어울리는 사랑스러움에 따뜻함, 다정함, 그리고 안된다고 수만 번 다짐하면서도 사랑에 빠져드는 여자다. 전소민이 이렇게 사랑스러울 줄이야. 어떤 사람이라도 미소 짓게 만드는 힘이 뿜어나온다.

이 두 사람의 케미도 좋다. 강동원과 김정화가 서로의 캐릭터를 자신의 능력치만큼 표현해내긴 했지만 어울린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하석진과 전소민은 붙여놓으니까…. 생각보다 아주 괜찮은 거다 ㅎㅎ 꽤 빡빡한 일정으로 찍었을 것 같은데, 두 사람의 연기 합도 상당히 자연스럽다. 짬밥의 힘일까? “그럴듯한 로맨스”를 그려내는 두 사람의 연기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

다시 내용으로 돌아와서, 원작과 2016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로맨스의 비중이다. 제대로 달달한 연애 이야기를 그려내는 2016년 버전에는 원작에 넣은 많은 설정을 걷어냈다. 그래서 원작에서 로맨스의 다른 한 축을 담당했던 현진과 태하의 비중이 줄어든 건 아쉽지만, 그만큼 재인과 다현의 이야기에 많은 것을 집중한다는 점은 만족스럽다.

반면 그 외의 이야기 중 가장 큰 변화라면 다현의 집에 집중되었던 가족 이야기가 재인의 집으로 넘어간 것이다. 아버지가 죽은 후, 사촌 형 대신 큰아버지의 아들이 된 재인은 길러준 어머니의 정성은 감사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낳아준 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한 애정 때문에 사랑을 주고받음이 서툴다. 성공에 대한 야망이 큰 이유, 일에 있어 안하무인에 독선적인 성격이 생긴 어느 정도의 정당성을 부여했달까? 그런 그에게 다현이 주는 따뜻한 사랑이 일종의 치료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이 “사랑으로 인간개조” 플롯은 너무나 구식이지만 언제나 설득력이 있고, 개인적으로는 지금의 설정이 원작보다 마음에 든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건, 하다가 만 업데이트가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2016년이다. 이제 계약 연애라도 부모님 앞에서 (등짝 스매싱을 맞든 말든) “그 남자랑 안자.”라는 말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런데 재인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다현의 손목을 잡고 마구잡이로 끌고 나가고, 다현이 싫다고 몸부림치는데도 손을 잡고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느 중국드라마에서 남주가 여주 손목을 잡고 끌고 나가려고 하니까 “당신이 한국드라마 주인공인 줄 알아요?”라는 대사를 쳤다지. 손목을 끌지 않으면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되나? 독점적인 소유욕을 드러내는 스킨쉽을 여성의 의지에 반해 해야만 하는 건가? 이번 주 분량에서는 그런 장면은 줄어들었지만, 여자를 대하는 남자의 태도와 매너는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다.

오늘 본 7, 8화에 나온 장면이 원작의 어느 부분과 싱크로가 맞는지 모르겠다. 사실 어느 순간부터 정말 아이코닉한 장면이 아닌 이상 비교를 하는 것은 포기하고 즐겁게 보고 있다. 그래도 오랜만에 원작소설을 다시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현진의 이야기가 축소된 게 아쉬워서 현진-태하가 만나기는 하는 건가 걱정도 되고, 다현이 모든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 언제가 될까 궁금하기도 하다. “내 인생의 드라마”인 원작에 쏟은 애정만큼은 아니지만, 한 주 방영이 끝나면 (당연히 옥수수와 BTV로) 챙겨볼까 하는 생각도 한다.

결론? 강동원의 잔상이 남아있는 분들에게, 강동원이 아닌 이재인도 아주 멋지고, 전소민의 다현은 더욱 당차면서도 사랑스러우며, 2003년에도 2016년에도 로맨스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짓궂게 미소 짓는 하석진을 보며 “저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구나.”라고 놀라는 경험이 모두 즐겁다는 것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시린 옆구리를 잠깐 잊게 해줄 달달함을 찾는 분들께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