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에 “왕”이란, “왕실”이란 어떤 존재일까? 종교는 물론이거니와 정의라는 명분과 정치적 도의도 실리와 경제 앞에서는 굴복하는 시기, 오래전부터 “군림”해왔던 “왕”은 이제 상징의 의미조차 퇴색되었다. 개인의 삶이란 것 자체가 없는 21세기에 들어서는 오히려 가십과 파파라치에 의해 소비되는 “셀러브리티” 이상의 가치도 없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권위는 지켜져야 하고, “왕실”의 자존심은 보존되어야 한다. 수많은 정치적 지도자들이 나타나고 사라져도, 유수의 기업인들이 흥하고 망하고, 세상이 열두 번이 바뀌어도 왕과 왕실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국민이 바라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때로는 일생의 큰 상처가 될 무자비한 결정도 내려야만 한다.
사실, 영국 왕실의 이야기는 최근 ‘윌리엄&케이트’라는, 세기의 셀러브리티 커플 덕에 다시 주목받긴 했지만, 그 복잡한 혼인관계와 정상적인 마인드로는 볼 수 없는 정략결혼과 핏줄을 잇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 등은 가십거리로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Netflix의 신작 [더 크라운]을 미리 볼 수 있는 기회를 통해, 그들이 인생과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것들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1시즌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47년부터 시작한다. 영국 조지 6세의 첫째 공주 엘리자베스는, 그녀가 10대 때 만나 사랑에 빠진 그리스 왕실 출신의 필립과 결혼식을 올린다. 화려한 성당 안은 가십을 좋아하는 귀족들의 말로 웅성거리고, 세계대전 후 다시 권력의 정점에 오르기 위한 정치인들의 기싸움은 치열하다. 젊은 연인이 평생의 인연을 맺는 날을 자신의 권위를 드높일 또 하나의 이벤트로 사용하는 윈스턴 처칠의 노련함도 돋보인다. 그리고 조지 6세는 수건에 피를 토해도 아무렇지 않은 듯 행복해하는 딸의 손을 잡고 식장으로 들어간다.
사제 앞에서 결혼 서약을 올리는 두 사람.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주교를 따라 서약을 하는 것을 망설인다. 망설인 부분은 바로 “순종하라”, “복종하라”. 왕의 첫째 공주는 왕이 서거하면 다음 왕이 되고, 엘리자베스 또한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아내로서”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가능해도, “미래의 여왕”이 어떤 셈으로든 자신의 신하가 될 “여왕의 부군”에게 “복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결혼 서약, 그 찰나의 순간에 미래의 여왕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라는 두 정체성이 갈등을 일으키는 모습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1편의 고작 10분 정도만 보아도 이 드라마가 어떤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의도는 무엇이며, 이들의 갈등은 무엇이며, 설사 지금 갈등이 일어나지 않아도 앞으로 어떤 갈등에 휩싸일지, 그 수많은 이야기들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절도 있고 위엄 있는 행동 속에 담긴 두려움, 갈등, 욕망 등등이 전면에 드러나든 이면에 비치든 그것을 그려내는 솜씨는 너무나 절묘하다.
사실 [더 크라운]은 개인적으로 기대하는 작품이었다. [닥터 후]의 맷 스미스가 출연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지만,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상황에서 왕실의 모든 진실을 알 수 없는 작가가 과연 사실과 허구의 가느다란 경계선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그 점이 가장 기대되고, 약간의 걱정도 됐었다. 미리 본 2편의 에피소드는 걱정을 모두 사라지게 만들었다. 화려하고 섬세하고 위엄 있다. 사실과 허구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조용히 다가와 심장을 울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앞으로 어떤 내용이 전개될지 (역사가 스포!) 기대되는데, 특히 예고편에서 볼 수 있었던 엘리자베스와 필립의 갈등을 어떻게 그려낼지가 가장 궁금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평범하게 살기를 꿈꿔왔던 공주가 여옹이 되었을 때, 그녀를 짓누르는 압박감은 가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리고 평생 복종과 순종을 맹세했던 아내가 여왕이 되어 모든 면에서 남편보다 나라와 권위를 먼저 생갹하게 될 때, 호기 넘치는 청년이자 창창한 커리어를 앞둔 군인으로 살아온 필립이 이를 어떻게 감당할지 등도 기대된다.
알려진 사실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매력이 있는 드라마, 21세기까지 가장 위엄 있는 모습으로 지속되는 영국 왕실의 다사다난한 역사를 엿볼 수 있는 <더 크라운>은 11월 4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