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이제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한다.

다른 언어로 이야기한다는 것, 곧 이별이다.

 

누구든 처음부터 1시간 반에서 2시간가량의 영화를 찍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감독이 단편 영화를 찍고 장편 영화로 데뷔한다. 어쩌면 단편 영화는 장편 영화의 연습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좋은 기량을 가진 감독이라면 단편 영화에서도 단연코 빛나는 법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으로 장편 영화에 데뷔한다. 가끔은 자신의 단편 영화를 장편 영화로 승화시키는 사례도 있다. <12번째 보조 사제>가 <검은 사제들>이 되었고 해외에선 <라이트 아웃>의 경우가 그렇다. 이처럼 단편 영화는 자체로도 재미있지만, 장편 영화로서의 가능성이 보일 때 더욱 흥미롭다. 여기 장편 영화의 가능성을 가진 단편 영화 <위르트에서>를 추천한다.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영화를 먼저 보기를 권한다. – 영화보기클릭

 

<이미지:미니시네마>

 

카메라와 미장센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카메라와 미장센이다. <위르트에서>에서 카메라와 미장센은 그들의 상황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첫 장면에서 카메라는 책상과 의자 두 상이 전혀 어울리지 않게 덩그러니 놓여 있는 들판을 롱쇼트로 잡는다. 하나는 한 소녀가 앉아있고 하나는 뒤집혀 있다. 여기서 그들은 마치 세상의 구석으로 쫓겨난 것처럼 화면 구석에 작게 위치하여 보인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서 비슷한 오프닝 시퀀스가 나오는데, 이 부조리한 장면은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어떤 이유로 인해 배제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이후 교실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들을 교차적으로 따로 잡으며 그들이 아직 서로의 마음을 숨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들판 장면에서도 그들을 따로 잡는다. 하지만 아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여전히 카메라는 동일하게 그들을 나누고 있지만, 조명이 그들의 상황을 다르게 보여준다. 교실 씬에서는 밝은 빛으로 그들을 빛나게 만들지만, 들판 씬에서는 새파란 조명으로 그들이 분리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서로를 사랑함을 알고 있는 공방 장면에서는 작은 공간 속에 그들이 가득 차도록 투 샷으로 잡는다. 이후 세 번째 들판 장면에서는 카메라는 그들을 다시 나누지만, 파란빛이 아닌 붉은 노을빛으로 그들의 만남이 곧 끝날 것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그들을 끊임없이 관찰하면서 상황에 따라서 나눠서 혹은 붙여서 잡는다. 하지만 똑같이 나눠진 상황이라도 조명을 이용한 미장센으로 인해 그들이 어떤 상황임을 직감할 수 있다. 또한 재미있는 지점은 들판 씬과 교실 씬, 그리고 마지막 공방 씬의 화면비율이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공방 씬은 좁은 가로비율덕분에 더욱 친숙하게 느껴지며 영화라는 기분을 지우고 있다. <위르트에서>는 이처럼 카메라와 미장센, 거기에 화면비율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그들이 처한 상황을 능숙하게 표현한다.

 

<이미지:미니시네마>

 

퀴어라는 주제

<위르트에서>는 퀴어영화다. 물론 퀴어영화는 흥행을 위한 장편 영화로서는 약점이 있다. 하지만 언어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퀴어성보다 보편적 사랑의 문제로 다가간다. ‘타의’로 뒤집힌 의자는 뒤집힌 이상 ‘자의’가 되었고 ‘자의’를 음만 뒤집으면 다시 ‘의자’가 된다. 이제 그들에게 ‘의자’는 곧 ‘타의’다. 누구도 그 언어를 알 수 없다.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했을 때, 사랑한다는 말 자체는 이해하지만, 그 안에 담긴 화자의 감정과 청자와의 공유로 쌓아진 기억들까지 이해할 순 없다. 그것은 듣고 이해하기는 했지만, 그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언어라는 것은 사회적 약속이다. 모든 이들은 각자의 표현을 가지고 있다. 이를 보편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적 약속을 했고 그것이 언어다. 하지만 연인들은 거기서 동떨어져 자신들만의 언어를 가진다. <위르트에서>에서 소녀들은 자신들만의 언어를 가졌었다. ‘의자’와 ‘타의’, ‘윤서’와 ‘서윤’. 하지만 다른 이들의 말로 인해 그들은 갈라서게 되었다. ‘의자’와 ‘타의’, ‘윤서’와 ‘서윤’에서 빠져나온 그들은 이제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한다. 다른 언어로 이야기한다는 것, 곧 이별이다. 이것은 단순히 퀴어영화에서 나오는 성향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이야기다. 퀴어영화를 보편적 사랑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허성완 감독은 누군가가 평범하게 바라볼 수도, 혹은 이상하게 바라볼 수도 있는 주제를 날카롭게 말하고 있다.

 

이처럼, <위르트에서>는 날카로운 주제의식과 다듬어진 영화적 테크닉을 가지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전달할지 명확하게 담겨있는 단편영화다. <위르트에서>가 장편으로 나올 수 있을까. 글쎄, 알 수 없다. 단순히 영화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제작될 수 없는 것이 현재의 영화산업이니까. 하지만 이처럼 잘 구성된 단편 영화를 길게 볼 수 있는 상황이 오면 좋겠다. 난 지금도 윤서와 서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싶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아름다운 모습도 지켜보고 싶다. 그래서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