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뉴스 데이(Agnus Dei),

그후에도 여전히 지속되는 삶

 

by. Jacinta

 

<이미지: 씨네 블루밍 / 찬란>

 

수십 년 만에 발견된 노트에 기록된 실화를 토대로 한 <아뉴스 데이 (Agnus Dei)>는 2차 세계대전 중 있었던 비극적 사건을 그린 영화이다. 폴란드 어느 수녀원에서 있었던 끔찍한 비극을 생생하게 목격했던 프랑스 여의사의 실제 사건은 단순히 아픈 과거를 조명한다는 것을 넘어 현재의 우리에게 마음을 울리는 감동과 사유의 여운을 남긴다.

기도 소리만이 맴도는 수녀원의 고요한 정적을 깨는 외마디 비명, 수녀들은 비명소리에도 흔들림 없이 기도에 매진할 뿐이다. 다만 더 이상 침묵의 기도에 집중할 수 없는 한 젊은 수녀는 자리를 빠져나가 하얀 눈이 가득 쌓인 수녀원 밖으로 나선다. 영화에서 비극적 진실은 외부의 도움을 요청하는 어느 수녀에게서 시작한다.
숲 속에 위치한 고요한 정적이 휘감은 작은 수녀원, 언뜻 보기에는 전쟁의 비극도 피해 갈듯한 고립무원의 지대 같았지만, 외부의 손길이 미칠 수 없는 그곳은 미처 생각 못했던 깊은 고통과 비극이 존재했다. 야만과 폭력이 거침없이 횡횡하는 전쟁 속에 그곳을 점령한 독일군과 소련군이 수녀원을 무참히 짓밟았고, 7명의 수녀가 비극적 임신을 하게 된 것이다.

 

 

<이미지: 씨네 블루밍 / 찬란>

 

이런 끔찍한 역사적 사실을 그린 영화는 놀랍게도 차분한 시선으로 당시의 순간을 따라간다. 그동안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 캐릭터를 내세운 영화를 연출한 안느 퐁텐 감독은 여성 감독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섬세한 연출력으로 비극을 부풀리지 않으면서 고통스러운 진실에 다가선다. 사건을 알려지게 한 프랑스 여의사 ‘마틸다’로 대변되는 감독의 시선은 점차적으로 사건의 목격자에서 주요한 증인으로 관객을 이끈다.
자극적인 장면 없이도 공감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경험’이다. 처음, 의사라는 직업적 소명으로 수녀원을 돕기 시작했던 마틸다는 러시아군이 점령한 곳을 이동하던 중 수녀들이 느꼈던 공포스러운 경험을 겪고, 이후 의사의 신분을 넘어 한 개인이자 여성으로서 수녀원의 비극에 깊이 개입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비극적 진실을 전할 때, 고통의 진폭을 더 강조하기 위해 자극적인 장면을 덧붙일 때가 많지만, 안느 퐁텐 감독은 ‘동일한 경험’이라는 것으로 당시 폴란드를 점령했던 러시아군의 야만적인 행태를 체험하게 하고, 반복되는 전쟁의 역사에서 늘 쉽게 고통받는 여성(약자)의 위치를 보여준다.

 

 

<이미지: 씨네 블루밍 / 찬란>

 

자극적이지 않은 담담한 시선으로 과거의 아픔을 조명하는데 그쳤다면 <아뉴스 데이>는 아쉬운 범작이 됐을지 모른다. 이 영화의 진짜 미덕은 이후에 있다. 한층 더 가까이 수녀원의 비극에 다가선 ‘마틸다’를 통해 끔찍한 사건을 고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후에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말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 시사하는 바가 크며 긴 여운을 안긴다.

어떤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달아나기 위해 진실을 외면하려는 우를 쉽게 범하곤 한다. 끔찍한 사건에 노출된 수녀원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사건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순결을 서약한 수녀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이 단순한 개인적 아픔이 아닌 종교적 믿음의 문제까지 이어졌고 외부에 대한 강한 거부감과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도움을 요청받고 처음으로 수녀원을 방문한 ‘마틸다’는 같은 여성임에도 임신한 수녀의 건강 상태를 쉽게 진료할 수 없었다. 순결을 서약한 수녀가 임신을 했다는 모순적 상황만을 두려워하며 자신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가혹한 상황을 똑바로 직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틸다’가 신이 보낸 구원자로 받아들여지며 수녀원의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가장 극명하게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은 원장 수녀와 부원장 수녀의 상반되는 태도일 것이다.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해왔던 원장 수녀는 자신 역시 수녀들과 같은 경험을 하고 질병까지 얻었음에도 진실을 인정하기보다 오히려 더 종교적 믿음에 몰두하고 다른 수녀들마저 진실을 외면하도록 이끈다. 반면, 원장 수녀와 비슷한 태도였던 부원장 수녀 ‘마리아’는 ‘마틸다’와 교감하면서 그녀들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고 외부의 도움을 받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미지: 씨네 블루밍 / 찬란>

 

전쟁이 낳은 끔찍한 비극, 그나마도 자신들이 가진 신앙 때문에 진실 아래 숨어야 했던 수녀들의 고통과 아픔을 담은 <아뉴스 데이>는 마지막 사소한 시각의 차이와 연대가 어떠한 감동을 만들어내는지 보여준다. 비극은 외면한다고 해서 절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비극을 극복하는데 거창한 무엇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와 시작은 미미할지라도 연대가 이루어진다면, 어둠 속에서 희망의 빛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뉴스 데이>는 실화 바탕의 밋밋한 영화에 머무르지 않고 비극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되는 삶에서 어떻게 이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관해 말하며 마지막 깊은 여운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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