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싶은 계절
여정의 낭만에 녹아든 로맨스
by. Jcacinta
비록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이라도, 봄길 머뭇거리게 하는 비가 내리더라도, 대기를 감싸 안은 공기만큼은 한층 따뜻해진 계절, 4월이다. 한결 가벼워진 날씨에 주말이면 콧바람 쐬러 떠나고 싶기도 하고 마음은 이리저리 싱숭생숭하다. 연인과 손 꼭 잡고 벚꽃나무 아래를 거닐며 데이트하고 싶은 계절, 마음만큼은 진작부터 봄이었는데, 늘 그렇듯 현실은 고단함으로 촘촘하게 채워졌다. 당장에라도 떠나고 싶지만 이런저런 사정에 그럴 수 없다면 대신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감상해보자. 늘 같은 일상을 벗어나 뜻밖의 감정이 찾아온 영화를 모아봤다.
1. 일상탈출, 그리고 로맨스

아메리칸 허니 American Honey, 2016
‘스타’, 반짝반짝할 것 같은 이름과 달리 십 대 후반의 소녀 ‘스타’의 하루는 고단하다. 어린 동생을 돌봐야 하고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뒤치다꺼리까지 도맡아야 한다. 싱그러운 청춘의 열기를 앗아간 무력한 일상을 반복하던 ‘스타’에게 함께 떠돌면서 사업을 하자는 남자 ‘제이크’가 나타난다. 볼품없는 차림새는 딱 봐도 그리 대단한 사업이 아니라는 게 뻔해 보였지만, ‘스타’는 과감하게 떠나기로 결정한다.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또래들과 승합차에 몸을 싣고, 미국 이리저리 떠돌며 잡지를 판다. 거짓과 거짓으로 이어지는 생활은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함께 하는 이들이 있기에 즐겁기도 하다. ‘스타’는 먼저 자신에게 다가왔던 ‘제이크’와 서툰 사랑을 나누지만 떠도는 삶의 낭만은 현실의 무게를 이기기엔 부족하다.
자유분방한 모습이 부럽다가도 결국은 녹록지 않은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청춘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으로 그린 영화 <아메리칸 허니>. 전작 <폭풍의 언덕>에서 거칠고 황폐한 영상으로 고전을 재해석했던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은 <아메리칸 허니>에서는 불완전할지라도 빠져들고 싶은 청춘의 여정을 그려냈다. (-> 작품 정보)

빈센트: 이탈리아 바다를 찾아, Vincent Wants to Sea, 2010
여행이란 무작정, 아무런 계획도 없이 떠날 때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무계획이 이끈 뜻밖의 상황들은 당혹스러움을 안길지라도 쉽게 얻을 수 없는 경험이자 추억이 되곤 한다. 자의반 타의 반으로 세상과 떨어져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있는 세 남녀가 그들 인생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여행기를 그린 <빈센트: 이탈리아 바다를 찾아>는 예측 가능한 결말에도 마음이 정화되는 영화이다.
투렛 증후군으로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빈센트’는 냉정한 정치인 아버지가 강제로 보낸 요양원에 맡겨졌다. 그곳에서 거식증을 앓는 ‘마리’와 강박증 환자 ‘알렉산더’를 만나 이탈리아 바다를 보기 위해 요양원을 탈출해 세상 밖으로 나온다. 충동적으로 시작된 여정은 크고 작은 불협화음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대자연 앞에서 점점 서로를 이해하며 내면의 변화가 찾아온다. 사연도 상처도 다른 세 사람이 바다를 찾아, 자유를 찾아 떠난 여정에서 ‘빈센트’와 ‘마리’는 우정은 로맨스로 이어지며 한 단계 성숙한 어른으로 발전한다. (-> 작품 정보)
2. 내일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세상의 끝까지 21일
Seeking a Friend for the End of the World, 2012
만약 내일 당장 죽는다면, 세계가 멸망한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세상의 끝까지 21일>은 언젠가 한 번쯤 해봤을 질문에 관한 영화이다. 시작부터 느닷없이 닥친 종말은 평온한 일상의 모든 것을 뒤흔든다. 그래서 남자 ‘도지’는 아내를 잃는다. 그동안 남편 몰래 불륜에 빠져있던 아내는 지구 종말이 찾아오기 전 뒤늦게라도 사랑을 찾겠다고 남편을 버리고 떠났다. 그의 일상만 무너진 게 아니다. 종말 소식에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비록 그의 일상은 깨졌지만 전과 다름없는 하루를 보내던 ‘도지’는 잘못 배달된 첫사랑의 편지를 계기로 알게 된 아랫집 여자 ‘페니’와 인생 마지막 여행길에 오른다.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할 첫사랑을 찾기 위해,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 떠난 여행길에서 예상 가능한 수순으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린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끌리게 되는 것은 당연하고도 순수한 감정이 아닐까.
예측 가능한 진행일지라도 곳곳에 등장하는 반가운 얼굴을 보는 재미도 있다. <CSI 라스베가스>에서 길 반장으로 유명한 윌리엄 L. 피터슨과 <나를 미치게 하는 여자>의 에이미 슈머, 마틴 쉰, T.J 밀러 등을 발견할 수 있다. (-> 작품 정보)

패신저스 Passengers, 2016
로맨스의 시작은 순수하지 않았지만, 기나긴 여정 망망대해 우주에서 둘뿐이라는 사실은 치명적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남자가 나빴다. 우주선의 치명적인 결함으로 90년 일찍 나 홀로 깨어난 남자 ‘짐’은 극한의 외로움에 시달렸고, 긴긴 동면에 빠져있는 승객을 보던 중 그의 시선을 한눈에 앗아간 아름다운 여인 ‘오로라’를 발견한다. 그렇게 마음을 뺏긴 남자는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 끝에 혼자라는 깊은 외로운 마음을 채울 여자를 깨우고 우연을 가장한 사랑을 시작한다. 의도가 나빴던 두 사람의 로맨스는 파국으로 치닫기도 하지만 모두의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를 맞으면서 ‘오로라’의 분노는 사랑으로 변화한다.
그렇다. <패신저스>는 우주선의 치명적인 결함에 미스터리한 비밀이 있고, 두 남녀가 거대한 사명감으로 우주선의 위기를 극복하는 영화는 아니다. 새로운 삶을 위해 머나먼 우주여행에 동참했던 남자가 뜻하지 않게 홀로 깨어나면서 우주 버전 로빈슨 표류기를 경험하고 삶을 포기하지 않게 할 사랑에 빠지는 꽤나 비싼 우주 로맨스이다. 하지만 아직도 가야 할 시간은 많고 많은데,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자신의 삶이 끝나버린다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똑똑한 로봇 친구가 말상대가 되어줘도 사람은 다른 누군가와 교류할 때 살아있다는 감정을 느낀다. (-> 작품 정보)
3. 뻔하지만 재밌어

나잇 & 데이 Knight & Day, 2010
실컷 보아온 첩보물과 달달한 로맨스가 만났다. 평범한 여자 ‘준’은 공항에서 만난 이상형의 남자 ‘밀러’에게 가벼운 추파나 던져볼까 했지만 함께 동승한 비행기부터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재난 같은 상황이 닥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조각미남 ‘밀러’와 얽히면서 그녀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험에 노출되고, 그때마다 백마 탄 기사처럼 나타난 남자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수습한다. 그를 믿어도 될지 갈팡질팡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빠져드는 ‘준’.
모처럼 친절한 톰 아저씨의 리즈 시절을 연상시키는 유쾌한 로코 액션 <나잇 & 데이>는 제임스 맨골드 감독이 최근에 연출했던 <로건>의 명랑 버전 같다. 첩보 액션과 로코를 뒤섞은 <나잇 & 데이>와 서부극과 진한 드라마가 뒤섞인 히어로물 <로건>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긴 하지만, 역할은 달라도 잘 알지 못했던 두 사람이 그들을 뒤쫓는 사람들을 물리치는 여정에서 감정의 교류가 형성된다는 스토리 라인은 묘하게 겹친다. <로건>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 ‘울버린’을 진한 감동을 안기며 퇴장시켰던 감독은 <나잇 & 데이>에서는 한동안 주춤해 이대로 잊히는 게 아닌가 했던 톰 아저씨의 매력이 여전함을 알려줬다.
떠나는 길에서 꿈꾸는 낭만을 재치 있는 대사와 심쿵하는 액션으로 무장시킨 영화는 잠들어있는 뇌세포를 깨워줄지 모른다. (-> 작품 정보)

프로포즈 데이 Leap Year, 2010
달콤한 프로포즈를 기대했지만 눈치 없는 남친은 일에 바쁘다. 그래서 주인공 ‘애나’는 여자가 프로포즈 하면 무조건 수락해야 하는 풍습이 있는 아일랜드로 떠나기로 한다. 여행의 목적이란 게 사실 와 닿지 않기도 하지만 ‘애나’가 아일랜드로 도착하는 순간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은 다소 황당했던 출발을 잊게 한다. 거기에 까칠하지만 훈훈한 영국 남자 ‘데클랜’이 나타나 2월 29일까지 더블린에 도착해야 하는 ‘애나’를 도와주기로 하면서 이 뻔한 여정에 계속해서 몰입하게 된다. 닳고 닳은 티격태격 여정은 분명 식상하지만, 그럴 때마다 엽서 속 풍경 같은 아일랜드의 멋들어진 풍경에 절로 마음이 누그러들며, 4년이나 만난 남친이 있음에도 ‘데클랜’에게 끌리는 ‘애나’의 마음으로 동화된다.
유치해도 식상해도 매력적인 남자와 멋진 풍경에 달콤달콤 해지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영화 <프로포즈 데이>. 아일랜드 티켓 충동구매가 든다면 이 영화는 완벽하게 성공했을지도. (-> 작품 정보)
4. 헤어진 연인과 만나다

멋진 하루 My Dear Enemy, 2008
그와 그녀는 1년 전에 헤어졌지만, 그 남자 ‘병운’에게 빌려줬던 350만 원이 아쉬운 그 여자 ‘희수’는 돈을 받으러 찾아가기로 한다. ‘병운’은 여전히 능글맞게 변함없는 모습으로 돈 받으러 온 ‘희수’를 데리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 안내한다. 연인 사이에서 채권자와 채무자로 뒤바뀐 두 남녀의 하루를 담은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는 하정우와 전도연, 두 배우의 제목만큼이나 멋진 연기 호흡으로 두 남녀의 묘한 하루에 빠져들게 한다. 제 옷을 입은 듯 ‘병운’으로 완전히 동화한 하정우와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감정을 섬세하게 연기한 전도연, 그리고 1년 만에 재회한 두 사람의 미묘한 틈을 채우는 재지한 멜로디가 어우러져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헤어진 연인의 남다른 재회는 어느새 이별의 시간으로 향한다. 각자 느끼는 아쉬움의 지점은 달라도 그도 그녀에게도 어딘가 아쉬운 헤어짐. 능글맞긴 해도 자상한 남자 ‘병운’은 고장 난 와이퍼를 어느 틈엔가 고쳐놓았고, 툭툭거리긴 해도 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여자 ‘희수’는 몰래 그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떠난다. 이 두 사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작품 정보)

러브 인 비즈니스클래스 Love is in the air, 2013
결혼과 면접, 각자 중요한 목적을 위해 비행기에 탑승한 ‘줄리’와 ‘앙트완’은 3년 전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이 사이였다. 어쩌다 보니 뉴욕에서 파리로 향하는 같은 비행기에 나란히 앉게 된 두 사람. ‘줄리’의 반응은 명확하다. 이제 와서 그동안의 변명을 늘어놓고 싶은 ‘앙트완’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단호한 ‘줄리’의 반응에도 ‘앙투완’은 두 사람의 사랑했던 추억을 다시 말하며 이별의 오해를 밝히려 한다.
헤어진 연인이 우연히 비행기에서 재회하고 6시간의 비행시간 동안 사랑과 이별의 추억이 교차하며 변화한다는 설정은 진부하기도 하지만, 전 여친과 비행기 승객을 설득시키는 달변가 ‘앙트완’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거기에 낭만의 도시 파리 곳곳을 보는 즐거움까지.
영화를 보고 난 후, 헤어진 연인을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드는 건 뭘까. (-> 작품 정보)
5. 낯선 곳에서 다가온 설렘

인 디 에어 Up In The Air, 2009
해고 전문가라는 독특한 직업을 가진 중년 남자 ‘라이언’에게 공항은 집보다 더 편안함을 제공하는 곳이기도 하다. 1년의 대부분을 미국 각지를 다니는데 쓰고 있는 그의 유일한 목표이자 즐거움은 마일리지를 모으는 것. 일 밖에 모르던 그는 당돌한 신입사원 ‘나탈리’를 데리고 해고 출장길에 나서고, 호텔 라운지에서 그와 비슷한 마인드를 가진 여인 ‘알렉스’를 만난다.
그의 출장 길은 두 가지 면에서 생각의 계기를 마련한다.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밖에 없는 그의 직업적 특수성은 그보다 더 냉정하고 기계적인 접근 방식을 가진 후임을 만나 혼란에 빠지고, 지금까지 정착된 삶과 사랑을 거부해 왔던 인생은 자신과 닮은 여인을 만나면서 되돌아보게 된다. 지금껏 어느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마일리지뿐이 남은 것 없는 삶을 쫓던 그도 이제 안주할 삶이 필요해진 것일까.
방향은 있지만 목적지는 없던 인생을 탈피하려던 찰나, 아이러니한 인생은 그가 믿었던 진실한 관계를 무너뜨리고 만다. (-> 작품 정보)

찰리 컨트리맨
The Necessary Death of Charlie Countryman, 2013
어머니가 죽고 무작정 루마니아 부쿠레슈티로 향하는 비행기에 탄 ‘찰리 컨트리맨’은 자신에게 친절했던 옆자리 중년 남자가 돌연사하자 유언을 전해주러 딸을 찾아간다. 딱히 계획도 없는 여행이었지만 죽은 남자의 딸 ‘게비’에게 치명적인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낯선 곳에서의 하루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악명 높은 마피아 ‘나이젤’의 애인 ‘게비’에게 무모할 정도로 빠져드는 ‘찰리’, 어머니가 죽고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그에게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찰리 컨트리맨>은 느와르적인 감성과 몽환과 우울을 넘나들며 뮤직비디오를 연상시키는 감각적인 영상으로 스타일리쉬하게 연출한 영화이다. 거기에 콜린 퍼스와 결이 다른 중년 간지를 선보이는 매즈 미켈슨의 퇴폐적인 매력과 <웨스트월드>의 돌로레스를 잊게 하는 색다른 모습의 레이첼 에반 우드의 모습도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다. (-> 작품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