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영화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영화

 

by. Jacinta

 

컬러영화에 익숙하면서도 한 번씩 접하는 흑백영화는 묘한 여운을 안겨준다. 지난날의 아련한 추억을 환기시키며, 색이 배제된 흑백 필름 속 인물과 풍경은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과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한다. 때문에 흑백영화는 컬러영화에 비해 주제와 정서를 보다 분명하게 전달하곤 한다. 어떤 특정한 느낌을 연출하기 위해 드물지만 꾸준히 선보이는 흑백영화는 분명 컬러영화가 주지 못한 영화의 매력을 갖고 있다. 명암과 대비, 그림자 등의 강약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같은 흑백영화가 표현하는 질감은 더욱 풍부해지고 깊어진다. 최근 몇 년 사이 제작된 영화 중에서 흑백필름이 가진 장점을 잘 살린 매력적인 흑백영화를 모아봤다.

 

<이미지: 전주국제영화제>

 

1. 토리노의 말 The Turin Horse, 2011, 벨라 타르

 

<토리노의 말>은 특유의 롱테이크와 흑백 촬영으로 유명한 벨라 타르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다. 2007년 <런던에서 온 사나이> 이후 4년 만에 선보인 영화로 베를린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어 은곰상을 수상하는 등 은퇴작이라는 것에 아쉬움이 남는다.
1989년 1월 3일, 토리노 광장에서 있었던 니체의 일화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니체의 이야기가 아닌 니체가 목격한 말과 마부, 그의 딸의 이야기이다. 지독한 롱테이크와 단순한 일상의 반복으로 구성된 이야기 구조는 분명 지루하기도 답답할 수도 있지만, 절제된 대사와 느린 호흡으로 이어진 <토리노의 말>은 요즘 영화에서 볼 수 없는 미학적 경험을 할 수 있다. 단순하지만 집요하게 파고드는 흑백의 롱테이크 영상과 귀가 따가울 정도로 휘몰아치는 황량한 벌판의 거친 바람소리만으로도 절망과 소멸의 압도적인 드라마를 선사한다.

 

 

<이미지: 영화사 진진>

 

2. 아티스트 The Artist, 2011, 미셀 하자나비시우스

 

<아티스트>는 흑백에 무성영화를 더했다. 처음 영화가 등장했을 때의 초심으로 돌아간 영화는 무성영화 형식과 스타일을 고스란히 따라 만들었다. 영화마저도 기술 경쟁이 심화된 21세기에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흑백 무성영화는 무척 신선하고 새로운 경험이다. 거기다 유성영화의 등장으로 몰락해가는 무성영화배우의 러브스토리를 담고 있는 영화는 무성영화의 클래식한 감수성을 더욱 완벽하게 살려낸다.
<아티스트>는 단순히 지난날의 향수를 상기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영화의 본질적인 매력에 다시 한번 빠져들게 하는 영화이다. 흑백 무성영화의 느낌을 재현하기 위해 기술적 노력 역시 21세기 마법 같은 체험에 한몫했다. 흑백 무성영화에서 처음 사용됐던 1.33:1의 화면비율과 컬러필름으로 촬영한 후 흑백 영상으로 전환하는 등 당시의 할리우드를 경험하는 특별한 감흥을 선사한다.

 

 

<이미지: (주) 영화제작전원사 / (주) 영화사조제>

 

3. 북촌방향 The Day He Arrives, 2011, 홍상수

 

<오! 수정> 이후 홍상수 감독의 두 번째 흑백영화 <북촌방향>은 기묘한 우연들이 겹치는 미로 같은 느낌의 영화이다. 늘 그렇듯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홍상수 감독의 영화 중에서 유독 더 시공간의 모호함이 느껴진다. 언제나처럼 빠짐없이 등장하는 술자리와 시시콜콜한 잡담, 거기에 찌질한 남자들은 분명 익숙한 패턴인데 조금씩 뒤틀리며 반복되는 공간은 시간의 개념이 사라진 곳처럼 몽환적이다.
낮과 밤의 경계가 모호한 흑백 영상은 컬러 영상으로 촬영한 후 흑백 영상으로 전환한 것이다. <오! 수정> 제작 당시 컬러의 많은 정보가 인물들의 감정을 무디게 할까봐 흑백 영화로 제작했다고 밝혔던 감독의 말이 새삼 떠오르는 <북촌방향>은 모호한 흑백의 경계가 나른한 마법 같은 환각에 취하게 한다.

 

 

<이미지: 백두대간>

 

4. 백설공주의 마지막 키스 Blancanieve, 2012, 파블로 베르헤르

 

흑백 무성영화로 재해석된 스페인 영화 <백설공주의 마지막 키스>는 할리우드식 동화 같은 판타지도 달콤한 해피엔딩도 기대하면 안 된다. 매혹적인 잔혹동화로 탄생한 영화는 지금까지 나왔던 백설공주 영화 중 독특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스페인의 이국적인 정취가 느껴지는 판타지와 비극이 공존하며 시작부터 마지막 엔딩까지 익숙함을 벗어난 전개는 신선하다. 독이 든 사과처럼 비극적인 운명으로 향해가는 카르멘을 비롯한 등장인물들 또한 현대적인 감성으로 재창조되어 흥미롭다.
열정적인 플라멩코 선율은 흑백의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영화에 생생한 에너지를 부여하며 카르멘의 계속되는 비극에 끌어들인다.

 

 

<이미지: 그린나래미디어(주)>

 

5. 프란시스 하 Frances Ha, 2012, 노아 바움백

 

<프란시스 하>는 엉뚱하지만 어디엔가 있을 법한 뉴요커 프란시스의 홀로서기를 그린 영화이다. 낭만의 정취가 물씬한 흑백의 뉴욕 풍경은 낙천적인 프란시스의 장밋빛 꿈이자 대도시의 화려함이 배제된 현실적인 공간이다. 만약 이 영화가 컬러풀한 색으로 물든 뉴욕을 보여줬다면 프란시스의 좌절과 혼란은 충분한 설득력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여느 청춘이라면 꿈꾸기 마련인 장밋빛 인생은 색이 제거된 흑백의 영상에서 쉽게 좌절되곤 하는 보통의 꿈이 되어 더 큰 공감을 얻게 했다.
거기에 나르시시즘이라고 해도 에너지 충만한 프란시스란 캐릭터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청춘의 아이콘이다. 상황은 달라도 감정적인 공감대를 이끌며 불안한 모습으로 방황하는 청춘, 그 자체이다. 뉴욕 거리를 질주하는 프란시스는 나아지는 현실은 없어도 작은 위로가 된다.

 

 

<이미지: 백두대간>

 

6. 헛소동 Much Ado About Nothing, 2012, 조스 웨던

 

<헛소동>은 우리에게 <어벤져스> 시리즈로 잘 알려진 조스 웨던 감독의 영화로 셰익스피어의 동명 희곡을 흑백의 모던한 감성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조스 웨던 특유의 재기 발랄함은 보편적인 사랑이야기를 주제로 삼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지적인 유머가 가득한 로맨틱 영화로 창조해냈다.
그동안 수많은 작품에서 모티브로 삼아온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조스 웨던의 재치 있고 세련된 연출을 만나 현대적인 감성의 영화가 되었다. 네 남녀의 핑크빛 소동은 연극적인 대사와 흑백 영상으로 그려져 처음엔 생소하기도 하지만 어느새 개성 강한 캐릭터들의 소동극에 빠져들게 한다.

 

 

<이미지: Paramount Pictures>

 

7. 네브래스카 Nebraska, 2013, 알렉산더 페인

 

<네브래스카>는 복권에 당첨됐다고 믿는 노인과 자의반 타의반으로 아버지의 여정에 동행한 아들의 이야기를 그린 일종의 로드무비이다. 술주정뱅이에 치매 증상이 있는 괴팍한 노인 우디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는 아들 데이빗이 네브래스카로 향하는 여정이 잔잔하고 여유로운 흑백 풍경 속에 펼쳐진다. 고집 센 노인 우디와 우디의 꿈을 응원하는 옛사람들의 에피소드는 웃기면서도 어딘가 짠하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은 100만 달러의 환상에 취한 우디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보통 사람들의 특별할 것 없는 인생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는다. 흑백 영상으로 되살아난 한적한 시골 풍경은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의 감성이 듬뿍 담겨있다.

 

 

<이미지: 시네마 뉴원>

 

8. 이다 Ida, 2013, 파벨 포리코브스키

 

<이다>는 자신의 진짜 이름(정체성)을 찾아가는 수녀 안나의 여정을 담은 로드무비 형식의 영화이다. 보통 로드무비 형식에서 잘 사용하지 않은 4:3의 좁은 화면비율과 정적인 화면 구도는 이 영화가 외적인 여정에 치중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진짜 이름(이다)을 찾아가는 안나의 내적 여정을 담고 있음을 뜻한다. 전체적으로 여백의 미가 진하게 느껴지는 미니멀리즘의 흑백 영상은 주인공 안나의 서서히 변화하는 내면을 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순수한 세계에 갇혔던 안나가 외부 세계로 나아가 깨닫는 당시 사회의 아픔과 고통이기도 하다.
한 개인의 작은 여정을 통해 폴란드의 아픈 역사를 담담한 시선을 조명한 영화 <이다>는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호평받으며 아카데미 영화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이미지: (주)루스이소니도스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9. 동주 DongJu, 2015, 이준익

 

이준익 감독의 <동주>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윤동주의 삶을 담아낸 작품이다. 이미 누구나 잘 아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시대의 비극을 시로 풀어낸 시인 윤동주가 되기까지의 고뇌와 갈등을 차분한 흑백 영상과 절제된 대사로 그린 영화는 시대의 아픔에 통감하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스물다섯의 청년 윤동주와 송몽규가 그들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줄 뿐이다. 이는 오히려 현실이란 거센 장벽에 무기력한 청춘이 느끼는 좌절과 일맥상통한다.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아픈 부분인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어떤 역사적 책임이나 감정을 강요하지 않은 담백한 연출은 흑백 영상이기에 더욱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이 영화가 총 천연색의 영상이었다면 영화 속 청춘이 느꼈던 절망의 감정은 강렬할지언정 긴 여운을 남기지 못했을지 모른다.

 

 

<이미지: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10.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 블랙 앤 크롬 Mad Max: Fury Road, 2015, 조지 밀러

 

2015년 개봉했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강렬한 색감의 비주얼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작품이다. 30년 만에 부활한 조지 밀러 감독의 영화에 관객은 짜릿한 흥분으로 화답했고, 열띤 반응은 흑백 버전 개봉으로 이어졌다. 이는 조지 밀러 감독이 핵전쟁으로 멸망한 22세의 분위기를 전달하는데 흑백 버전이 연출 의도에 가장 잘 부합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흑백 버전으로 귀환한 영화는 컬러 영상과 대비되는 강렬함을 선사한다. 삭막한 사막은 더욱 거칠고 황량한 공간이 되어 음울한 세기말의 정취는 한껏 고조되고, 심장을 들끓게 한 광기의 드라이브는 이전보다 더 완벽하고 위협적이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 블랙 앤 크롬>은 색을 배제한다는 것으로도 같은 영화를 더욱 강렬하게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영화이다.

 

 

<이미지: (주)률필름 (주) /스톰픽쳐스코리아 / (주)프레인글로벌>

 

11. 춘몽 A Quiet Dream, 2016, 장률

 

‘장률스럽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영화 <춘몽>은 한낮에 꾸는 꿈처럼 묘한 여운을 안겨주는 영화이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영화는 등장인물부터 이색적이다. 영화의 주연을 맡은 배우 한예리와 양익준, 윤종빈, 박정범, 세 감독은 자신의 실명으로 영화에 등장하는데 특히 세 감독은 자신이 연출한 영화 속 캐릭터로 등장한다. 이러한 설정은 영화 속 인물들이 처한 불행한 현실이 마냥 무겁게 전달되는 것을 완충시키며, 모호한 분위기에 취하게 한다. 또한 포근한 질감의 흑백 영상은 답답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꿈이 된다.

 

 

<이미지: 찬란>

 

12. 프란츠 Frantz, 2016, 프랑소와 오종

 

<프란츠>는 프랑소와 오종 감독이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이후 2년 만에 선보이는 작품이다. 그동안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과 장르로 인정받은 오종 감독은 <프란츠>에서 이전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우아하고 섬세한 멜로드라마를 선보였다. 1차 세계대전 직후 두 남녀의 거짓과 진실, 용서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그린 드라마는 고전적인 정취가 풍기는 흑백 영상과 파스텔톤의 컬러 영상을 넘나들며 아름답고 황홀한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다.
오종 감독 특유의 도발적인 스타일은 볼 수 없지만, 20세기 고전을 보는듯한 황홀감을 안기는 영화는 분명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