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시대의 영화와 텔레비전

 

by. 빈상자

 

지난해 11월 설마설마 했던 트럼프가 덜컥 미국의 49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선 결과에 많은 미국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특히,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바탕으로, 제작자부터 배우들까지,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많은 할리우드가 받은 충격은 컸다. 유명 감독들과 배우들은 그들의 유명세를 빌어 트럼프와 그의 인종과 종교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 기반한 정책에 대한 풍자와 비난에 나섰다. 시상식장은 그 본보기의 정점에 올랐다. 그러나 할리우드의 트럼프 정부에 대한 반격이 시상식장이나 기자회견장에서만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트럼프의 당선 이후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와 텔레비전의 변화와 적응의 분위기를 살펴본다.

 

<이미지: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①트럼프 시대에 필요한 영웅 <겟 아웃>

<겟 아웃>은 인종차별이라는 다소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주제를 B급 영화 감성의 직설적인 수사법과 적절한 코미디의 배합으로 관객들의 부담을 덜어 큰 성공을 거뒀다. 또한 흑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공포영화라는 형식을 빌어 현재 미국의 현실을 반영하고 비꼰 것도 좋은 평가를 받는데 도움이 되었다. 트럼프 시대가 잘 반영된 최초의 영화라는 평가도 나왔다.
하지만, <겟 아웃>이 처음부터 트럼프 시대를 겨냥하고 염두했던 것은 아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기 몇 년 전부터 시나리오를 준비했다는 조던 필 감독은, 오히려 <겟 아웃>은 오바마 시대를 비꼬려는 시도로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흑인이 미국 대통령이 되어도 변하지 않는 인종차별을 지적하려 했던 것이 감독의 처음 의도였다. 그래서 트럼프가 오기 전에는 결말도 달랐다.
<겟 아웃>은 최근 블루레이를 출시하면서 조던 필 감독이 최초 편집본에 넣었던 결말을 공개했다. 최초의 결말은 우리가 극장에서 본 결말과 정반대였고, 개봉 전 제한된 시사회에서 관객들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사이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다. 감독은 결말을 다시 찍었다. 트럼프 덕분에 인종차별이 보다 노골화된 시대가 되면서, 감독은 사람들을 깨우는 ‘경종’보다 앞으로 싸움을 지속할 수 있는 ‘영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미지: Showtime>

 

②불통의 트럼프 시대 <홈랜드>

오바마 전 대통령도 즐겨봤다는, 2011년부터 테러리즘을 다뤄온 쇼타임의 미드 <홈랜드>의 여섯 번째 시즌이 트럼프가 취임하기 5일 전에 시작했다. 사실, 트럼프 취임 13개월전부터 시즌 6을 준비하기 시작했던 <홈랜드>의 이번 시즌은 처음부터 꼬였다. 시즌 6에 새로 선출된 대통령이 등장하는데, 그 대통령은 여성이다. 누가 봐도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을 예상한 설정이었고, 쇼러너인 알렉스 갠서(Alex Gansa)도 이를 인정했다.
트럼프의 승리로 <홈랜드> 제작팀은 처음부터 헛다리를 짚은 샘이었다. 이것이 드라마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 제작팀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전체 12개의 에피소드 중 8개의 촬영을 마친 상황이었다. 그런데 드라마 원안에 있던 대통령과 미정보기관의 대립, 가짜뉴스와 극우의 부상이 트럼프 당선 후 현실화 되면서 오히려 드라마의 리얼리즘을 더해주는 일이 생겼다.
트럼프의 당선 이후 <홈랜드>는 이미 촬영한 분량의 편집을 다시 하고 추가 촬영까지 감행했다. 특히 ‘미국 우선(America First)’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시즌 6 피날레의 마지막 20분, 불통 대통령으로 급변하는 새 대통령의 모습은 <홈랜드>가 새로 당선된 트럼프에게 전하는 DM(다이렉트 메시지)였다.

 

 

<이미지: hulu>

 

③트럼프 시대의 악몽 <핸드메이즈 테일>

<홈랜드>의 결말에서 염려한 ‘끔찍한 시대’ 모습은 지난 4월에 시작한 훌루(Hulu) 신작 <핸드메이즈 테일>에서 보다 구체화된다.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엄격한 기독교 근본주의를 기반에 둔 전체주의 정부가 등장하는데 유독 여성에게 가혹하다. 가임이 가능한 여성은 지배계급 남성의 시녀가 되어 시중 이상의 것을 요구받는다.
아무리 트럼프 시대라고 해도 드라마 속 끔찍한 세계를 지금의 미국과 비교하는 것은 다소 엄살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인들의 혼란과 충격을 고려하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성을 노골적으로 성적대상화 삼고, 여성의 월경을 방송에서 공격하고, 십 수명의 여성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 현재 미국의 대통령이다. <핸드메이즈 테일>의 끔찍한 미래를 대하는 시청자의 공포는 여성혐오자이자 성차별자를 지도자로 둔 현실에 기반한다.

 

 


 

물론, 모든 영화와 텔레비전이 트럼프에 대항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할리우드는 정치보다 이윤에 민감하다. 또한 트럼프의 등장은 보수적인 세력이 목소리를 높이고 응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수세력의 부상은 엔터테인먼트 제작자들이 그들의 시장적 가치를 재발견하게 한 계기도 되었다.

 

<이미지: NBC ‘The Brave‘>

 

①나랑 싸우자 <더 브레이브>, <밸러>, <씰 팀>

첫번째 조짐은 전쟁과 관련된 드라마가 늘어나는 것이다. NBC는 올 가을에 <더 브레이브(The Brave)>라는 새 드라마를 시작한다. <더 브레이브>는 ‘용감한’ 미군들이 개인의 희생을 감수하고 어려운 임무들을 완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다. CW도 ‘용맹’이란 뜻을 가진 <밸러(Valor)>라는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다. <밸러>는 최고의 훈련을 받은 헬리콥터 조종사들의 이야기이다. CBS 또한 <씰 팀(Seal Team)>이란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다. 네이비의 씰 부대원들의 이야기로 그들의 영웅담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미지: CBS ‘The Gospel of Kevin’>

 

②보다 경건하게 <케빈의 복음>, <성경대로>

트럼프 시대가 된 후 종교는 보다 주목 받는 주제가 되었다. ABC의 새 드라마 <케빈의 복음(The Gospel of Kevin)>은 이기적이고 사고만 치던 케빈이 어느 날 천사에게 세상을 구원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은 후 변모해가는 과정을 다룬다. CBS의 새 시트콤 <성경대로(By the Book)>는 소설 ‘성경에 따라 사는 한 해(The Year of Living Biblically)’를 원작으로, 친구를 잃은 후 성경에 따라 엄격한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인물에 관한 코미디이다.
2015년 종교계의 넷플릭스라고 불리며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한 퓨어플릭스(Pure Flix)는 트럼프 시대의 수혜자로 부상했다. 퓨어플릭스의 CEO인 마이클 스콧(Michael Scott)은 비즈니스 인사이더(Business Insider)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등장 이후로 구독자가 폭증하고 있다고 자랑하면서 그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일에도 주저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이미지: 롯데엔터테인먼트>

 

잊고 싶어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

트럼프 시대가 현실도피적인 영화와 드라마의 붐을 가져올 것이란 전망도 있다. 트럼프가 집권 몇 달 만에 초래한 지금 미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로 전쟁에 대한 환멸과 우울함에 빠졌던 70년대 말 미국의 분위기는, <디어 헌터>와 <지옥의 묵시록>과 같이 그 당시의 어두움 심정을 그대로 반영한 명작들을 선사하기도 했지만, <스타워즈>라는 우주 멀리 멀리로의 거대한 현실도피 시리즈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드라마는 이미 CNN에 넘쳐나기 때문에 현실도피적인 엔터테인먼트가 뜰 것”이라는 <데드풀>의 제작자 사이먼 킨버그(Smion Kinberg)의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트럼프가 헤집어 놓은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은 미국인들이 올여름 개봉을 앞두고 있는 블록버스터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에 얼마나 몰려들지 궁금해진다.

 

 

<이미지: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백악관보다 관객 <컨택트>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가 작년에 미국에서 개봉한 것은 미국이 대선을 치른 지 3일 만인 11월 11일이었다. 개봉 전에는 ‘외계인의 침략’이라는 극적인 설정에 비해서 상당히 차분한 속도와 감정을 갖고 있는 영화가 과연 흥행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4배 이상의 수익을 거두며 흥행했고, 무엇보다 영화에 대한 관객들과 평단의 평가가 좋았다. 말도 통하지 않고,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왔는지, 어떠한 힘을 갖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와 전쟁이 아닌 소통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주인공 루이스의 인내심 있고 진중한 노력이, 언어와 종교가 다른 문화에 적대와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트럼프 시대를 버티는 해답과 치유처럼 작용했다.
<컨택트>는 조금도 정치적이지 않았고, 트럼프의 당선을 예측할 수도 대비할 수도 없었지만, 트럼프 시대를 막 맞이한 관객들은 그 어떤 제작자나 감독들보다 예민하고 즉각적으로 이 영화에 반응했다. 트럼프를 국가의 지도자로 뽑은 미국인들이 앞으로 어떤 미국을 바라고 계획하고 있는지에 대한 예상은, 어쩌면 제작자들과 감독들의 앞으로의 계획이 담긴 캘린더보다 지금 관객들이 흘러가는 방향을 보는 것으로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것은 대중이 어떻게 움직이는 가에 달려있는 것 같다. 영화판도, 정치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