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영국 왕실을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
동화와 현실 사이, 결국은 삶의 이야기

by. 겨울달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왕가 또는 왕실의 존재는 흐르는 역사 속에 멈춰 있는 존재 같다. 한 나라의 상징이라는 측면의 뒤에는 전근대적 제도의 유물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존재에 대한 수많은 논의에도 왕족은 태어나면서부터 한 국가의 상징이 되어 일거수일투족이 모든 사람의 눈에 띄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상징적인 존재로 소비되는 이들의 삶은 특히 20세기 이후 각종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로 다뤄진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왕실인 영국 ‘윈저 왕가’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수많은 작품의 소재와 영감을 제공했는데, 이 글에는 20세기 이후의 영국 왕실을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를 소개한다. 현대 왕실을 그리는 것은 인물의 다수가 생존해 있는 데다 사건 사고에 대한 대중의 기억도 축적되어 있어 가장 현실적이지만, 내밀한 속사정을 모두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영화적 상상력을 가장 절묘하게 발휘해야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 8편을 영화의 시대 배경 순서로 정리했다.

 

<이미지: IM Global>

1. W.E. – 에드워드 8세와 월리스 심프슨

에드워드 8세와 월리스 심프슨의 사랑과 결혼 문제는 당시 유럽을 뒤흔든 가장 큰 스캔들이었다. 왕실과 의회뿐 아니라 영국 국민 또한 젊고 인기 많은 왕세자가 두 번 이혼한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다. 결국 에드워드는 사랑이 아니라 왕위를 포기했다. 퇴위 후 윈저 공작 부처가 된 에드워드와 월리스는 프랑스 등 유럽 각지를 돌며 화려한 생활을 영위했지만 영국 왕실에서 오랜 시간 동안 배제되었다. 조지 6세 왕비 엘리자베스 (퀸 마더)와 월리스와는 불화는 유명했으며, 공작 부부는 나치에 협력했다는 의심도 받았다. 결국 영국령 바하마에 총독으로 쫓겨나듯 가게 되고, 두 사람의 사이는 극도로 나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위기 속에서 두 사람은 평생을 함께했으며 서로의 배우자로서 일생을 마쳤다.

영화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선택하면서 떠안게 된 책임과 인내의 시간을 그렸는데 연출이 엉망이라는 혹평을 받으며 박스오피스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 속 미술과 의상은 ‘심프슨 블루’라는 색이름까지 남길 만큼 패션과 유행에 정통했던 월리스의 화려한 삶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월리스의 모습을 그대로 빚어 놓은 듯한 안드레아 라이즈보로의 연기 또한 인상적이다.

 

<이미지: 출처 : 화앤담이엔티 / 그랑프리>

2. 킹스 스피치 – 조지 6세

조지 6세는 ‘형님’ 에드워드 8세의 돌발 행동으로 졸지에 왕이 된 인물이다. 애칭인 ‘버티’라고 더 많이 불린 그는 에드워드의 그늘에 가려 살아왔는데, 그 역시 그런 평범한 삶에 만족하는 듯했다. 오랫동안 좋아했던 백작 영애 엘리자베스와 결혼해 두 딸을 낳고 행복하고 소박하게 살길 바랐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버티는 왕위에 올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2차 세계 대전을 겪게 된다. <킹스 스피치>는 영국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 조지 6세의 스피치 치료와 그의 연설을 통해 그의 삶을 다룬다.

영화는 조지 6세와 그의 언어치료사인 라이오넬 로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병약하고 말더듬이 증세가 심했던 버티가 아버지와 형과의 관계에서 받았던 상처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극복해가는 과정을 진솔하게 풀어간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 현실보다 다소 과장된 부분이 없진 않지만,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국민에게 희망이 된 ‘왕’의 이야기라는 핵심은 놓치지 않았다. 딸인 엘리자베스 2세의 극찬을 받아낸 영화는 2011년 아카데미 어워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미지: Ecosse Films>

3. 로열 나이트 아웃 – 엘리자베스 & 마거릿 공주

1945년 5월 7~8일, 유럽 내에서 2차 세계 대전이 막을 내렸다. 이날 런던에서는 군인들과 시민들이 함께 어울린 축제의 밤이 펼쳐졌고, 엘리자베스와 마거릿 공주 또한 그 축제에 참여한다. 두 공주는 보호자인 군인들과 함께 다니고, 통금인 새벽 1시 이전까지 돌아와야 한다는 조건으로 생애 첫 밤 외출을 하게 되는데 <로열 나이트 아웃>은 바로 그 밤 외출을 소재로 한 로맨틱 코미디다.

신분을 감추고 거리로 나선 두 자매는 어느 순간 떨어져 다닌다. 마거릿 공주는 자신을 평범한 소녀라고 생각하고 접근한 한 해군 병사와 어울려 나이트클럽, 도박장, 술집과 집창촌까지 공주가 갈 것이라 상상하지 못한 곳에 간다. 한편 엘리자베스는 무단 외출을 감행한 공군 병사와 마거릿을 찾기 위한 모험을 펼친다. 영화는 두 자매가 6년 동안 감내해야 했던 공포를 벗어나 자신의 신분에 따른 제약도 잊은 채 생애 가장 잊지 못할 밤을 보내는 모습을 밝고 경쾌하게 그린다. 하지만 역시나 영화와 현실이 다른 부분은 있는데 1945년 5월 당시 두 공주는 각각 만 19세와 14세였으며 보호자들과 함께 새벽 1시에 무사히 귀가했다고 한다.

 

<이미지: 넷플릭스>

4. 더 크라운 – 엘리자베스 2세

넷플릭스 <더 크라운>은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때부터 현대의 영국 왕실 이야기를 다루는 야심 찬 프로젝트다. 영국 왕실 전문 작가라고 불릴 만한 피터 모건이 제작을 지휘하고 스티븐 달드리가 연출로 참여하여 화려하지만 그만큼 냉혹한 왕실의 내밀한 이야기를 우아함을 더해 그린다. 현재 공개된 시즌 1은 엘리자베스와 필립 대공의 결혼, 조지 6세의 사망, 왕위에 즉위한 엘리자베스의 개인적, 정치적 고난과 갈등, 마거릿 공주의 연애와 결혼 문제 등으로 채워졌다.

엘리자베스와 남편인 에든버러 공 필립의 결혼은 시즌 전체에 걸쳐 그 갈등을 점점 쌓아간다. 엘리자베스가 그녀를 위해 가족과 국적, 일과 경력, 심지어 아이들에게 성을 물려주는 권리마저 포기해야 했던 필립과 갈등하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어린 여왕을 만만하게 보는 수상 윈스턴 처칠과의 기싸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홀딱 빠진 바람에 스캔들메이커가 된 동생 마거릿 공주의 일이 더 중점적으로 다뤄진다. 시즌 1이 끝나면 자유롭고 소박한 삶을 꿈꾼 엘리자베스 공주는 사라지고, 왕실의 권위를 지켜야 하는 ‘여왕’ 엘리자베스가 탄생을 목격하게 된다. 시즌 2에서는 필립 공과의 불화가 더 깊어지고, 전 세계의 영국 식민지가 독립하면서 ‘대영 제국’이 쇠락해가는 모습을 그릴 예정이다.

 

5 – 6. 다이애나 & 더 퀸 – 다이애나 왕세자비

영국 왕실에서 아마도 여왕 다음으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은 20년 전 세상을 떠난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일 것이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80년 13살 연상의 찰스 왕세자와 결혼해 왕세자비가 된 그녀는 영국민의 사랑을 받았지만 정작 남편의 사랑은 받지 못했다. 각자 외도로 결국 결혼생활은 파탄 나고 다이애나는 방송에서 영국 왕실을 비난하며 이혼을 선언했다. 두 사람은 끝내 이혼했고 다이애나는 노골적으로 파파라치의 표적이 되었다가 끝내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영국 왕실은 왕위 후계자의 어머니인 그녀를 위한 성대한 장례를 치렀고, 엘튼 존이 장례식에서 부른 ‘Candle In the Wind’는 전 세계적으로 히트했다.

36세로 세상을 떠난 그녀의 삶은 수많은 사람의 가십거리가 되었는데, 정작 그녀의 진정한 사랑이 누구인지는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 부분에 집중한 영화 <다이애나>는 그녀의 생전 마지막 2년의 삶, 특히 그녀의 ‘비밀 연인’인 파키스탄계 심장외과 전문의 하스낫 칸과의 관계를 그린다. 서로 사랑했지만 사생활을 중시하는 칸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다이애나는 함께 할 수 없었다. 결국 헤어졌지만 칸을 잊지 못한 다이애나는 그를 질투하게 하려고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영화가 현실을 얼마나 정확히 반영했는지는 당사자들이 증언이 없으므로 확인할 수 없지만, 영화는 각본과 연출이 엉망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 남은 것은 엉망인 영화에 그나마 숨결을 불어넣은 나오미 왓츠의 연기뿐이었다.

한편 다이애나 사망 사건을 두고 영국 왕실의 태도는 차가웠다. 엄연히 이혼하고 왕실을 떠난 사람인만큼 왕실 일원이 아닌 개인의 자격으로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이를 본 영국민은 분노했고, 왕실 폐지 여론이 전체의 50%가 될 정도로 왕실의 인기가 땅에 떨어졌다. <더 퀸>은 이 당시 다이애나의 장례 문제 때문에 만난 엘리자베스 여왕과 토니 블레어 총리의 논의가 중심이다. 두 사람은 다이애나를 왕실 일원으로 인정해야 하는지 여부와 왕실에 대한 미디어의 지나친 관심, 다이애나에 대한 대중의 사랑, 왕실의 존재에 대한 상반된 의견, 심지어 공화주의자들의 왕실 폐지 주장까지 거론하며 왕족의 권위와 개인의 사생활, 자유에 대해 폭넓게 논의한다. 여왕을 연기한 헬렌 미렌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미지: Lifetime>

7. 윌리엄 앤 케이트 – 윌리엄 왕자 부부

2011년, 영국 왕실 후계 2순위인 윌리엄 왕자가 결혼했다. 상대는 대학 시절부터 사귄 오랜 연인 케이트 미들턴. 두 사람의 연애는 그동안 영국뿐 아니라 세계인들의 관심을 받아왔다. 특히 케이트 미들턴은 왕족과 사귄 ‘평민’이라는 점 때문에 화제가 됐다. 결국 결혼으로 이어진 두 연인의 이야기는 많은 매체의 관심거리가 됐는데 특히 미국 방송사 두 곳이 두 사람의 10년 연애사를 영화화했다. 그중 케이블 채널 라이프타임은 (비공식) 전기 TV 영화를 많이 만들어온 업력을 자랑하며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로맨스 영화를 만들었는데 바로 <윌리엄 & 케이트>이다.

영화는 두 사람의 공개된 러브 스토리를 따라가면서도 사람의 갈등 부분에서는 상상력을 발휘한다. 에든버러 대학에서 처음 만난 윌리엄과 케이트는 오랜 시간 이후 연인이 되지만, 윌리엄이 사생활 공개를 꺼리면서 결혼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지 못하면서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를 반복하다. 전형적인 연애 이야기로 두 사람의 삶을 얼마나 잘 담아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즐거움은 보장한다. 영국 출신 카밀라 러딩턴과 호주 출신의 니코 에버스-스윈들이 각각 케이트와 윌리엄 역을 맡았다.

 

<이미지: BBC>

8. 찰스 3세 – 찰스 왕세자

지금까지 소개한 영화가 이미 있었던 일을 반영한 작품이라면, 이 영화는 앞으로 일어날 ‘만약’에 기반을 둔 작품이다. <찰스 3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망하고 찰스 왕세자가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면?’이란 가정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간다. 여왕의 장례식을 치른 찰스 왕세자는 정식으로 왕위에 오를 때를 기다리지만, 영국민의 자유 침해 가능성이 있는 법안 승인을 반대하며 총리와 대립한다. 의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찰스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찰스에 대한 여론은 점점 악화한다. 이 기회를 그냥 넘길 리 없는 왕자비 케이트는 윌리엄 왕자를 부추기고, 윌리엄은 의회와 찰스 왕세자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게다가 헨리 왕자는 공화주의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영국 왕실의 존립 자체에 의문을 품는다.

<찰스 3세>는 동명의 연극을 원작으로 BBC에서 TV 영화로 제작해 방영했다. 방영 당시 큰 논란을 가져왔는데 왕실 사람들을 권력에 굶주린 인물로 그린 점, 특히 샬롯 라일리가 연기한 케이트를 마치 ‘맥베스 부인’처럼 그린 것 때문에 인터넷이 상당히 시끄러웠다. 그렇지만 <찰스 3세>는 현재 영국 왕실의 후계자로 찰스가 아닌 윌리엄을 선호하는 영국민의 여론이 반영되었으며 그 외에도 자유를 억압하는 입법안의 발의, 공화주의자들의 거센 활동 등을 그리면서 현실 반영은 제대로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