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탈출: 종의 전쟁’

우린 어느 편에 서야 하는 걸까?

 

by. Jacinta

 

인간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먼 우주로 향한 남자가 낯선 행성에 도착해 겪는 이야기를 그린 <혹성탈출, 1968>은 상상력에 먼저 놀라고, 비판적인 메시지를 함축한 마지막 장면에 놀라게 되는 영화이다. 인류는 퇴화하고 대신 인류의 문명을 이어받은 유인원이 인간을 조롱하고 지배하는 영화 속 세상은 언젠가 실현될지도 모를 섬뜩함을 품고 있다. 처음 영화가 나왔을 때보다 더욱 예측 불가능한 위험 요소가 산재된 21세기에 부활한 <혹성탈출> 시리즈는 1968년의 행성 사회가 오기까지의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리부트 작품이다.

 

<이미지: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시저의 탄생기를 자멸을 자초하는 인간 세상과 대비시킨 <진화의 시작>, 멸종 위기에 처한 인류를 두고 대립하는 유인원 사회를 그린 <반격의 서막>에서 자만했던 인류는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흥미로운 건 바로 여기서부터다. 유인원의 반란과 바이러스로 생존이 위태로운 인류 사회에 동정을 느끼기보다 최초로 인간의 지능과 감정을 얻은 유인원 사회의 리더 시저에게 끌린다는 점이다. 시저는 말을 할 수 있는 유인원이자 이성적인 판단력을 지녔다는 점이 남다르다. 비록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만행에 실망과 분노를 느끼지만, 과학자 윌의 보호 아래 있던 따뜻한 성장기는 다른 유인원들과 달리 인류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게 할뿐더러 대립보다 공존을 택하게 한다. 이처럼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시저의 리더십은 역으로 극소수만이 살아남는 인류 사회의 희망이자<혹성탈출>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종의 전쟁>은 이상적일 정도로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던 시저의 세계관이 흔들리는 이야기다. 즉, 1968년 <혹성탈출>의 서늘한 풍경에 한층 더 가깝게 다가서며 인류의 암울한 미래가 점쳐지는 영화다. 흥미로운 점은 시저의 가치관이 무너지고 앞으로 다가올 불투명한 인류의 미래가 시저, 개인의 고통에서 더 크게 발현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시저와 대치되는 인간군 대령이 과연 악하기만 한 존재인가라는 것에 의구심을 들게 한다. <종의 전쟁>은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유인원을 말살하려는 인간군 대령과 개인적인 고통에 분노하는 시저의 입장을 팽팽히 맞서게 하며 관객의 갈등을 부른다. 그동안 보여줬던 시저의 이상적이고 따뜻한 태도에 끌렸다면, 이번 작품에서 보여준 시저의 태도는 이해되면서도 혼란스럽다. 극한의 고통으로 인간적인 본성에 가까워진 시저의 고뇌에 찬 변화는 더욱 뼈 아프게 다가온다.

 

 

<이미지: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인류의 미래를 위해 냉혹한 방법을 택한 인간군 대령과 유인원의 미래를 위해 개인적인 감정으로 접근하는 시저, 이 둘 중에서 누가 더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기는 애매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바이러스로 멸종 직전에 놓인 인류가 그들에게 우호적인 시저의 신념을 저버렸다는 것이다. 이후 찾아올 포스트 시저 시대에 어두운 그림자가 되고, 1968년 지구를 등졌던 테일러(찰톤 헤스톤)가 도착한 비정한 행성에 한층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이는 영화사에 역사적인 장면으로 기록되는 1968년작 <혹성탈출>의 엔딩을 연상시키는 장면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힘겹게 유인원의 위협에서 벗어난 테일러가 말 못 하는 여인 노바를 데리고 금지 영역으로 들어선 해변 길에서 본 암울한 운명은 시저와 동료들이 말 못 하는 소녀 노바를 데리고 인간군을 쫓아가던 길과 접점을 이룬다.

 

이처럼 <종의 전쟁>은 시저란 캐릭터에 변화를 주면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는 영화다. 그 과정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리부트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강하게 대립 구도를 이루는 인간군 대령과 인류와 유인원의 구분을 무색하게 하는 인간의 편에 선 코바의 옛 부하를 등장시켜 시저의 내적 갈등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볼 수 없게 한다. 단순히 박진감 넘치는 스케일과 긴장으로 볼 수 없는 <종의 전쟁>은 1968년 처음 던졌던 영화의 메시지로 귀결하며 리부트 시리즈를 완벽하게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