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의 매력을

수줍게 드러낸 ‘드라이브’

 

by. 빈상자

 

영화 속 실제 촬영지와 극 중 배경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스페인 사막에서 촬영하고도 미국 서부라고 시치미를 떼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하지만 촬영지와 배경이 일치하는 경우에도 그 장소를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반대로 때론 장소에도 캐릭터를 부여해 그곳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보여주며 활용하기도 한다. 때문에 어떤 특정 장소를 말할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영화가 있기 마련이고, 그 영화하면 생각나는 장소를 연결고리로 영화의 영향력을 확대하기도 한다.

 

<이미지: ‘드라이브’ 판씨네마>

 

할리우드가 있는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수도 없이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졌지만, 그 모든 영화들이 다 로스앤젤레스라는 것을 대놓고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로스앤젤레스라는 것을 수줍게 감추고 있는 영화들이 더 많은 편이다. 그에 비한다면 니콜라스 윈딩 레픈 감독의 2011년 작 <드라이브>는 로스앤젤레스라는 장소를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활용한다. ‘드라이버’를 주인공으로 ‘드라이브’가 중요한 영화의 촬영지를 ‘추격전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정한 선택에는 쉽게 수긍이 간다. 더구나 로스앤젤레스의 황량하고 마른 풍경은 외롭고 고립된 인물들과 한 몸처럼 녹아든다.

 

<이미지: ‘드라이브’ 판씨네마>

 

하지만 레픈 감독은 다운타운의 전경을 제외하고는 로스앤젤레스의 가장 유명한 장소들은 일부러 찾지 않았다. 선셋대로와 같은 곳은 오히려 재미없다며 감독은 로스앤젤레스의 작은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앤젤리노가 보기에도 가장 로스앤젤레스 영화 같은 그림을 만들어낸 감독의 재주가 신비로울 정도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와 왕가위가 만난 것 같은 사실적이면서도 스타일리쉬한 영상과 80년대의 테크노로 끝맛을 올린 듯 한 독특한 감각의 영화 <드라이브>의 촬영 장소들을 돌아본다.

 

1. 더 맥아더 : 드라이버와 아이린의 아파트

 

엘리베이터와 복도에서 스쳐가던 인연, 드라이버와 아이린

 

바랬지만 여전히 생기 있는 파스텔 색감의 아이린 아파트 실내

 

<드라이브>에서 드라이버(라이언 고슬링)와 아이린(캐리 멀리건)이 사는 아파트는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둘이 처음 만난 공간이자 함께 하는 공간이며, 또 이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쓰리잡을 뛰고 있는 드라이버나 식당 종업원인 아이린의 살림은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기에 그들의 아파트는 고급스럽거나 화려한 곳일 수는 없다. 하지만 ‘저소득층’ 아파트임에도 불구하고 둘의 아파트는 드라이버와 아이린을 초라하게 만들지 않는 무언가 ‘품위’를 가지고 있다. 오래됐지만 낡았다기보다 고풍스럽고, 어둡지만 위험하기보다 낭만적으로 보이는 공간이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더 맥아더’, 저 앞에 있는 하얀 트럭들도 다 영화촬영팀이다

 

드라이버와 아이린의 아파트를 촬영한 곳은 사실 1920년대에 건축된 아트데코 스타일의 역사적인 건물 ‘더 맥아더(The MacArthur)’이다. (영화 촬영 당시는 ‘파크플라자’ 호텔이었다) 지금은 주로 연회 및 행사, 결혼식 등으로 공간을 대여해주고 있다. 1920년대에 부유한 사교클럽의 건물로 화려하게 세워진 이후 여러 번 용도와 이름이 바뀌는 우여곡절 끝에 최근에 다시 현재 이름이 되었다. <드라이버>뿐 아니라 <프레스티지>, <갱스터 스쿼드>, <광란의 사랑>, <마스크>,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등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드라이버의 아파트 실내에서 바라본 풍경

 

하지만 다른 영화들에 비해 <드라이브>에서 ‘더 맥아더’의 흔적을 찾기는 비교적 쉽지 않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더 맥아더’의 화려한 내외 장식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반면 <드라이브>는 그러지 않았다. <드라이브>에게 필요했던 건 화려한 호텔이 아니라 드라이버와 아이린의 소박한 아파트였다. 그 이유로 미술팀은 건물의 내부에 영화 속 아파트의 복도와 실내 등 세트를 아예 새로 지었다.

 

‘더 맥아더’에서 내려다본 풍경

 

전망 좋은 창가는 늘 연인들의 몫

 

‘더 맥아더’의 실내외를 보여주지도 않고 어차피 세트를 새로 지을 거면서 감독이 굳이 이곳을 촬영 장소로 정한 것은 오로지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과 맥아더 공원이 잘 내려다보이는 전경 때문이었다. 영화는 다운타운을 반복해서 보여주며 도시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은은한 불빛 아래 창가에 서서 이 전망 좋은 창밖의 풍경 내려다보고 있자면 아마 누구와라도 사랑에 빠질 것만 같다는 생각을 감독도 했나 보다.

 

 

2. 맥아더 공원 : 드라이버와 쿡의 거래

 

겉으로 보기엔 참 평화롭긴 해도…

 

맥아더 공원의 흔한 거래

 

드라이버는 아이린 가족이 곤경에 빠지자 남편 스탠다드가 빚을 지고 있는 쿡을 만나 거래를 하게 된다. 그들이 만나는 공원은 드라이버와 아이린의 아파트인 ‘더 맥아더’ 이름의 연유가 된 ‘맥아더 공원(MacArthur Park)’이다. 여기서 ‘맥아더’는 우리가 아는 그 유명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이름이 맞다. ‘웨스트레이크’란 이름으로 1880년대에 식수용 저수지로 만들어졌던 이곳은 나중에 공원이 되었고, 1940년대에 맥아더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밤과 낮이 다른 공원

 

맥아더 공원을 산책 중인 아이린 모자를 바라보고 있는 드라이버의 시선

 

영화는 두 가지 이유에서 맥아더 공원을 정확히 사용하고 있다. 첫째, 영화처럼 이 공원은 실제로도 드라이버와 아이린의 아파트 바로 앞에 있다. 둘째, 드라이버와 쿡이 만난 불순한 이유처럼 맥아더 공원은 실제로 범죄자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1980~90년대까지 이곳은 가족들이 찾는 공원이라기보다 마약과 매춘이 거래되는 우범지역이었다. 다행히 2000년대 들어 대대적인 환경정비를 거쳐 범죄율이 급감했다. 하지만 라이언 고슬링이 섰던 자리에서 기념촬영을 하겠다고 낮에 서성이는 것은 몰라도, 밤에 이곳에서 아이폰을 들고 산책하는 것은 여전히 추천하지 않는다.

 

 

3. 빅 식스 마켓 : 드라이버와 아이린의 인연이 시작된 곳

 

그녀를 만나기 10미터 전

 

몇 년을 한 곳에 살아도 이웃에 누가 사는지 잘 모를 수 있는 것은 서울이나 로스앤젤레스나 마찬가지다. 기껏해야 주차장이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치고, 얼굴이나 기억하면 다행이다. 더군다나 딱히 사람이 붐비거나 공공장소라고 할 만한 곳도 드문 로스앤젤레스에서 주거지를 제외하고 이웃을 만날 수 가능성이 높은 장소로 동네 마트만 한 곳은 없다. 그래서 드라이버와 아이린의 공식적인 첫 만남도 마트에서 시작한다. 물론 드라이버는 주차장과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쳤던 아름다운 아이린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트는 최근에 살짝 리모델링을 한 후 예전보다 깔끔해졌다

 

레픈 감독이 영화 속 장소들과 실제 촬영지의 장소들 사이의 동선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특별히 집착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드라이버와 아이린이 만난 마트의 실제 촬영지인 ‘빅 식스 마켓(Big 6 Market)’은 두 사람의 아파트(더 맥아더)에서 걸어서 딱 3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미국에서 마트라고 하기엔 좀 작고 그렇다고 리쿼스토어라고 하기엔 큰 애매한 크기지만, 드라이버와 아이린이 서로를 놓치지 않고 틀림없이 마주치기엔 적합한 공간이다.

 

 

4. 로스앤젤레스 강 : 드라이버와 아이린(+1)의 첫 데이트

 

지켜야 할 신호등도 차선도 없는 이 길은 드라이버에게 딱 어울린다

 

마트에서 고장 난 차를 가지고 아이린은 드라이버가 일하는 정비소로 아들 베니시오와 함께 온다. 그리고 드라이버는 아이린과 베니시오를 집으로 데려다 주기로 한다. 설마 집에만 데려다주고 끝? 물론 그럴 리 없다. 집으로 가던 길에 드라이버는 옆길로 세기로 하고 그렇게 두 사람의 첫 데이트가 시작된다. 그리고 드라이버는 첫 데이트 장소로 로스앤젤레스에서만 가능한 장소이면서도 앤젤리노들이 쉽게 가지 못하는 특별한 장소인 로스앤젤레스 강변으로 간다. 드라이버와 아이린의 첫 데이트 장소를 고심하던 감독에게 라이언 고슬링이 먼저 로스앤젤레스 강을 제안했다고 한다.

 

 

건조한 사막 기후의 로스앤젤레스이지만 우기인 겨울에는 제법 비가 온다. 특히 옛날에는 더 그랬다. 1930년대까지 홍수가 반복되었고 결국 1938년에 대홍수를 겪은 후 시는 로스앤젤레스 강을 깊고 넓게 파고, 그리고 강 전체 77km의 대부분을 콘크리트로 덮어버렸다. 로스앤젤레스 강은 지금도 우기를 제외하고는 영화에서 본 것처럼 대부분은 거의 마른 상태로 있다.

 

로스앤젤레스 강변에 있는 거대한 그래피티

 

이런 평범한 강의 모습은 로스앤젤레스 강에서는 극히 일부 구간에만 남아있다

 

로스앤젤레스 강은 다운타운 전경을 빼곤 <드라이브>에서 나온 로스앤젤레스의 가장 상징적인 장소이다. <그리스>, <터미네이터 2>, <트랜스포머>, <차이나타운>, <이탈리안 잡> 등 수많은 영화들을 이곳에서 촬영하였고, 각 영화에서 모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최근에는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자연생태계를 살리자는 의견도 점차 힘을 얻고 있는데 만일 실현되면 환경에는 좋을지 몰라도 로스앤젤레스는 아이콘 하나를 잃게 될 것 같다.로스앤젤레스 강은 다운타운 전경을 빼곤 <드라이브>에서 나온 로스앤젤레스의 가장 상징적인 장소이다. <그리스>, <터미네이터 2>, <트랜스포머>, <차이나타운>, <이탈리안 잡> 등 수많은 영화들을 이곳에서 촬영하였고, 각 영화에서 모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최근에는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자연생태계를 살리자는 의견도 점차 힘을 얻고 있는데 만일 실현되면 환경에는 좋을지 몰라도 로스앤젤레스는 아이콘 하나를 잃게 될 것 같다.

 

5. 릿지 루트 : 드라이버를 시험에 들게 하는 추격전

 

 

쿡과의 거래대로 드라이버는 쿡의 강도 계획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처음부터 일은 꼬이기 시작하고, 드라이버가 탄 스포츠카 머스탱은 높은 마력의 엔진을 단 크라이슬러 300C에게 쫓기게 되면서 추격전이 시작된다. 드라이버는 그의 주 종목인 추격전에서 가진 재능을 다 부려보지만, 누군지 몰라도 300C의 운전자도 만만치 않았다. 영화 도입부에 나온 추격전이 밤에 도심에서 잔잔한 긴장감을 보여줬다면, 대낮 외진 산길 도로에서의 추격전은 폭발하는 긴장감을 전달한다.

 

‘모방금지’ 길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127시간>의 주인공이다. 살아남기나 한다면..

 

대낮 추격전에서 드라이버가 선택한 도주로는 로스앤젤레스 북쪽의 릿지 루트(Ridge Route)이다. 꾸불꾸불하고 아슬아슬한 오래된 산길을 도주로로 선택한 드라이버의 결정이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극적 긴장감을 올리기에는 아주 적합하다. 조금만 실수해도 바로 낭떠러지인 길에서 드라이버는 아마도 상대방이 실수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루트 99 근처는 지금은 드라이버들 보다 라이더들이 많이 찾는다

 

릿지 루트는 캘리포니아를 남북으로 가르는 지금의 5번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로스앤젤레스 북쪽의 산을 넘는 주도로였던 ‘루트 99’의 일부였다. ‘루트 99’는 비록 형제인 ‘루트 66’ 만큼의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운전하는 재미로 치면 ‘루트 66’ 보다는 훨씬 더 긴장감 있는 길이다. 영화 속에서 추격전이 시작되는 전당포가 있는 산타 클라리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루트 99’로 진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