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다
쌍둥이 영화 열전

by. 겨울달

 

‘쌍둥이 영화(Twin Films)’라는 용어가 있다. ‘쌍둥이를 소재로 한 영화’가 아니라, 비슷한 소재나 내용으로 서로 다른 제작사가 제작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는 영화를 말한다. 같은 소재의 작품이 거의 동시에 만들어지는 것이 정말 하늘이 내린 우연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두 편의 영화를 동시에 비교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몰아보면 더 재미있을 쌍둥이 영화로 어떤 작품이 있는지, 둘 중 어떤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거나 더 흥행했는지 살펴보자.

 

1. 같은 원작

<이미지: 워너브라더스 / Orion Pictures>

위험한 관계 vs 발몽

18세기 프랑스 작가 드 라클로가 쓴 <위험한 관계(Les Liaisons dangereuses)>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여러 편 제작됐지만,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1988년 같은 해 개봉한 <위험한 관계>와 <발몽>을 꼽을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드 라클로의 원작 소설을 충실하게 각색해 드 라클로가 소설을 통해 통렬하게 풍자한 프랑스 귀족 사회를 잘 구현했다. 하지만 두 작품의 흥행 성적은 큰 차이를 보였다. 존 말코비치와 글렌 클로즈가 출연한 <위험한 관계>는 1,400만 달러 예산으로 3,470만 달러를 벌어들이고, 아카데미에서 7개 부문 후보로 지명되며 ‘이 소설은 이 영화’라는 자리를 굳혔다. 하지만 콜린 퍼스와 아네트 베닝의 <발몽>은 약 3,300만 달러를 들였음에도 1백만 달러 정도의 수익을 거두며 흥행 참패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미지: 롯데 엔터테인먼트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백설공주 vs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

고전 동화 ‘백설공주’를 원작으로 한 두 작품은 2012년 몇 달 간격을 두고 개봉했다. 릴리 콜린스 주연의 <백설공주>는 판타지 코미디로 ‘동화답게’ 영상은 총천연색으로 알록달록하고 이야기는 밝고 경쾌하다. 반면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은 원작의 기본적 얼개를 가져와 사냥꾼의 비중을 키우고 공주와 사악한 여왕이 격돌을 벌이는 블록버스터로 탄생했다. 두 작품 모두 평론가들에게 썩 좋은 평가를 받진 못했지만, 제작비의 2배 정도 벌어들였기 때문에 본전은 건진 셈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도 두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는데, <백설공주>가 먼저 개봉하면서 다른 작품은 개봉 전 제목을 정하는 게 힘들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2. 같은 소재

<이미지: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이십세기폭스/Dreamworks/Touchstone Pictures>

단테스 피크 vs 볼케이노 / 딥 임팩트 vs 아마겟돈

1997~1998년 당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2년 동안 재난 영화 2편이 연달아 격돌을 벌였다. 첫해는 화산 폭발을 다룬 <단테스 피크>와 <볼케이노>, 다음 해는 운석 충돌을 다룬 <딥 임팩트>와 <아마겟돈>이다. 그다지 잘 다뤄지지 않는 소재에 도전한 영화이다 보니 아직도 ‘이 소재는 이 영화’ 정도로 바로 생각나는 작품들이다. 이 당시 대결에서 박스오피스 수익은 <단테스 피크>와 <아마겟돈>이 앞선 반면, 비평가들에게는 <볼케이노>와 <딥 임팩트>가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일장 일단이 있었던 셈이다.

 

<이미지: Castle Rock Entertainment / 풍경소리>

스트립티즈 vs 쇼 걸

스트리퍼를 소재로 한 영화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두 작품은 각각 1996년 6월과 1995년 9월 미국에서 개봉했다. 한쪽은 당시 최고의 여성 스타인 데미 무어를 전면에 내세워 흥행을 꾀했고, 다른 한쪽은 <원초적 본능> 폴 버호벤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작품성도 갖추고자 했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개봉 당시 엄청난 혹평을 받았고 95년과 96년 차례대로 최악의 영화로 선정되는 불명예를 얻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영화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는데, <쇼 걸>이 바로 그 경우다. 짐 자무시, 쿠엔틴 타란티노 등 영화감독들과 평론가들의 변호를 통해 <쇼 걸>은 미국 사회에 대한 진지한 풍자를 담은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이미지: CJ엔터테인먼트 / 한국소니픽처스릴리징>

친구와 연인사이 vs 프렌즈 위드 베네핏

2011년 몇 달 사이 간격으로 개봉한 두 영화는 ‘친구가 같이 자고 연인이 된다’는 기본 플롯이 동일하다. 다만 주연을 맡은 배우들의 무게감 면에서 차이가 있다. <친구와 연인 사이>가 아카데미 수상자 나탈리 포트만과 로코계의 황제 애쉬튼 커쳐를 내세운 반면, <프렌즈 위드 베네핏>은 시트콤 출신 스타 밀라 쿠니스와 팝스타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등장한다. 그래도 비평가 평가 수준도 비슷, 흥행 성적도 비슷해서 누가 이겼다고 쉽게 판정하긴 어렵다. 참고로 애쉬튼 커쳐와 밀라 쿠니스는 오랜 친구로 지내다가 2015년 부부가 됐는데, 이들도 처음 연애를 ‘프렌즈 위드 베네핏’ 관계로 시작했다고 밝혔다.

 

3. 같은 인물

<이미지: NEW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잡스 vs 스티브 잡스

2013년 애플 CEO였던 스티브 잡스가 사망한 후 사람들은 다시금 그의 삶에 주목했고, 그 바람을 타고 잡스의 전기영화가 두 편이나 제작됐다. <잡스>는 스티브 잡스가 1974년 대학을 다닐 때부터 2001년 아이팟(iPod)을 공개할 때까지의 삶을 그렸으며, 실제 잡스와 너무나 많이 닮은 애쉬튼 커쳐가 주연을 맡았다. <스티브 잡스>는 월터 아이작슨이 집필한 전기를 원작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아론 소킨과 대니 보일이 참여했다. <잡스>는 ‘주인공의 삶을 표피로만 훑었을 뿐’이라는 혹평을 받은 반면, <스티브 잡스>는 인물의 삶과 정신을 잘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잡스와 그의 동료 조안나 호프만을 연기한 마이클 패스벤더와 케이트 윈슬렛이 아카데미 연기상 후보에 올랐다.

 

<이미지: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링컨 vs 링컨: 뱀파이어 헌터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링컨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도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는데, 같은 인물이 주인공이지만 그 접근방식이 완전히 다른 점이 눈길을 끈다. <링컨>은 명장 스티븐 스필버그와 명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참여한 작품으로 남북 전쟁 기간의 일을 그리지만 전쟁보다는 정치에 더 초점을 두고 있다. 그 시대에 대한 고증도 잘 반영한 웰메이드 역사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링컨: 뱀파이어 헌터>는 대통령 링컨이 뱀파이어를 잡고 다니다가 대통령이 되는 과정을 그린 판타지 액션 영화다. 특히 노예제가 흑인을 먹잇감으로 삼은 뱀파이어와 남부 지주들이 결탁한 음모라거나,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으로 뱀파이어의 세력이 약화돼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한다는 다소 골 때리는(?) 설정을 담고 있다. 18세기 미국을 배경으로 한 뱀파이어 전쟁 영화에 링컨과 미국 역사가 이용된 듯한 느낌이 더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