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이 등장하기까지,
할리우드 속 한국인의 모습
by. 빈상자

할리우드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한국인들은 먼 길을 걸어왔다. 듣도 보도 못했던 나라인 한국을 미국의 대중이 처음으로 접한 기회는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 참전을 계기로 1950~6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수많은 영화가 제작됐는데 그 정점은 1970년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인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야전병원 매쉬>다.
영화의 성공으로 태어나 10년간 이어진 드라마 ‘매쉬’는 한국인이 일본의 기모노를 입고 베트남의 전통모자 논을 쓰는 등 한국에 대한 오해와 무지를 드러냈다. 표면상으로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사실상 베트남 전쟁에 관한 블랙코미디인 것도 한국에 대한 무지를 방치하게 두었다. 작품의 성공에도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퍼뜨리는 역할을 한 것이다.
1960년대 이후 한인 이민자들이 대거 미국으로 몰리면서, 80~90년대는 한국전쟁 대신 미국의 일상에서 부딪히는 한국인들로 대체되기 시작한다. 사실 이 시절 미국인들이 느끼는 한국인의 이미지는 옷과 모자를 잘못 그리는 정도를 넘어서 더 큰 문제가 있다. <똑바로 살아라>, <폴링다운>, <아메리칸 히스토리 X>에서 묘사되듯이 한국인들은 작은 상점을 운영하면서 돈만 알고 불친절한 ‘일벌레, 돈벌레’로 여겨졌다. 실제로 1992년 LA폭동 때 같이 폭발한 사회갈등의 원인이기도 했다.

그나마 2000년대 들어서는 한국인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조금씩 늘어갔다. <로스트>에서는 여전히 영어에 서툴고 집단과 잘 어울리지 못하며 <시리어스 맨>에서는 성적만 최고로 여기며 뇌물까지 서슴지 않지만, 동시에 <길모어 걸스>에서처럼 쿨한 동양인 절친이 되기도 한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의사, <21>의 MIT 학생, 그리고 최근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박사처럼 똑똑하거나 전문직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점차 늘고 있다. 최근에는 캐나다 드라마 <컨비니언스 스토어>에서처럼 엄하고 무뚝뚝하지만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헌신하는 캐릭터로, <아메리칸스>에서는 긍정적이고 밝으며 친구를 위해서는 음식과 애정을 아낌없이 퍼주는 정이 많은 인물로 나오는 등 한국인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고 있다.
할리우드에 나오는 한국인들의 모습에 우리가 매번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 대한 오해를 보면 속상하기도 하지만, 때론 남들에게 비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반성하게 되는 기회가 된다. 또한 한편으로는 우리가 비슷한 방식으로 다른 인종에 대해 오해나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할리우드에서 그려진 한국인에 대한 몇 개의 주요작들을 통해 그 기회를 찾아보기로 한다.
1. 폴링다운 (1993)
할리우드의 한국인 ‘비하’에 관해서 빠질 수 없는 사례를 남긴 영화다. 미국에서는 1993년 2월에 개봉된 영화지만 한국인 비하 장면이 논란이 되면서 시민단체들과 여론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4년 후인 1997년에 어렵게 개봉할 수 있었다. 문제가 된 장면은 전화를 걸기 위해 동전을 바꿔달라는 주인공 디펜스의 요구를 작은 상점의 한국인 주인이 거절하면서 시작한다. 화가 난 디펜스는 ‘한국전쟁 때 미국이 너희들을 얼마나 도와줬는지 아냐’고 일장 연설을 벌이다가 결국 상점을 다 때려 부순다.

사실 방위산업체에서 근무하다 실직한 디펜스의 분노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향해 있다. 일면 이민자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분노한 백인 남성’을 닮은 디펜스의 과격한 행동은 1990년대보다 지금 더 섬뜩하게 느껴지지만, 기관총을 들고 다니면서도 디펜스가 유일하게 직접 살해하는 사람이 나치주의자일 만큼 백인우월주의와는 선을 그으려는 제스처를 보인다.
<폴링다운>은 단순히 1차원적인 인종차별 영화로만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영화가 유난히 한국인들의 큰 저항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 시기가 좋지 않았다. 1992년 4월 LA폭동을 겪고 목격한 미국 내 한인들과 한국인들에게 동전을 바꿔주지 않았다고 상점을 파괴하는 장면은 LA폭동의 악몽을 되살려 놓았을 테니까.
2. 로스트 (2004-2010)
시드니에서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던 중 추락한 비행기의 생존자들은 다양했다. 그중 유일한 동양인 생존자가 한국인 부부 진(대니얼 대 킴)과 선(김윤진)이다. 6년 간 이어진 인기 드라마에서 한국인 캐릭터들이 주요 인물로 살아남는 것은 일단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로스트>의 진과 선은 한국인들이 이 드라마에 끌리게 하는 이유이자 견딜 수 없는 원인이기도 했다.

우선 한국계 배우들의 연기나 한국어 수준에 문제가 많았다. 한국인들이 사는 집이나 배경은 죄다 중국풍이었고, 한국을 막장 한국 드라마로 배운 듯한 인물 설정과 배경은 전형적이었다. 무엇보다 진과 선, 두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기존 한국인과 동양인 전체에 대한 편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시즌 초반 진은 아내인 선에 집착하는 의처증을 갖고 있으며, 아내를 거칠고 강압적으로 대하는 가부장적인 남편으로 그려진다. 아내를 제외한 타인들과는 항상 거리를 두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며, 사교성이 제로인 데다 영어마저 못한다. 반면 선은 순종적이고 착하며 수영복 패션으로 전 세계 남성 시청자들로부터 일치감치 호감을 사며 ‘차이나 돌(China Doll)’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덕분에 한국인 남성비하와 동양인 여성에 대한 옐로 피버의 논란이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 시간이 지나면서 선이 점차 수동적인 여성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적극적인 여성으로 변화하고, 진도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가며 차츰 호감도를 높여가며 나아졌다. 섬에서 원어민들과 몇 년 동안 같이 지내는 집중코스 덕분에 진의 영어도 점차 좋아진다. 물론 진이 누렸던 기회에 비해서 그렇게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3. 스트리트 킹 (2008)
영화 속에서 톰(키아누 리브스)이 한국인들에게 쏟아부은 말들은 잔혹하지만, 솔직히 우리가 담아둘 이유는 없다. 영화 속에서 갱단이라면 한국계 뿐만 아니라 모든 인종의 갱들은 그 정도의 욕설은 각오해야 한다. 또한 키아누 리브스가 내한한 기자회견에서 직접 설명했듯이 캐릭터를 설명하고 플롯의 흐름상 갱들을 자극하려는 나름의 타당한 이유도 갖고 있다. 다만 한국인 눈을 작은따옴표에 비유한 것보다 참을 수 없던 것은 할리우드대로에 나가서 흔하디 흔한 한국인 한 사람만 붙잡고 물어봐도 집어냈을 실수인 ‘missing(실종)’을 ‘놓치기’로 표기한 게으름이었다.

하지만 영화 속 ‘작은따옴표’ 발언이나 ‘놓치기’보다 더 논란이 된 건 당시 <스트리트 킹>의 홍보를 위해 키아누 리브스가 방한을 했을 때 수입배급사인 이십세기폭스코리아의 대처였다. 언론시사회에서 영화 속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에 대해 ‘일체 기사화를 말아달라’고 요구를 하는가 하면, 키아누 리브스 기자회견의 사전 질문지에서 이에 관한 질문은 아예 제외하기도 했다. 이렇게 키아누 리브스의 사상 첫 방한은 수입배급사의 지나친 대응으로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4. 메이즈러너 (2014, 2015)

<메이즈러너>의 민호는 상당히 강한 캐릭터다. 민호는 매일 미로를 탐험하고 문이 닫히기 전에 돌아와야만 하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담당하고 있는 ‘러너’의 리더 격이다. 주인공 토마스를 부각하려다 보니 한 번 토마스를 버리고 도망가기도 하지만, 알비를 살리려다 미로 안에 갇히기도 하는 등 기본적으로 의리 있고 적극적이며 용감한 캐릭터로 묘사된다. ‘러너들은 우리들 중에 가장 강하고 빠른 얘들이고, 그중에 제일은 민호이라’라는 척의 설명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다만 이름이 민호인 것은 제외하면 그가 한국인인 사실은 전혀 부각되지 않는다. 우리는 ‘민호’라는 이름을 보고 단번에 한국인임을 알 수 있지만, 발음상 ‘미노’라고 들을 미국인들에게 그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혹은 중국인인지 알 게 뭔가. 영화나 원작 자체가 인종을 부각하는 것보다 다양한 배경의 아이들이 함께 으샤으샤 하면서 어른들이 파놓은 시험에서 벗어나는데 집중하는 것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원작 소설에도 보면 민호에 대해서 ‘강한 팔과 짧고 검은 머리를 가진 동양 아이’라고만 묘사하고 있다.
5. 센스8 (2016-2017)

워쇼스키 자매의 드라마 <센스8>는 전 세계 7개국 8개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데 동북아 대표로 한국이 선정되었다. 제작비 상승의 부담을 안고도 할리우드에 세트를 짓고 촬영하는 대신, 7개국 현지 촬영을 감행했으며 현지 배우들을 적극 활용했다. 덕분에 서울 분량에서는 주인공 배두나뿐만 아니라 윤여정, 차인표, 마동석, 명계남, 이기찬 등 우리에게 익숙한 얼굴들이 대거 출연한다. 그리고 물론 미드라고 빠질 이경영이 아니다.
<센스8>에서 배두나의 선 캐릭터가 ‘무술을 잘 하는 동양인’의 전형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좀 아쉽다. 하지만 덩치 큰 외국인들도 몇 번의 주먹과 발길질 만으로 넘어뜨리는 모습은 그나마 우리가 즐기는 전형인 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또한 선이 나서는 격투기의 현장도 우리 문화와 그리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는데 신기한 건, 어디서 자문을 받았는지 재벌과 그들의 제멋대로 자녀, 공금횡령과 룸살롱 문화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는 반박 불가다. 다만 재벌의 자녀가 횡령으로 감옥에 가는 일은 상당히 드물다는 것은 몰랐나 보다.
6. 워킹데드 (2010-)
그리고, 마침내 <워킹데드>의 글렌이 도착했다. 글렌은 할리우드 영화와 미드 역사상 가장 많이 알려지고 또 가장 인기 있는 한국인 캐릭터다. 시즌 6 도중 한 달 동안 글렌이 잠시 사라졌을 때, 혹시 글렌이 죽은 것은 아닌지 걱정된 워킹데드 팬들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졌다.

시즌 1에서 글렌은 기존의 동양인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도 다수 섞여있었다. 야구 모자를 쓴 샌님의 모습을 한 글렌의 가장 큰 장점은 작은 체구로 재빠르게 움직이는 민첩함이었다. 하지만 <워킹데드>는 오히려 그 전형성 안에서 전혀 새로운 한국인 캐릭터를 조금씩 보여주기 시작했다. 릭에게 ‘멍청아, 탱크 안에 있으니까 편하냐?’라는 도발적인 대사로 등장하는 글렌은 릭과 대릴에게도 계획을 설명하며 주도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그때 글렌의 멋진 폭발에 감동한 듯 대릴이 (아마 분명 명문대 학생이었을 거라 예상하며) ‘넌 전에는 뭐했냐?’라고 물어보자 글렌이 ‘피자 배달했는데? 왜?’라고 말한 대사는 유명하다. 동양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유머로 만든 것이다. 이후 글렌은 드라마가 계속될수록 고등학생 같던 앳된 모습을 점차 잃고 조금씩 근육이 붙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웬만큼 강한 캐릭터 앞에서도 쉽게 위축되지 않고 맞서는 강한 상남자로 거듭난다.

또한 <워킹데드>는 한국계인 글렌의 정체성을 여러 차례 확인해주었다. 글렌과 대릴이 아직 서먹서먹했던 시즌 1에서 글렌을 보고 대릴이 ‘중국인치곤 깡 좀 있는데’라고 말하자 글렌이 ‘난 한국인이라고’라며 정정해준다. 나중에는 대릴의 형 멀이 글렌을 ‘중국 얘’라고 호명하자 ‘한국인이야’라며 이번에는 대릴이 정정해주기도 한다. 한국인이기 이전에 늘 중국인으로 먼저 오해를 받는 미국에서 한국인의 입지를 반영한 샘이다. 정말 ‘늘 글렌만 같아라’라고 기도하고 싶은 최고의 한국인 캐릭터였다. 하지만…이제는 없는 그를 기리며. We’ll find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