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성장통을 앓는 청춘을 그린 영화

 

by. Jacinta

 

인생의 가장 순수하고 찬란한 시절,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그때, 이런저런 성장통에 쉽게 상처받고 아프긴 해도 막상 어른이 된 후 돌아보면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물론 누구에게나 그리운 시절로 남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섣부른 호기심과 반항아적인 경계심, 잔뜩 예민한 감수성에 에워 쌓여 남들은 모르는 고통의 시간을 보냈을지 모른다. 또래보다 유독 더 아프고 잔인한 통증을 수반한 10대 시절을 그린 영화를 소개한다. (기준, 2000년 이후 개봉작)

 

 

1. 팻 걸, 2001

 

<이미지: 백두대간>

 

예쁘고 사랑스러운 외모의 엘레나와 뚱뚱하고 고집 센 아나이스는 극과 극의 자매다. 인형 미모 뽐내는 엘레나는 사랑과 섹스에 대한 환상에 빠져있고, 가족들마저 거들떠보지 않는 아나이스는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자매는 각자의 방식으로 청 경험을 꿈꾼다.

사춘기 소녀의 성적 환상을 극단적인 두 시선으로 그려낸 <팻 걸>은 매번 도발적인 소재와 과감한 묘사로 신선한 충격을 주는 카트린느 브레야 감독의 작품이다. 외모지상주의와 남성 중심적인 사랑과 성의 판타지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특히 영화의 충격적인 결말은 이 영화의 메시지를 가장 잘 드러낸다.

 

 

2. 도니 다코, 2001

 

<이미지: 미디어필림인터내셔날>

 

고등학생 도니 다코는 정신분열증으로 몽유병과 우울증을 앓고 있다. 집과 학교,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도니는 어느 날 세상이 멸망할 거라고 말하는 토끼 인간 프랭크를 만난다. 이후부터 그의 일상은 점차 혼돈에 빠지기 시작하며 유일하게 마음을 연 여자친구와 가족을 잃는 비극이 연이어 벌어진다.

모호한 스토리와 몽환적이며 음울한 분위기의 <도니 다코>는 한 번에 이해하기 쉬운 영화는 아니다. 꽤나 불친절한 내러티브는 영화에 쉽게 몰입하는 것을 주저하게 하지만, 그래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건 주인공 도니의 불안정한 심리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저항하는 도니의 모습을 통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된 1980년대 후반의 혼돈을 드러내며 날카롭게 풍자한다.

 

 

3. 엘리펀트, 2003

 

<이미지: 동승아트센터>

 

화창한 가을 날씨, 학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소란과 분주함이 오간다. 자신만의 취미 활동으로 바쁘거나, 특정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펼치거나, 점심을 먹으며 그들만의 화제를 공유한다. 아직 학교에 가지 않은 누군가는 집에서 총 쏘기 게임을 하기도 한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는 1999년 컬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에 영향을 받은 영화다. 영화는 어떤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총성이 울리기 전까지 10대들의 평범한 교내 일상을 담담하게 보여주는데 치중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긴 여운을 남긴다. 조용한 관찰자가 되어 재현한 그날은 아프고 서늘하며 고통스럽다.

 

 

4. 브릭, 2005

 

<이미지: Focus Features>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남기고 사라진 여자친구를 찾으려는 브렌든. 어렵게 여자친구가 남긴 암호의 의미를 알아챘을 땐 이미 늦었지만, 학교에서 왕따나 마찬가지인 브렌든은 계속해서 사건을 뒤쫓기로 한다.

조셉 고든 레빗의 풋풋한 신인 시절을 볼 수 있는 영화 <브릭>은 고등학교로 무대를 옮긴 범죄 누아르 영화다. 어른들 못지않게 영악하고 냉정한 10대들의 범죄와 이를 뒤쫓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연령대만 확 낮아졌을 뿐 익숙하게 보아온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10대를 주인공으로 옮겨온 범죄 세계는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5. 언 애듀케이션, 2009

 

<이미지: Sony Pictures>

 

평범한 여고생 제니의 일상은 지루하다. 옥스퍼드 입학을 목표로 하지만 자신이 원해서라기보다 부모의 바람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매력적인 연상남 데이빗을 만나면서 제니는 변한다. 옥스퍼드가 아닌 데이빗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1960년대가 배경인데도 제니의 상황은 2017년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입시와 취업 준비로 청춘을 소비하는 현재, 제니처럼 과감한 선택은 어떤 영향을 미칠까.

영화 속 제니의 일탈은 통속적이긴 해도 한 번쯤 꿈꾸고 싶은 일탈이다. 캐리 멀리건의 사랑스러운 매력이 시선을 끌기도 하지만, 질풍노도의 성장통을 제대로 경험한 제니를 통해 인생에 뻔한 길은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6. 크로니클, 2012

 

<이미지: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초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누구나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10대 세 친구 앤드류, 맷, 스티브는 우연히 초능력을 갖게 된다. 이들은 섣불리 영웅 놀이에 나서지 않는다. 대신 소소한 장난을 벌이며 자신들의 능력에 심취하는데 뜻밖의 사고는 앤드류를 서서히 공격적으로 변화시킨다.

피터 파커는 마블 히어로 중에서도 유독 불행한 과거를 갖고 있음에도 자신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안 뒤 선한 의도로 쓰려고 노력한다. 이처럼 보통의 히어로들은 그들의 배경에는 상관없이 이타적인 행동을 하지만 <크로니클>의 주인공은 다르다. 아픈 어머니와 알코올 중독 아버지, 넉넉하지 못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해온 앤드류는 결국 자신의 분노를 초능력으로 터뜨리고 만다. 서툴고 상처받은 주인공에게 초능력은 오히려 화가 된다.

 

 

7. 영 앤 뷰티풀, 2013

 

<이미지: 찬란>

 

‘왜’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17세 생일을 앞두고 첫 경험을 치른 이사벨은 일상으로 돌아온 뒤 평범한 10대 생활을 끝낸다. 용돈이 궁한 것도 아니면서 성인 남성들을 대상으로 매춘에 나선 것이다. 이름과 나이를 속이고 남자들을 만나 매우 기계적인 관계를 갖는다. 이사벨의 비밀스러운 이중생활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들키고 만다.

<영 앤 뷰티풀>은 10대의 성 문제를 매우 대담하게 드러낸 영화임에도 자극적이다는 느낌이 강하지 않다.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섬세한 연출과 온기와 무심함을 오가는 마린 백트의 연기는 이 영화를 단순히 눈요기에 치중하는 영화로 그치지 않게 한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자벨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모호한 욕망과 결핍의 공허한 여운이 길게 간다.

 

 

8. 한공주, 2013

 

<이미지: 무비꼴라쥬>

 

크게 말은 없지만 평범한 여고생 공주. 새로 전학 온 학교에서 새 친구를 사귀며 적응 중인 공주의 일상에 다시 짙은 어둠이 드리운다. 이전 학교의 학부형들이 찾아온 것이다. 애써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 평범한 삶을 되찾으려고 애쓰던 공주의 일상을 위태롭게 한다.

<한공주>는 2004년 밀양에서 발생한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담담한 시선으로 그린 영화다. 처음부터 가해자를 향한 분노를 드러내지도 않으며 그날 이후의 공주의 삶에 포커스를 맞춘다. 끔찍한 사건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더라도 공주가 느꼈을 분노와 고통이 그대로 전해진다. 잘못한 게 없다고 말하는 공주의 외로운 항변은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할 뿐이다.

 

 

9. 문라이트, 2016

 

<이미지: 오드>

 

리틀로 불리던 꼬마는 어느새 10대 소년 샤이론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고단하다. 샤이론의 엄마는 종일 집에 머무르며 마약을 살 돈이 필요할 때만 아들을 찾는다. 또래의 따돌림도 계속된다. 마음 편히 머무를 공간이 없는 샤이론에게 유일하게 안식처가 되어준 사람은 항상 먼저 말을 건네주는 케빈뿐이다.

외롭고 고단한 흑인 청년의 성장 과정을 통해 사랑과 정체성을 그린 영화 <문라이트>. 결코 평범하지 않은 퍽퍽한 삶을 절제된 시선의 시적인 영상과 섬세한 음악으로 담아냈다. 그동안 흑인이 주인공인 영화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매우 감성적인 시선으로 접근해 더 큰 공감과 아픔을 이끌어낸다.

 

 

10. 로우, 2017

 

<이미지: Focus World>

 

수의학과에 입학한 대학 신입생 저스틴은 채식주의자다. 그동안 통제된 새장 같은 환경에서 자라온 저스틴에게 대학 생활은 일종의 정글 같다. 무분별한 일탈을 마음껏 즐길 수 있으면서도 폭력적인 억압과 권력이 지배한다. 신고식부터 가혹하다. 채식주의자라고 봐주는 것 없이 동물 내장을 먹으라고 강요한다. 한술 더 떠 먼저 입학한 언니마저 저스틴의 식습관을 이해해주지 않는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날 것을 먹은 저스틴은 그날 이후 육식 본능을 강하게 느끼기 시작하며 변화한다.

식인을 소재로 한 영화 <로우>는 자극적인 소재에도 참담한 슬픔과 고통이 느껴지는 영화다. 카니발리즘은 지금까지의 영화와 다르게 폭력과 억압의 방어기제로 쓰인다. 저스틴이 육식으로 변화하는 이유는 태어나면서부터 지나치게 강요된 것들에 대한 자기 보호의 결과다. 줄리아 듀콜뉴 감독은 데뷔작이라는 게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고 끈질기게 저스틴의 핏빛 성장을 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