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 회복, 감독 도전, 현실 반영 등 선댄스영화제는 올해도 눈부시다
by. 빈상자
2천 미터도 넘는 고산지대에 있는 인구 8천 여명의 작은 도시 유타의 ‘파크 시티’는 1년에 단 한 번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바로 선댄스영화제 때문이다. 한때 컬트영화와 영화광들로만 가득하던 선댄스영화제는 기존의 대형 배급사들은 물론 넷플릭스, 아마존과 같은 할리우드의 새로운 강자들이 돈다발을 싸들고 찾아오는 영화제가 되었다. 아마존은 2016년 선댄스영화제에서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사들여 오스카에 올리고 상업적 성공도 거뒀으며, [겟 아웃]은 2017년 선댄스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이후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사들여 대박을 터뜨렸다. 올해는 어떤 영화들이 관객들을, 비평가들을, 혹은 배급사들을 기쁘게 할까? 1월 18일에 개막한 2018 선댄스영화제 화제작 7편을 소개한다.
1. 미스에듀케이션 오브 카메론 포스트(The Miseducation of Cameron Post, 2018)

몬타나 시골에 살던 10대 소녀 카메론 포스트는 부모를 교통사고로 한꺼번에 잃고, 보수적인 이모와 권위적인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다. 카메론은 곧 자신이 동성연애자라는 것을 깨닫고 커밍아웃을 하지만, 보수적인 가족에 의해 이성애자로의 전환과 고정적인 성역할의 가르침을 목표로 하는 ‘전환 캠프(conversion camp)’에 보내진다. 2012년 출간된 에밀리 댄포스의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우리 맘대로 정한) 미국의 ‘국민 여동생’ 클로이 모레츠가 카메론 포스트를 맡아 보수적인 환경에서 반항과 고민 끝에 자아와 성 정체성을 찾아가는 세심한 연기를 보여준다. 여성임과 동시에 성소수자인 카메론이 정신병동과 같은 강압적인 환경을 극복해야만 하는 이야기는 트럼프 취임 1주년과 거센 미투 운동 속에서 치러지고 있는 선댄스 영화제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화가 지게 된 짐은 어느덧 커져버렸지만, 영화 자체는 무겁기보다 가벼운 유머 속에 성찰을 놓치지 않는 잔잔하면서도 귀여운 성장영화에 가깝다.
2. 아이 씽크 위아 얼론 나우(I Think We’re Alone Now, 2018)

세상에 종말이 오고 델은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델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찾고 시체를 묻으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또 다른 생존자 그레이스를 만난다. 괴팍한 성격으로 종말 이전에도 주변에 가까운 사람이 없었던 중년 남자 델은 이제 천방지축 10대 소녀 그레이스와 공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감독 리드 모라노는 2017년 훌루의 화제작 [핸드메이드 테일]로 에미상 드라마 부문 감독상을 받은 후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연출보다 촬영감독의 경력이 더 긴 리드 모라노의 작품들은 그에 걸맞은 영상을 갖추고 있다. 종말이 도래하게 된 이유에 관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이 종말 영화는 세기말의 스펙터클이나 공포 따위는 다루지 않는다. 그보다는 제한된 환경에서 두드러지는 인간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관심이 더 많은 영화다. 중년 남자 델은 [왕좌의 게임]의 스타 피터 딩클라지가, 10대 소녀 그레이스는 엘르 패닝이 맡았다.
3. 와일드라이프(Wildlife, 2018)

1960년대 미국의 몬타나, 조는 아버지 제리와 어머니 자넷과 사는 얼핏 평범한 14살 소년이다.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프로골퍼인 아버지 덕분에 친구를 사귀거나 정착할 여유 없이 자주 이사를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곧 그런 불평조차 사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가 직장을 잃고 캐나다 국경으로 불 끄러 간다면서 훌쩍 떠나버리자 자넷과 조 모자는 스스로 생존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혈육과 신뢰로 묶인다던 가족은 일련의 일들을 거치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개인들로 부서지고 어린 조도 곧 이를 깨닫게 된다.
2006년 선댄스영화제 화제작 [미스 리틀 선샤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2016년엔 [스위스 아미 맨]으로 선댄스영화제를 찾았던 폴 다노가 이번에는 영화감독으로 왔다. 영화 연출에 대한 꿈을 항상 갖고 있었다는 그는 특히 가족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고 밝혔다. [와일드라이프]는 1990년에 출간된 리처드 포드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어머니 자넷 역에 캐리 멀리건, 그리고 아버지 제리 역에는 제이크 질렌할이 출연한다.
4. 타이렐(Tyrel, 2018)

트럼프가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금요일 밤, 타일러는 친구 존과 함께 존의 친구 맥스의 생일파티 모임에 가게 된다. 친구의 친구, 친구의 친구의 친구들이 복잡하게 모인 가운데 타일러는 이들 중 자신이 유일한 흑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맥스는 타일러를 존의 다른 흑인 친구와 혼동하고, 또 다른 일행은 타일러를 타이렐로 부르기 시작한다. 술과 약에 쩔은 불금이 깊어가면서 혼란과 광란 속에 타일러를 둘러싼 미묘한 긴장도 함께 높아지기 시작한다.
작년 선댄스영화제에 [겟 아웃]이 있었다면, 올해는 [타이렐]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두 영화는 동일하게 흑인들을 대하는 백인들의 위선과 인종차별적인 시선에서 출발한 미세한 폭력을 다루고 있다. 다만, [타이렐]은 [겟 아웃]처럼 공포 장르로 변하지도 (그리고 뒤틀지도) 않으며, 내러티브도 [겟 아웃]처럼 극단적인 상황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미묘한 불편함과 긴장감 속에서도 끝까지 현실에서 발을 떼지 않는다. 일상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루는 [타이렐]이 [겟 아웃]보다 더 현실적인 공포로 느껴지는 사람이 나올 법도 하다.
5. 낸시(Nancy, 2018)

이제 30대 중반인 낸시는 자신이 어렸을 때 납치됐다고 믿고 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 그러한 생각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마침 30년 전에 딸을 납치당했다는 노부부를 만나면서 더욱더 깊어진다. 결국 딸을 찾으려는 노부부와 사람들을 설득시키려는 낸시의 노력이 접점을 만나게 된다. 관객들은 낸시가 거짓말에 능숙한 모습을 계속해서 목격하며 그녀를 의심하게 되지만, 관객은 그 판단조차 다시 의심하게 되는 순간에 다다르게 된다.
[낸시]는 한국계 미국인 크리스티나 최의 장편 데뷔작이다. 작가를 지망하던 그녀는 북한을 방문했던 경험과 자신이 존경했던 작가이자 교수의 삶이 모두 거짓으로 드러나는 일을 겪으면서 사실과 거짓의 경계를 묻기 시작했다고 한다. 더불어 사실과 거짓의 여부와 상관없이 실존했던 자신의 감정과 변화를 바탕으로 사실과 거짓의 의미를 파고드는 영화 [낸시]를 만들었다. 낸시 역에는 최근 [녹터널 애니멀스]와 넷플릭스 [블랙 미러] 등을 통해 주목받고 있는 영국 배우 안드레아 라이즈보로가 맡았다. 그녀는 이번 선댄스영화제의 또 다른 관심작 [맨디]에서 맨디 역을 맡기도 했다. 참, [낸시]에 스티브 부세미가 출연한다는 사실을 거론 안 한다면 섭섭해할지도.
6. 리지(Lizzie, 2018)

19세기 미국 매사추세츠, 부유한 보든 부부가 자신들의 저택에서 도끼로 잔혹하게 살해된 채 발견된다. 곧 용의자가 잡히고 재판이 시작되는데 용의자는 부부의 딸 리지 보든이다. 재판에 여러 증인들이 불려 오는 가운데 최근 보든 가에 새로 온 하녀인 브리짓 설리반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영화는 1892년 매사추세츠 폴리버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부유한 저택 안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인은 당시 세간의 엄청난 관심을 받았던 것은 물론 지금까지도 수많은 논란과 억측을 낳은 사건으로 남아있다.
크레이그 윌리엄 맥닐이 연출하고, 미드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의 클로에 세비니가 리지를, 그리고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브리짓 역을 맡았다. [트와일라잇]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동시에 발연기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던 크리스틴은 이후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퍼스널 소퍼]와 같은 영화들을 통해 조금씩 명예를 회복하고 있는 듯하다. 2014년 [캠프 엑스레이]와 2016년 [어떤 여자들]에 이어 다시 [리지]로 선댄스영화제를 찾은 그녀는 2017년에는 자신의 단편영화 [컴 스윔]을 선댄스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7. 맨디(Mandy, 2018)

1983년, 깊은 산속에서 아내 맨디와 평화롭고 소박한 삶을 살던 레드의 집에 맨슨 추종자와 같은 광신도 무리들이 찾아오면서 일순간에 천국은 지옥으로 바뀌어버린다. 레드는 극악한 무리에 대적하기 위해 극악한 대처법을 택하고, 결국 잔혹한 대결이 벌어진다. [매드 맥스]와 같은 무법천지에 [텍사스 전기톱 학살]의 더해진 듯한 [맨디]는 80년대 헤비메탈과 B급 영화의 감수성으로 충만한 영화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평범했던 사람이 광기로 충만해져 가는 레드 역을 맡았다. [아리조나 유괴사건(1987)], [광란의 사랑(1990)]과 같은 독립예술영화의 연기파로 성장해서 [더 록(1996)], [콘 에어(1997)]의 할리우드 액션스타를 거치더니, 그 이후로 최근까지 [방콕 데인저러스(2008)]와 [레프트 비하인드 (2014)]와 같은 영화로 연기 경력이 끝났다는 말까지 들은 그였다. 그런 니콜라스 케이지가 드디어 십 수년만에 죽어가던 연기 재능을 [맨디]에서 되살렸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다. 색깔 있는 독립영화에서 종횡무진 활약했던 예전의 니콜라스 케이지를 되찾아오고 싶은 팬들의 바람은 이 영화에 대한 기대를 높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