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힙킴
*이 글은 [스파이더맨 : 홈 커밍], [블랙 팬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이하 MCU)의 2018년도 첫 영화가 개봉했다. 이미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 등장한 전적이 있는 블랙 팬서의 단독 영화 [블랙 팬서]다. 국내 개봉 닷새 만에 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블랙 팬서]를 보며, MCU 영화와 슈퍼히어로들이 가진 ‘힘’에 대해 생각해본다. 분명 슈퍼히어로의 영화임에도 MCU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을 주요 소재로 삼으며, 영화 속 슈퍼히어로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고민 사이에서 갈등에 빠진다.
1.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 (2014)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에서 캡틴 아메리카는 자신이 속한 조직 ‘쉴드’가 예비 범죄자들을 사살하는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 맞서 싸운다. ‘범죄를 예측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미 미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도 제기된 적 있는 철학적 논제다. 이것이 새롭게 환기되는 이유는 MCU 영화가 미래가 아닌 현재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빅데이터가 등장하며 인간의 행동은 정말로 예측 가능한 것이 되어버렸고, 우리의 편의를 위해 사용되는 빅데이터는 역으로 우리를 통제하는 요소로 작용할 소지가 다분해졌다. 영화 속 캡틴 아메리카의 고민은 곧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것이 된다.
2.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 (2015)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고민도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와 궤를 같이 한다.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빌런 울트론은 토니 스타크의 선한 의도(세계 평화)에서 탄생한 로봇이다. 토니 스타크가 입력한 ‘세계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울트론은 ‘인류 절멸, 새로운 인류(로봇)의 등장’이라는 행위 값을 선택한다. ‘나약하고,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한계가 뚜렷한 인간이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로봇에 의해 역습을 당한다’는 설정은 미래 영화의 일부분이었지만, 인간보다 뛰어난 로봇들이 등장하고 있는 현재에는 당면한 논의가 되었다.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 속 토니 스타크의 고민과 이로 인해 촉발되는 슈퍼히어로들 간의 갈등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 다른 종류의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3.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 (2016)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서 어벤져스의 영웅들이 대립하게 되는 계기는 수많은 인명 피해를 양산한 스칼렛 위치의 실수다. 액션 영화의 사건 전개에서 흔히 생략되는 ‘일반 시민의 희생’을 영화의 주요 소재로 끌어 온다.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문제가 되지만, 영화이기 때문에 허용되었던 인명 피해가 영화 내 주요 이슈로 작용하면서 마블의 세계는 영화보단 오히려 현실에 가깝게 느껴지며, 각자가 지닌 과거의 기억들로 고통에 시달리고 갈등하는 마블의 슈퍼히어로들은 보다 인간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4. 스파이더맨 : 홈커밍 (2017)

[스파이더맨 : 홈커밍]은 청소년 슈퍼히어로를 주인공으로 삼아 정체성 문제를 다룬다. 피커 파커는 스파이더맨이라는 또 하나의 정체성을 숨기며 생활하는 동안 청소년기에 피해갈 수 없는 이성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너드 피터 파커와 슈퍼히어로의 스파이더맨의 생활을 동시에 영위하던 피터는 자신이 좋아하는 리즈의 아버지가 실은 자신이 쫓던 빌런 벌처였다는 것을 알게 되며 [스파이더맨 : 홈커밍]에서 정체성의 문제는 더욱 심화된다. 피터 파커로서 벌처를 떨친 채 리즈를 만날 것이냐, 스파이더맨으로서 리즈의 아버지인 벌처를 막을 것이냐? 결국 피터는 리즈에게 피해가 될 수 있음에도 리즈의 아버지인 벌처를 저지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아드리안 툼즈(벌처)의 생계를 빼앗은 (그의 입장에서) 빌런 토니 스타크가 피터에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라는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5. 블랙 팬서 (2018)

MCU 최초의 흑인 슈퍼히어로 [블랙 팬서]는 여전히 잔존하는 인종차별 문제에 2018년 현재 국제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곁들인다.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되는 와칸다는 MCU에서 최빈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가장 강력한 금속 중 하나인 비브라늄의 원산지로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 뛰어난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와칸다는 다른 국가들과 교역하지 않고, 국제사회의 문제를 외면하며 이 비밀을 지켜올 수 있었다.
영화 속 와칸다는 현재 난민 문제에 소극적이며 보호무역을 강조하고 있는 현실 국가들에 대한 반영이다. 와칸다의 왕이 된 티찰라(블랙 팬서)는 수천 년 간 이어온 국가의 전통에 의문을 표하며 ‘더 나은 지도자’가 되는 법에 대해 고민한다. 어떤 고난에서도 와칸다와 세계를 놓지 않고, 더 옳은 길을 가기 위해 분투하는 블랙 팬서를 보면서 우리는 자연히 현실의 지도자들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에게도 티찰라의 고민이 닿고, 와칸다의 아름다운 노을이 내리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