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미국영화과학아카데미

 

드디어 2018년 아카데미 시상식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올해 오스카를 향하는 여정은 험난했고 우여곡절이 많았다. 원래도 조용한 적이 없던 할리우드는 지난해 말부터 성평등, 인종 균등 기회 등 사회 이슈에 목소리를 내면서 전 세계적 개혁을 주도해 갔다. 할리우드 내 여성 종사자들의 연대는 존경과 찬사를 받고 있으며, 이젠 한국에서도 미투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응집한 만큼 주목할 만한 순간도, 곱씹을 만한 말도 많았다. 다만 결과는 예측 가능한 방향을 흘러서 재미가 반감되기는 했다. 올해 아카데미의 이모저모를 짚어본다.

 

 

1. 메시지와 즐거움을 다 잡았나?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무엇보다도 메시지에 주목할 만하다. 작년 10월 하비 와인스틴 스캔들 이후 주목받은 ‘미투 운동’과 ‘타임스 업 운동’은 다양성 문제와 결합해 인상적인 족적을 남겼다. 작년에 이어 진행을 맡은 지미 키멜은 미국 사회 전반에 팽배한 변화의 바람을 언급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하고 참여를 촉구했다. 시상식 중반 아나벨라 시오라, 애슐리 쥬드, 셀마 헤이엑이 등장해 할리우드에 다양성을 강화하자는 메시지에 큰 힘을 실었다. 시오라와 쥬드는 모두 와인스틴의 성폭력 피해자이면서 와인스틴이 그들의 커리어를 방해했던 것이 드러나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시상식의 모든 부분이 메시지를 따라가진 못했는데, 특히 최근 성추행 혐의가 제기된 라이언 시크레스트가 사전 레드카펫 행사를 맡은 것에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올해 아카데미에서 모든 이들의 관심이 쏠린 곳이 한 군데 더 있다. 과연 이번에도 같은 실수가 반복될 것인가! 작년 작품상 수상작 번복 사태로 지미 키멜을 비롯한 제작자와 아카데미 모두가 크게 시달렸기 때문에, 올해 사고 없는 시상식을 만들기 위한 노력들이 화면에서도 잘 드러났다. 물론 작년 사태에 대한 자학 개그 또한 잊지 않았다. 지미 키멜은 “올해는 이름이 불려도 바로 일어나지 마시고 1분 정도 기다려 주세요.”라는 말로 작년 사태를 가볍게 언급했고, 작품상 발표 직전까지 “이제 끝인데 뭐 잘못되겠어요?”라는 멘트를 던지며 웃음을 이끌어냈다. 올해 작품상 또한 작년과 마찬가지로 웨렌 비티와 페이 더너웨이가 시상했고, 이번에는 다행히 틀리지 않았다. (혹시나 싶은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봉투도 확인했으니 안심해도 된다.)

 

올해는 작년보다 정치·사회 이슈가 많았지만, 시상식 전반적으로는 작년보다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일부 시청자들은 시상식 중간중간 영상이 너무 많이 쓰였다고 지적했다. 남녀 연기상 4개 부문 시상 전에 소개된 영상이 상당 부분을 차지했고, 작품상 후보 소개 영상도 꽤 긴 편이었다. 인터넷에서도 추모 영상에 올해 소천한 인물 중 몇몇이 빠진 것을 지적했는데, 특히 오리지널 배트맨 ‘아담 웨스트’가 빠진 것에 불만의 목소리가 많은 편이었다. 또한 이번에도 지미 키멜과 배우들이 이벤트성으로 길 건너 극장에서 영화 [시간의 주름] 시사를 하던 영화팬들을 직접 찾아갔는데, 발상은 참신했으나 기대한 것만큼 재미있진 않았다.

 

 

2. 시상식을 수놓은 말들

 

“작년까지 스튜디오 임원들은 여성 또는 유색인종이 슈퍼히어로 영화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정말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게 작년 3월이었거든요.”
– 지미 키멜

 

시상식 분위기를 정하는 사회자의 모놀로그는 장난스러우면서도 날카로웠고, 농담과 진지함을 부드럽게 오갔다. 지미 키멜은 작품상 후보에 오른 영화들은 돈을 벌려고 만든 게 아니라고 말했고, 어차피 시상식 이후 재개봉해도 [블랙팬서]를 넘진 못할 것이라 말해 관객들을 웃게 했다. 키멜의 지적대로 올해 작품상 후보에 오른 작품 9개 중 전 세계 1억 달러 이상 수익을 올린 영화는 [덩케르크]와 [겟 아웃] 단 2개뿐인데, 블록버스터 영화의 수익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하지만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블록버스터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2017년에는 여성 감독 영화로 흥행 대기록을 수립한 [원더 우먼]이 있고, 2018년 초는 [블랙 팬서]가 마블 영화 흥행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여성과 유색 인종이 주연을 맡은 영화의 초대박 흥행은 앞으로의 블록버스터 제작 관행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https://youtu.be/-86vgvZGMs4

 

“딱 두 마디만 남길게요. 평등 보장 추가 조항(Inclusion Rider)!”
– 프란시스 맥도먼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일 것이다. 맥도먼드는 이제는 그녀의 유행어가 되어버린 “내가 할 말이 있으니까.(I have some things to say.)”라는 말로 소감을 시작해 영화를 함께 한 가족과 제작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 후, 올해 후보 지명을 받은 여성 후보들을 모두 관객석에서 일어나게 해 뜨거운 찬사를 보냈다. 수상 소감 마지막에 언급한 평등 보장 추가 조항은 순간 관심을 많이 받았다. 추가 조항은 계약서 본연의 내용에 덧붙이는 것으로, 출연 계약 협상이 끝났어도 배우뿐 아니라 제작진 전체의 성별 및 인종의 균등 고용을 보장하는 추가 조항을 계약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맥도먼드는 백스테이지 인터뷰에서 자신도 일주일 전에 알게 됐으며, A급 스타들의 파워로 균등 기회를 보장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3. 뻔해서 재미없는 시상식?

https://youtu.be/2hnYE_URTpc

 

90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인공은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다. 전체 24개 부문 중 13개 부문 후보 지명을 받았고, 그중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4개 부문에서 영광을 안았다. 특히 작품상을 받았으면 하는 기대는 많았으나 받을 것이라는 예상은 쉽게 할 수 없었다. 다양성 화두의 중심에 섰던 [겟 아웃], [레이디 버드]뿐 아니라 각종 시상식을 휩쓸고 다녔던 [쓰리 빌보드]와 경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큰 경쟁작으로 보였던 [쓰리 빌보드]가 호응받은 만큼 안티 여론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일종의 반작용도 더해졌을 것이라는 분석도 가능하다. [덩케르크]는 음향, 음향편집, 편집상을 수상하며 [셰이프 오브 워터]의 뒤를 이었고, 제작 부문에서 다수의 후보를 배출한 [블레이드 러너 2049]가 촬영상과 시각효과상 2개 부문을 차지했다. 시상식의 다크호스로 여겨졌던 [쓰리 빌보드]는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2개 부문을 수상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시상식 결과는 예측이 거의 빗나가지 않았다. 후보 선정에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은 듯, 결과는 오히려 재미가 없었다. 골든 글로브 시상식부터 크고 작은 시상식에서 상을 받았던 배우들과 제작진 다수가 이번에도 상을 수상했기 때문에, 그나마 가장 예상 못 했던 결과는 [겟 아웃]의 각본상 수상이겠다. [레이디 버드], [쓰리 빌보드] 등 시상식에서 이미 인정받은 프론트 러너 사이에서 [겟 아웃]의 수상을 점치기 어려웠다. 수상자 본인도 믿기 어려운 듯, 조던 필 또한 본인의 트위터에 “나 방금 오스카 탔다. XX!”라고 적기도 했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작품상 및 감독상 수상, [겟 아웃]의 각본상 수상 결과에 대해 일부 외신에서는 장르 영화, 특히 판타지와 호러가 드디어 보수적인 아카데미에서 인정받은 것이라 분석하기도 한다. 특히 [셰이프 오브 워터]의 성과는 한 해 아카데미를 휩쓸다시피 한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도 해내지 못한 것이라 이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하지만 2017년 한 해만 인정받는다고 해서 아카데미의 혁신을 쉽사리 점칠 수는 없고, 순수예술에 가까운 영화가 인정받는 분위기는 이전과 다르지 않다. 앞으로 주요 부문에 더 많은 장르 영화가 이름을 올리는 그날이 와야 변화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