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Jacinta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미지: CGV아트하우스

 

이창동 감독의 8년 만의 신작,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원작, 칸 영화제 초청, 논란을 몰고 다니는 배우 유아인, ‘워킹 데드’ 스타 스티븐 연, 오디션을 통해 낙점된 신예 전종서 등 [버닝]은 일찌감치 화제를 모은 기대작이다. 그중 내놓는 영화마다 호평을 받은 거장 감독이 청춘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라는 점에서 영화가 담을 이야기에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기대감은 절반에 그쳤다. 영화가 추구하는 형식미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나, 영화가 품고 있는 내용과 설정은 8년이라는 공백을 채우기에는 부족했다.

 

[버닝]은 하루키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에서 모티브를 얻어(아직 소설은 읽지 못했다) 저마다 다른 위치에 있는 세 청춘을 이야기한다. 영화의 주인공 종수를 중심으로 그의 굴곡진 가족사를 은연중에 내비치며 우연히 만난 어린 시절 친구 해미와 그가 여행 중에 만난 벤이라는 인물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쌓아간다. 영화는 불행한 가족사를 뒤로 현재를 무력하게 전전하는 종수에 주목한다. 그는 결혼, 취업, 인간관계 등 인생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삶의 뚜렷한 목적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가는 N포세대에 속하는 인물이다. 소설가를 꿈꾸지만 막상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현실에 짓눌려 하루하루를 버틸 뿐이다. [버닝]은 제목 그대로 이 무력한 청춘이 내재된 분노를 폭발하기까지, 느리지만 밀도 있는 호흡으로 차분하게 직조한다.

 

 

이미지: CGV아트하우스

 

초반 30여 분 종수의 무기력한 일상에 집중하는 서사는 다소 지루한 면도 있지만, 해미와 벤이 함께 나타나는 순간부터 불안과 집착이 만들어낸 분노를 향해 내달리는 몰입력은 상당하다. 인물의 흔들리는 감정을 적재적소에서 받쳐주는 모그의 음악, 집요함이 만들어낸 정교한 영상과 공간감은 모호한 분노의 실체를 서서히 끄집어내는데 일조한다. 또한 기대 이상의 안정된 연기력을 보여준 전종서와 벤이라는 인물이 가진 모호함을 일관되게 보여주는 스티븐 연의 연기는 극단으로 향하는 영화의 톤을 미묘하게 중화시킨다.

 

그러나 [버닝]은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자 결정적인 부분에서 아쉬움 섞인 실망을 안긴다. 직선적으로 표출되는 불안한 청춘 종수는 보는 내내 의문과 거부감을 자아낸다. 지나치게 도식적인 캐릭터 해석은 모호한 분위기로 흐르는 영화의 균형을 깨뜨리며, 영화가 향할 지점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오히려 종수라는 인물도 해미와 벤이 갖는 미스터리한 면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도 든다. 종수와 벤의 관계가 어디로 향할지 뻔히 예상되더라도 세 인물의 모호한 면에 균형을 맞췄다면 결말이 주는 감정의 진폭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한 마디로 의식의 힘이 과하게 들어간 유아인의 연기는 영화를 거슬리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전종서의 연기는 좋았지만,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욕망을 점화하는 역할로 소비된 해미는 아쉽기만 하다. 가장 큰 의문은 해미의 순수한 면을 부각하고자 왜 그를 무지한 인물로 설정했느냐다. 왜 해미는 메타포와 위대한 개츠비를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걸까. 문학사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젊은 여성을 무지한 인물로 설정해 순수함을 끌어내곤 했지만, 이제 시대가 변했다. 요즘의 청춘들은 그들이 놓인 여건과 상관없이 자의식이 강하며, 디지털 세상은 지적 수준도 향상시켰다. 만약 메타포와 위대한 개츠비를 잘 아는 해미가 노을이 지는 저녁 상의를 벗고 춤을 췄다면, 난 그 장면을 100% 순수하게 아름다운 장면으로 받아들였을 테다. 아름다운 들녘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남성을 뒤로 여성이 상의를 벗는다는 것은 일종의 해방감이자 순수한 인간성에 근접한 모습이 될 수도 있다.

 

 

이미지: CGV아트하우스

 

하지만 무엇보다 실망스러운 것은 바로 결말이다. 무력하고 혼란스러운 분노를 꼭 그런 식으로 표출하는 게 합당했을까. 영화를 두 번이나 관람했지만 영화의 결말은 허탈함과 씁쓸함을 넘어 불편한 감정을 남긴다. 마치 종수가 가진 열등감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종수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절망스러운 현실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연 해미를 사로잡은 벤을 시기한다. 벤은 해미뿐 아니라 모든 것을 다 가진 인물이다. 종수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안락한 고급 빌라에서 자신만의 유희를 즐기며 살아간다. 종수는 다 가진 자의 유희가 불쾌하다. 벤은 일말의 동정심도 없으면서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여성과 농락하듯 관계를 맺고, 한발 더 나아가 종수가 가업을 이은 터전의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악취미까지 있다. 벤은 자신의 은밀한 취미를 아무렇지도 않게 고백한다. 해미가 사라지고 벤을 뒤쫓던 어느 날, 용산참사를 주제로 한 작품을 오래도록 바라보던 종수는 이후 극단적인 방식으로 분노를 태우고야 만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무기력한 열등감으로 에워싼 인물의 최종 정착지가 시대의 모순과 불평등을 상징하는 용산참사를 비춘 후에 드러난다는 사실이 영화를 끝내 동의할 수 없게 한다.

 

[버닝]은 분명 완성도면에서 부족함이 없다. 탁월한 스토리텔링과 효과적으로 배치한 미장센은 148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 단단한 긴장을 조성한다. 그럼에도 청춘의 무력함과 분노를 표현하는데 그치며 진한 아쉬움을 남긴다. 한 마디 사족을 붙이자면, 세상은 변했고,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말은 더 이상 공감을 자아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