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 간 가장 성공한 영화 프랜차이즈는 단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이하 MCU)다. 2008년 <아이언맨>으로 시작한 시리즈는 7월 개봉할 <앤트맨과 와스프>로 스무 번째 영화라는 기념비적 역사를 세웠다. MCU는 한 영화의 속편을 만들고 세계를 유지하는 ‘시리즈’의 개념을 넘어, 각 히어로의 개별 영화를 제작하고 이들을 모은 이벤트 영화를 제작하는 ‘유니버스’를 정립했다. 감독도, 작가도, 출연진도 다른 영화를 하나의 세계로 묶는 것은 결국 프랜차이즈 전체를 관리하는 제작자의 능력에 달려 있다. 무명 프로듀서 케빈 파이기는 지난 10년 간 영화 20편을 통해 할리우드에서 가장 성공한 제작자로 발돋움했다. 어엿한 대형 스튜디오 ‘사장님’이 된 그가 최근 미국 프로듀서조합의 패널 행사에서 프로듀서로서 자신이 걸어온 자취와 MCU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패널에서 한 말을 중심으로 정리했다.

 

 

우리는 올인했다. 정말 무모한 시도였다.
– 케빈 파이기
출처: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아이언맨>의 시작은 화려하지 않았다. 초기 제작 당시 마블 ‘스튜디오’는 코믹스 출판사에서 꾸린 ‘독립영화제작사’였다. ‘아이언맨’은 배트맨, 슈퍼맨, 하다못해 자사의 스파이더맨보다 유명하지 않았다. 감독도 배우로 더 유명한 존 파브로였고, 무엇보다도 주연은 연기력은 인정받았지만 마약 때문에 커리어의 위기를 맞았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였다. 해외 판권 판매로 겨우 예산을 확보한 <아이언맨>은 순 제작비의 3배를 벌어들이는 대성공을 거뒀다. <아이언맨> 성공 이후 파라마운트 픽쳐스가 이후 나온 3편의 배급을 맡았고, 그 사이 모기업인 마블 스튜디오가 월트 디즈니 컴퍼니에 통째로 인수된다. 케빈 파이기는 아이언맨, 토르, 캡틴 아메리카의 기원을 설명하는 첫 영화가 없었다면, <어벤져스>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는 “캐릭터들이 다 잘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라고 말하며 “직감을 믿고 계속 앞으로 나간 것이다.”라 덧붙였다. 그들의 무모한 믿음은 끊임없는 성공을 거두며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나는 누구랑 붙여줄 건데요?
– 크리스 헴스워스
출처: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파이기는 ‘속편’을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속편은 다른 영화들만큼 오리지널리티를 갖추면서도 “이 캐릭터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라는 관객들의 요구를 충족하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의 뜻대로 마블 영화의 속편은 전작과 톤이, 나아가서는 장르 자체가 바뀐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토르: 라그나로크>다. 크리스 헴스워스와 파이기의 대화에서 출발해 영화의 성격을 뒤엎는 파격적인 결과물이 되었다. 헴스워스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 어벤져스 캐릭터가 많이 등장하는 걸 ‘질투하며’ 파이기에게 “나는 누구랑 붙여줄 건데요?(Who am I getting, mate?)”라고 물었다. 파이기는 “망토 빼고, 금발이랑 수염 빼고, 망치를 없애도 여전히 토르일 것이다.”라고 말했고, 그걸 ‘전부 다 지른’ 것이 <라그나로크>다.

 

 

라이언, 당신이 우리를 ‘더 좋은’ 스튜디오로 만들었어요.
– 케빈 파이기
출처: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할리우드의 가장 큰 화두인 ‘다양성’ 논의 또한 패널에서 빠지지 않았다. 케빈 파이기는 “다양성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하며 다양성이 영화 제작에 필수적인 요소라 강조했다. 그러면서 “<블랙 팬서> 제작 회의 때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한 사람도 없던 때가 있었다. 정말 최고였다.”라고 회상했다.
파이기는 <블랙 팬서>는 지금까지의 전례를 깨는 작품이어야 하기에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린 흑인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성공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깨부술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무의식의 편견은 실제로 존재한다.”라고 덧붙였다. 파이기는 영화의 성공을 라이언 쿠글러 감독에게 돌렸다. 파이기는 정말 재능 있는 감독의 의견을 존중했고, 촬영 감독과 의상 디자이너는 쿠글러가 추천한 사람을 기용했으며, 제작비도 <앤트맨>과 <닥터 스트레인지>보다 더 많이 책정했다. 그의 과감한 투자는 큰 성공으로 돌아왔다. <블랙 팬서>는 미국에서 예매 24시간 내 판매량 최고 기록을 달성했고(이 기록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깼다.) 현재 전세계에서 13억 달러 수익을 올렸다. 파이기는 당시 예매율 기록을 확인한 후 쿠글러 감독에게 “당신이 우리를 더 좋은 회사로 만들었다.”라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여성 감독을 더 많이 기용하게 될 것이다.
– 케빈 파이기
출처: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다양성 관련 또 다른 화두는 여성 히어로 영화와 여성 감독의 기용이다. <앤트맨과 와스프>는 MCU가 10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 캐릭터를 공동 타이틀에 올린 작품이며, 내년 2월 개봉할 <캡틴 마블>은 MCU 최초의 여성 히어로 단독 영화다. MCU는 그동안 ‘백인 남성’ 캐릭터만 단독 시리즈를 제작하며 성별, 인종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꾸준히 받아 왔다. 케빈 파이기는 “우리가 얼마나 진보적(liberal)이든, 무의식 중의 편견은 존재한다.”라고 말하며, <캡틴 마블>을 시작으로 MCU 영화 안팎이 좀 더 다양화될 것이라 보고 있다. <캡틴 마블>의 연출을 맡은 안나 보든 감독은 최초로 기용된 여성 감독으로 남편 라이언 플렉과 공동 연출을 맡았으며, <캡틴 마블>의 각본 크레디트에는 여성 작가 6명과 라이언 플렉이 오를 예정이다. 마블 스튜디오 내부에서도 여성 직원들 다수가 승진할 것으로 보인다. 에이전시도 변화에 동참하고 있는데, 파이기는 “최근 감독 미팅을 하면 에이전시는 남성 감독보다 여성 감독을 더 많이 보낸다.”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만들 영화 모두에 여성 감독을 기용한다고 말할 순 없지만, 정말 많은 프로젝트에 여성 감독을 기용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영화 학교에서 6번이나 응시해서 겨우 붙었어요.
– 케빈 파이기
출처: 유튜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레드카펫 행사

패널 행사에서 케빈 파이기는 자신을 뉴저지 출신 ‘영화광’이라 소개했다. 그가 ‘스타워즈’ 덕후인 것은 꽤 유명한데, 유튜브 ‘스타워즈 TV’ 채널과 ‘스타워즈’로 인터뷰를 할 만큼 시리즈에 대한 애정을 스스럼없이 밝힌다. <스타워즈: 보이지 않는 위협>을 극장에서 13번 봤고, 티켓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영화광도 막상 업계에 들어오긴 쉽지 않았는데, 영화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여섯 번이나 지원했지만 번번이 미끄러진 것이다. 결국 사우스 캘리포니아 대학교(USC) 영화 학교에 입학 허가를 받으며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엑스맨> 제작자가 되면서 <스파이더맨> 시리즈 제작자 아비 아라드를 만났고, 그와 함께 <아이언 맨>을 제작하며 MCU의 서막을 열었다.

 

 

예산은 결국 절제의 문제다.
– 케빈 파이기
출처: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흥행에 실패한 영화가 거의 없는 마블 스튜디오이지만, 케빈 파이기에 따르면 제작비는 언제나 부족하다. 파이기는 “학생 작품을 만들든 <어벤져스 3, 4>를 연달아 제작하든 돈은 언제나 부족하기 마련이다.”라고 말하며, 예산은 결국 절제과 규율의 문제라고 밝혔다. 마블 영화 예산이 계속 올라가는 건 영화의 창작 방향을 결정하는 인물들(Above-the line)의 페이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파이기 또한 “배우들도 기여한 만큼 개런티를 받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다만 작가, 감독, 배우들 외의 프로덕션 팀의 페이는 시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제작자로서 그는 ‘돈’에도 한계가 있으며, 아무리 많아도 돈이 “창작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출처: Variety / Indiewi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