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Jacinta

 

 

 

고등학교 시절 ‘야자’를 땡땡이치고 남포동으로 달려갔던 기억이 남아있는 부산국제영화제(이하 ‘BIFF’)가 올해로 23회째를 맞이했다. 매년 가을이면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 영화제를 탐험했던 내게 ‘BIFF’는 청춘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청춘과 함께 해온 BIFF의 2018년을 기억하는 키워드는 아무래도 ‘태풍’이 될 것 같다. 몇 년 사이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폭우로 온몸이 흠뻑 젖은 기억은 있어도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모진 비바람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토요일 오전을 강타한 태풍 덕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 오들오들 떨면서도 영화를 포기하는 않는 모습에 스스로 어이없고 놀랄 지경이었다. 그런데 나뿐만이 아니었다. 영화제를 찾은 열정 넘치는 사람들은 태풍이 아무리 몸을 할퀴어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또 관객들을 만나려는 게스트들도 태풍을 이겨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영화제이긴 해도 실로 대단한 풍경이었다.

 

 

정상화 원년을 선포한 BIFF는 확실히 작년보다 활기가 느껴졌다. [엽문 외전]을 끝으로 막 내린 BIFF는 지난해보다 2000명 늘어난 총 19만 2991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어김없이 인기작들의 매진 행렬이 이어졌으며(태풍이 몰아치는 문제의 토요일 아침에도 표를 구하려는 팬들이 어김없이 매표소를 지키고 있었다), 영화제를 방문한 게스트들도 화려해 올해 개막식 레드 카펫에서는 톱스타를 쉽게 볼 수 있었다. 편안한 휴식 공간과 각종 부대 행사가 몰린 영화의 전당 야외광장에는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영화 상영 후 GV 현장에서는 재치 있고 수준 높은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갔다.
총 79개국 323편을 상영하며, 어느 때보다 풍성한 라인업으로 개막전부터 관심을 모았던 BIFF는 올해를 발판 삼아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까. 화려한 외형만큼이나 내실을 단단히 다지길 바라며, 올해 영화제에서 관람한 영화 14편을 소개한다.

 

 

 

아시아 영화의 현재

가버나움 / 여명 / 온 감각과 신경을 다해 / 아일랜드

 

이미지: Sony Pictures Classics, AOI Pro. Inc, Epicmedia Productions Inc, Shanghai Hanna Pictures Co.

 

BIFF가 내세우는 가치는 바로 ‘아시아’다. 해마다 개·폐막작은 아시아 영화를 택하고, 경쟁 부문은 뉴 커런츠에서는 아시아 신진 감독들을 발굴하고자 한다. 아시아 영화의 창, 갈라 프레젠테이션, 한국 영화의 오늘, 특별기획 프로그램(올해는 ‘필리핀’)과 같은 섹션에서 다양한 소재와 장르의 아시아 영화를 선별해서 소개한다. 또한 영화제 기간 필름 마켓을 운영하며 아시아 영화의 창구가 되고자 한다. 즉, BIFF가 지금까지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은 아시아 영화였다.

 

올해 BIFF에서 총 네 편의 영화를 관람했다. 더 많고 다채로운 영화를 보면 좋았겠지만, 시간은 언제나 한정적이다. 먼저 올해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가버나움]은 필람 영화 중 하나였다. 레바논 출신 여성 감독 나딘 라바키의 영화로 수도 ‘베이루트’에서 살아가는 하층민과 난민의 참담한 실상을 그린다. [가버나움]은 뚜렷한 일자리도 없이 아이들에게 거리의 돈벌이를 시키며 가난을 대물림하는 부모 아래에서 일찌감치 혼란스럽고 냉정한 시스템에 눈을 뜬 소년 ‘자인’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다.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며 소년이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배경을 촘촘하게 묘사한다. 소년이 파격적인 행동을 하고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에는 고착화된 가난과 결혼제도의 악습, 난민 문제 등 국가도 부모도 외면하는 처절한 현실로 빼곡하다. 아역 배우들의 사실적인 연기와 비극적인 현실에도 온기를 져버리지 않는 연출, 설득력 있는 서사로 뜨거운 감정을 끌어낸다. 자신을 태어나게 한 게 죄라는 소년의 주장과 또 다른 동생이 태어날 거라며 화해를 청하는 부모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며,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진한 여운을 남긴다.

 

뉴 커런츠 출품작 [여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에 참여하며 기반을 다져온 히로세 나나코의 첫 연출작이다. 드라마 [심야식당]으로 친숙한 코바야시 카오루와 영화 [아무도 모른다]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야기라 유야가 호흡을 맞췄다. 인공조명을 배제하고 자연광을 이용한 촬영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를 떠올리게 하며, 과거의 상처와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미숙하고 잘못된 행동 때문에 스스로를 고립시킨 청년과 그에게서 후회로 가득한 죽은 아들을 떠올리며 서서히 집착하는 남성, 영화는 두 사람이 관계를 형성하고 반목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그들은 마침내 외면했던 현실에 서서히 가까워지지만, 영화는 뚜렷한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지지부진한 현재를 집요하게 비추며, 불완전한 심리의 고된 여정에 관심을 둔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감독은 할머니가 죽고 개인적으로 위축됐던 시기에 영화를 구상했다고 밝혔다.

 

[온 감각과 신경을 다해]는 욕망에 관한 영화다. 오프닝에서 매력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여성 아일린과 그녀를 동경하는 네 남자의 이야기가 모호한 시간 경계 속에 교차되며 흘러간다. 순진한 옷 가게 점원, 전자상가를 운영하는 사별한 남자, 여자친구에게 차인 대학생, 직업도 없이 옥상에서 살아가는 남자. 한결같이 보잘것없는 하루를 보내는 네 남자는 걷잡을 수없이 아일린에게 사로잡히고 어떻게든 그녀에게 관심을 받고 마음을 얻고자 애를 쓴다. 결핍된 일상을 살아가는 네 남자가 젊고 아름다운 여성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는 영화라 할 수 있는데, 여성을 대상화하는 시선이 때때로 난감할 때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성 감독의 영화였고, 네 남자에게 찾아온 만족이 그리 즐겁지는 않다.

 

[아일랜드]는 중국의 유명 배우 황보가 연출, 연기, 각본까지 섭렵한 영화다. 복권 1등에 당첨된 기쁨을 누릴 사이도 없이 바다 관광을 떠난 회사 야유회에서 거대한 쓰나미에 휩쓸려 무인도에 떠밀려온 주인공과 사람들의 이야기는 시놉시스만 놓고 봤을 때 꽤 솔깃하다. 하지만 신선한 재미는 그리 길게 가지 못한다. 134분의 러닝타임에 재난, 어드벤처, 로맨스, 코미디 서사를 빈틈없이 채우다 보니 서사는 점차 무거워지고 흥미를 반감시킨다. 특히 낡고 진부하며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로맨스는 영화의 정체성마저 의문스럽게 한다.

 

 

 

유쾌하거나 통쾌한 여성 서사

트러블 위드 유 / 할로윈

 

이미지: Les Films Pelléas, UPI 코리아

 

이번엔 여성 캐릭터 활용이 신선해서 즐거웠던 영화 두 편이다. 먼저 프랑스 영화 [트러블 위드 유]는 [언노운 걸]로 알려진 아델 아에넬과 피오 마르마이가 주연을 맡은 한편의 유쾌한 소동극 같은 영화다. 아들에게 아빠의 영웅담을 들려줄 정도로 죽은 남편을 신뢰했던 주인공 이본느는 어느 날 모든 게 거짓이고 실제로는 부패 형사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억울하게 전과자가 된 앙트완의 주변을 맴돌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언뜻 시놉시스만 보면 주인공이 남자에게 정의를 찾아주는 드라마를 기대할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고 반복되는 오해 속에 꼬여가는 상황을 시트콤처럼 그려내며, 정의 찾기보다는 개개인의 일탈과 해방 심리에 초점을 맞춘다. 앙트완의 부인으로 특별 출연한 오드리 토투의 아그네스도 무척 인상적인데, 영화 속 여성 캐릭터가 전형적인 주체성을 가진 여성상을 보여주기보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개인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영화를 더욱 흥미롭게 한다.

 

잔혹한 슬래셔 무비는 매번 보고 나면 찝찝한 여운을 남긴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노골적이며 선정적으로 묘사하는 장르 특유의 문법은 흠칫 놀라기보다 불편할 때가 더 많다. 그런데 1978년 원작을 리부트한 [할로윈]은 그런 불편함 때문에 슬래셔 무비를 멀리했던 관객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영화다. 존 카펜터 원작 이후의 이야기로 출발하는 영화는 40년 전 생존자 로리를 전형적인 피해자 트라우마에 가두지 않고, 더욱더 폭력적으로 거듭난 마이클 마이어스의 살인 행각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캐릭터로 창조해낸다. 원작을 유쾌하게 오마주한 장면과 후반부 로리와 살인마의 대결이 흥미진진하며, 어느 순간에는 환호성을 지르게 한다. 영화제를 찾은 제이슨 블룸은 관객과의 대화에서 사회적 메시지를 엔터테이닝하게 녹여낸 작품 제작에 가치를 둔다고 밝혔는데, [할로윈]은 그의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영화다.

 

 

 

 

로버트 패틴슨 ‘배우의 길’

하이 라이프 / 뎀젤

 

이미지: Wild Bunch, Great Point Media

 

영화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스타덤에 오른 로버트 패틴슨은 2012년 시리즈가 종영한 이후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다. 이후 출연작 대부분은 스크린을 가득 채우던 ‘창백 미남’ 대신 연기와 다양한 캐릭터에 목마른 배우의 행보로 채워져 있다. 올 초 깜짝 놀랄 만한 얼굴을 보여줬던 [굿타임]에 이어 영화제를 찾은 주연 영화 두 편에서도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클레어 드니 감독의 첫 영어 영화 [하이 라이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죽은 우주선에서 어린 딸과 홀로 생존한 남자(몬티)로 분해 시종일관 무표정하고 음울한 연기를 선보인다. 몬티는 우주선에 함께 탑승한 사람들과 달리 감정과 욕망을 철저히 차단한 인물로 관능적인 에로틱한 에너지를 표출하는 줄리엣 비노쉬, 거칠고 반항적인 에너지를 표출하는 미아 고스와 대비된다. 우주를 유영하는 고립된 우주선에서 생의 에너지를 갈망하고 집착하는 사람들을 통해 인간 본질에 관해 질문을 던지고, 깊은 고립감과 날것의 욕망이 자아내는 미묘한 분위기가 독특하고 형이상학적인 SF 영화로 남게 한다.

 

최근 들어 제작되는 서부영화는 기존의 전형적인 문법을 탈피하는데, [뎀젤] 역시 마찬가지다. 데이비드 젤너, 네이선 젤너 형제 감독의 영화로 납치된 연인을 구하고자 술꾼 목사와 여정에 나서는 남자의 이야기다. 보통의 서부극이라면 사랑하는 연인을 구한 남자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담겠지만, [뎀젤]은 처음부터 그런 거에 관심이 없음을 내비친다. 초반부터 겉보기와 달리 연이어 어설픈 행동을 하던 주인공은 우여곡절 끝에 여자의 행방을 찾아내지만, 그의 바람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로버트 패틴슨은 사실상 영화의 실제적인 주인공이 아니라 전형적인 서부극의 패턴을 비트는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그가 분량이나 역할에 상관없이 작품을 택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며, 이후 펼쳐지는 페넬로피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흥미진진하다.

 

 

 

영화는 표현의 예술이다

엔젤 / 클라이맥스

 

이미지: 20th Century Fox, Wild Bunch, A24

 

아르헨티나/스페인 합작 영화 [엔젤]은 1970년대 아르헨티나를 놀라게 한 17살 연쇄 살인범의 실화를 그린 작품이다. 첫눈에 단번에 시선이 가는 매력적인 외모에도 선과 악, 도덕성, 타자와의 경계가 흐릿한 카를로스는 전학 간 학교에서 만난 라몬과 급격하게 친해지고 본격적으로 대담한 범죄 행각을 벌이기 시작한다. 영화는 카를로스의 비뚤어진 심연을 탐구하는 대신 범죄 파트너 라몬과의 미묘한 성적 긴장과 매혹적인 빈티지 영상, 귀를 사로잡는 음악을 통해 아름다운 외모와 대비되는 인물의 모순된 세계를 보여준다. 무심하고 태연한 표정으로 각종 강도와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상에 도취된 카를로스의 이야기는 마지막까지 기이한 감각에 홀리게 한다.

 

가스파 노에 감독의 [클라이맥스] 역시 1990년대 프랑스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에 영감을 얻은 영화다. [클라이맥스]는 사건의 배경과 비하인드를 담는 대신 그날의 사건에 집중한다. 무용수들이 모여 합숙하는 외딴 건물에서 그들의 노력을 자축하는 파티가 벌어지고, 곧이어 혼돈과 무질서가 지배하는 거칠고 섬뜩한 광기가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오프닝의 비디오 인터뷰 이후 쉼 없이 흐르는 음악과 배우들의 강렬한 퍼포먼스는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는 몰입을 선사한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과장되고 노골적인 미장센은 점차 극도로 혼란스러운 감각을 자극하고 마치 실제로 극중 인물들처럼 환각을 경험하는 체험을 전한다. 변태적일 정도로 극단적이며 집요한 연출은 강한 호불호를 자아낼 수 있으나 단순한 스토리를 강렬한 비주얼로 밀어붙이는 연출력은 빈틈이 없다.

 

 

 

배우들의 유쾌한 모습

시스터스 브라더스 / 벌새 프로젝트

 

 

이번엔 배우들의 익숙하거나 신선한 유쾌한 모습이 인상적인 영화다. 먼저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서부 영화 [시스터스 브라더스]는 상반된 이상을 가진 킬러 형제가 현상범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그린다. 존 C. 라일리와 호아킨 피닉스가 각각 이제는 정착된 삶을 희망하는 형 일라이와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는 동생찰리를, 제이크 질렌할이 정보 제공자 탐정 존을, 리즈 아메드가 그들이 노리는 수배자 허먼을 연기한다. 영화는 툭하면 티격태격하는 시스터스 형제의 여정과 추격 관계에서 협력자로 변모해가는 존과 허먼의 여정을 교차하며 전개한다. 존 C. 라일리 특유의 편안하고 유머러스한 연기가 극의 중심을 잡는 가운데, 영화에서 주로 무거운 캐릭터를 소화한 호아킨 피닉스의 예상외의 캐릭터 연기가 웃음을 건넨다. 골드러시 시대 각자의 이상과 신념, 욕망이 충돌하는 여정은 서부극의 전형을 답습하지 않고, 어느 순간 사라진 황금 열풍이 남긴 씁쓸하고 헛헛한 환상으로 흘러간다.

 

[벌새 프로젝트]는 [투 러버스 앤 베어]의 킴 응우옌 감독의 신작으로 [시스터스 브라더스]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꿈을 좇아 모험에 나서는 두 사촌의 이야기를 그린다. 제시 아이젠버그와 알렉산더 스카스가더가 속도 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모한 도전에 나서는 사촌으로 호흡을 맞춘다. 제시 아이젠버그는 익히 여러 영화에서 보여준 캐릭터의 연장선이지만, 비주얼 배우로 통하는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대머리 가발부터 안쓰러운 코믹 연기까지 영화 내내 신선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영화는 골리앗과 다윗의 대결이 연상되는 두 사촌의 이야기를 통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목적에 압도되어 인간성 혹은 자아를 잃는 현대인, 거대 기업의 횡포와 그에 따른 무력감을 씁쓸하고 풍자적인 유머로 그린다.

 

 

 

 

역사와 현재

앳 워 / 나는 야만의 역사로 거슬러가도 상관하지 않는다

 

이미지: Mk2 Films, Beta Cinema

 

스테판 브리제 감독의 [앳 워]는 대기업의 일방적인 공장 폐쇄에 반발하는 노조의 투쟁을 담은 영화다. 마치 다큐멘터리나 보도 프로그램을 보는 듯한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며, 한 사업장에서 노동 투쟁이 흘러가는 양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대체로 한 프레임에 여러 인물들을 밀어 넣어 노동자들이 처한 답답한 현실을 비추는데, 이는 전작 [여자의 일생]에서 4:3 비율의 프레임에 인물을 밀착시켜 답보된 심리를 보여줬던 방식과 유사하다. 비좁은 프레임에서 비추는 노조 사람들의 절망적인 현실은 약삭빠르고 냉정한 기업과 미디어 앞에서 무력하게 흔들리고 분열되는데, 관찰자적인 시선 덕분에 이들의 이야기가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다만, 인물의 역할과 스토리가 뚜렷하지 않아 보는 이에 따라서는 지루하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앳 워]에서 그려내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현실과 밀접하게 맞닿았다는 점에서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영화다.

 

[나는 야만의 역사로 거슬러가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루마니아가 유대인 학살에 동참했다는 불편한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하는 영화다. 일본이 지금까지 제대로 된 사과를 건네지 않는 것처럼, 루마니아 사람들에게 과거의 홀로코스트는 그리 들추고 싶지 않은 역사다. 영화는 역사의 가해자 루마니아를 문화 공연으로 올리려는 연출가와 그를 둘러싼 우스꽝스럽거나 못마땅한 시선을 역사적 사실과 철학적인 담론을 더해 보여준다. 영화는 개개의 인물을 통해 하나의 통일된 서사를 쌓아올리기보다 부조리한 상황이나 공연 관계자들의 일상을 개별적으로 늘어놓으면서 가해자와 피해자, 혹은 사람들의 이중적인 태도를 곱씹고 사유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