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by. Tomato92

 

 

어떤 영화는 이미 감상했음에도 다시 보고 싶게 한다. 그 이유에는 단순히 영화 또는 배우가 좋아서 혹은 영화를 보며 생긴 질문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시리즈물의 후속편이 나오기 전 기억을 되살리고자 등 다양하다. 반면에 도저히 다시 볼 엄두가 나지 않는 영화도 있다. 매우 잘 만들었지만 그 내용이 심히 충격적이거나 슬퍼서 혹은 관객에게 극도의 정신적 피로함과 혼란을 주어 재탕 욕구를 사라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러 이유로 재감상을 어렵게 하는 영화 다섯 편을 소개한다.

 

 

 

 1.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이미지: 소니 픽쳐스 릴리징 브에나 비스타 영화(주)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이란 아기자기한 단어들로 나열된 제목 때문에 동화 같은 내용을 기대했다면 큰 코 다치기 쉬운 작품이다. 영화는 나치가 유태인에게 핍박을 일삼던 2차 세계대전 당시, 지배층 가족에서 자란 8살 소년 브루노의 눈으로 조명한 잔인한 세상을 그린다. 나치 깃발을 비춘 뒤 흐르는 밝은 음악과 함께 브루노와 친구들이 뛰노는 오프닝은 묘한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는데, 본격적인 전개는 브루노의 가족이 유태인 수용소 근처로 이사한 시점부터 진행된다.

집에서 감자를 깎던 노인 파벨이 근처에서 그네를 타다 떨어져 생긴 브루노의 상처를 치료하는 장면이 나온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몸을 이끌고 거친 숨을 내뱉으며 한때 의사였다고 밝힌 파벨에게, 농담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는 소년의 천진난만함은 처참했던 유대인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후 브루노는 집밖 수용소에 갇힌 동갑내기 슈무엘을 만난다. 철조망을 경계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상황에서 직설적인 질문으로 서로를 탐색하는 두 소년의 모습은 흐뭇함과 슬픔이라는 다소 상반된 감정을 자아낸다. 이윽고 결말부에 이르러 슈무엘의 아버지를 찾아준다는 순수한 목적으로 수용소에 들어간 브루노가 유대인과 함께 끔찍한 일을 겪으며 영화는 끝이 난다. 엔딩크레딧이 나오기 전 다소 엄숙한 음악이 흐르며 여기저기 널브러진 잠옷을 비추는 연출은 여운을 넘어선 찝찝함을 주었고, 수많은 이들에게 ‘두 번은 못 볼 영화’로 꼽히고 있다.

 

 

 2. 퍼니 게임

 

이미지: ㈜스폰지이엔티

[퍼니 게임]은 ‘답답함’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 작품이다. 1997년 동명 원작을 만든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미국 버전으로 리메이크한 것으로, 별장으로 여름휴가를 떠난 가족이 두 청년을 만나고 난 뒤의 일을 다룬다. 오프닝 속 레나타 테발디의 우아한 목소리와 헨델의 감미로운 음악이 흐른 이후 느닷없이 나오는 시끄러운 밴드 음악 때문에 영화의 제목이 반어적인 뜻을 지님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한가로운 여가를 보내던 가족의 별장에 말끔한 차림을 한 피터와 폴이라는 청년들이 찾아오고, 정말 왜 저러나 싶을 정도로 끈질기게 달걀을 요구하며 주인공의 심기를 살살 건드린다. 이런 사소한 갈등에서 시작된 말다툼이 결국 도구를 사용한 폭력으로 이어지며 긴장감은 단숨에 고조된다. 영문도 모른 채 별장에 붙잡혔으니 이유가 궁금한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그들은 엉뚱한 말로 대답을 회피하며 가족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이의 멘탈까지 서서히 흔든다. [퍼니 게임]을 감상하다 보면 폴이 카메라 너머로 우리와 눈을 맞추고 질문을 던지는 연출이 눈에 띈다. 하지만 순수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답을 어느 정도 정해두고 내뱉는 느낌이라 답답함과 그에 대한 반감만이 쌓여 간다. 답답함이 최고조에 이르는 부분은 아무래도 피터와 폴이 가족 개개인을 협박 도구로 삼아 이리저리 휘두르는 장면일 것이다. 보통 할리우드 영화 같은 경우 주인공이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기지의 힘을 발휘해 상황을 모면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가능성이 보일 때마다 처참히 짓밟으며 계속 궁지로 몰아간다. 이렇게 사이다 같은 장면 하나 없이 고구마만 잔뜩 먹은 전개가 마지막까지 이어지다가 폴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의 1997년 원작이 칸 영화제에 상영됐을 당시 충격을 받아 극장을 뛰쳐나간 관객이 있었는데, 같은 감독이 리메이크한 이 작품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3.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

 

이미지: (주)NEW

 

수위에 비해 상영 등급을 매우 후하게 매기는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에서 18세 등급을 받은 것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영화는 어린 시절 특정 집단에 감금되어 고문을 당한 여자가 복수를 떠난다는 내용을 다룬다. 줄거리만 보고 단순한 복수극을 감상하기 위해 영화를 택한 사람들은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사실상 영화의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앞서 말한 복수극이 초중반까지 이어지고, 후반부에는 극단적 고통으로 천국을 보고 싶어 하는 광신 집단의 사후 세계 정탐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고어한 걸 좋아하는 마니아들에게도 이 영화는 쉬이 고르기 힘든 선택지로 불리며 다들 보기를 망설이는데,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사후 세계 탐험 실험 대상의 신체에 폭행을 가하고, 살갗을 벗기는 등의 육체적 고문에서 더 나아가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심리적 고문까지 병행되기 때문이다. 가해자들의 목적이 단순한 폭행을 통한 희열, 쾌감 획득이 아닌 (적어도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숭고한 사후 세계에 관한 궁금증 해소이기에 그나마 감정의 높낮이가 있는 전자의 경우보다 더 체계적이고 냉혹한 고문 과정이 기계적으로 나열된다. 정작 사후 세계가 어떤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나오지 않고 열린 결말처럼 마무리되어 허무함을 느끼는 관객들도 있었지만, 몇몇은 실망하기보다 작품에 담긴 종교적 메시지를 ‘꿈보다 해몽’식으로 해석하며 건설적인 토론의 장을 열기도 했다.

 

 

 4. 소년은 울지 않는다

 

이미지: Fox Searchlight Pictures

 

[소년은 울지 않는다]의 브랜든 티나는 여자의 성을 갖고 태어났지만 남자의 마음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여자와 만나고 싶다는 순수한 일념으로 가슴을 압박 붕대로 감싸고 바지에 양말을 넣으며 남자 행세를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라나라는 아이와 우연히 만나 사랑의 감정을 싹 틔운다. 트랜스젠더라는 개념이 매우 생소했던 1990년 당시 ‘동성애자는 죽인다’라는 흉흉한 소문이 있을 정도로 보수적인 네브래스카주 폴스 시티에서 성 정체성을 속이는 건 티나에게 도박 같은 행위였지만 생각보다 큰 위기 없이 중반 이후까지 물 흐르듯 흘러간다.

 

그러나 존과 톰이 티나의 정체를 안 시점부터 작품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어두워진다. 그 둘은 라나 앞에서 티나의 옷을 강제로 벗겨 아웃팅하는 것도 모자라 그를 외진 곳으로 끌고 간 뒤 강간하기에 이르고, 이 과정에서 티나 브랜든이라는 한 사람의 인격은 붕괴라기보다 파괴에 가까운 손상을 입는다. 이후 사건에 관한 조사를 받을 때 ‘왜 여자들과 노닥거렸냐’며 피해자를 탓하는 무지몽매한 질문은 채 아물지도 않은 티나의 상처를 또다시 헤집고, 바보 같은 웃음으로 시종일관 밝기만 했던 그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눈물샘을 자극한다. 이런 처참한 일을 겪고 재회한 티나와 라나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한 뒤 폴스 시티를 떠나 링컨에서 함께 지내길 꿈꾸며 다시 희망을 갖지만, 복수심과 질투에 눈이 먼 존이 끔찍한 일을 저지르며 결국 슬픈 결말을 맞는다. 크레딧이 나오기 전 등장인물의 후일담이 이 영화가 소설이 아닌 실화임을 부각하며 슬픔을 가중한다. 참고로 티나 브랜든 사건을 주도한 존 로터는 작년까지 수차례 항소를 했지만 모두 거절되어 현재까지 복역 중이다.

 

 

 5. 레퀴엠

 

이미지: (주)미로비젼

 

[블랙 스완]을 만든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 영화는 마약 중독자들의 삶이 변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다채로운 색감, 탁월한 연출,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음악까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나지만 두 번 보기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레퀴엠]은 시종일관 우울한 작품과는 결이 살짝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중간중간 감독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통통 튀는 연출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각적인 재미를 주고, 주인공들의 눈부신 외모와 꿈을 좇는 그들의 열정을 보면 청춘물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미약하게나마 있었던 초반의 희망적인 분위기는 인물들의 잘못된 선택이 이어지며 점점 사라지고, 나중에는 처절할 정도로 타락한다. 아무래도 소재가 소재이다 보니 그런 전개는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한없이 망가지는 그들의 모습에 한심함보다는 연민의 감정이 앞서는 때가 왕왕 있다. 영화는 네 사람이 각각 소파, 침대에서 태아라도 된 것처럼 몸을 웅크리며 마무리되는데, 아들 해리와 멀쩡한 모습으로 재회하는 사라의 상상은 극의 씁쓸함을 극대화한다. [레퀴엠]은 앞서 언급했듯이 연출, 음악 등 무엇 하나 빠지지 않지만 다른 무엇보다 작품의 몰입도를 높인 건 중독자로 나온 자레드 레토, 제니퍼 코넬리, 엘렌 버스틴, 마론 웨이언스 네 사람의 훌륭한 연기일 것이다. 특히 다이어트를 위해 먹은 약 때문에 감정의 높낮이가 쉴 새 없이 바뀌는 캐릭터를 노련한 연기력으로 소화한 엘렌 버스틴은 당해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