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처음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그동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여러 나라의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고 싶었지만, 서울에 거주하는 나에게 부산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선뜻 떠나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감사하게도 참석할 기회가 생겨, 설레는 마음을 안고 부산행 KTX에 새벽 일찍 몸을 실었다.

 

마찬가지로 올해 개최되었던 전주국제영화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규모도 훨씬 크고 어딜 가나 사람들로 붐볐다.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뿐 아니라 해외에서 방문한 관람객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건물 간에 거리가 멀어 셔틀버스와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바다도 보고 짠 내음을 맡으며 부산의 거리를 구경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부산의 매력에 부산국제영화제가 더해져 훨씬 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태풍 소식과 함께 찾아온 험악한 날씨에도, 영화를 향한 관객들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이른 아침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티켓이 매진된 작품이 속출했다. 나도 보고 싶었던 1순위 영화 몇 작품을 놓치기도 했지만, 그 덕분에 진흙 속에 숨겨진 보석 같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3일 동안 총 9개의 작품을 관람했는데, 그중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들을 소개하겠다.

 

진한 여운을 남긴 작품

여자 사형수 이야기 & 스틸 컨트리

 

이미지: HKCorp

 

[여자 사형수 이야기]는 배우이자 감독인 헤이거 벤-애셔가 연출을 맡은 세 번째 영화이며, 뉴욕 트라이베카영화제에서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사형 선고를 받은 여성 사형수들의 길게는 2주 전부터 짧게는 몇 분 남지 않은 시간을 옴니버스식으로 그리는데, 마치 실제 사건을 그대로 담아낸 다큐멘터리처럼 매우 사실적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아홉 명의 여성 사형수와 집행이 이뤄지기 전에 그들이 만나는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다. 살인을 저질러 사형수가 된 이 여성들은 살인을 하게 된 원인도 배경도 전혀 다르다. 자신을 강간한 남성들을 죽인 여성들, 가난 때문에 적절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가정 폭력과 마약에 쉽게 노출된 환경에 놓인 여성들의 이야기가 한 꺼풀씩 드러난다. 각자 다른 사연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는 ‘사형 제도의 존재 의의’라는 주제를 관통한다.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가난, 차별, 폭력에 내몰려 살인을 저지르게 된 여성들, 우리는 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리의 손으로 그들을 살인할 권리가 있는가.
배우들의 흡입력 있는 열연을 통해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야기들은 절로 눈물을 쏟게 만들며 강렬하고도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이미지: Bedlam Productions

 

[스틸 컨트리]는 사이몬 펠로우스 감독의 세 번째 장편 영화이며 미스터리 스릴러이다.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국제영화제에서 먼저 선보인 작품이기도 하다. 러닝타임은 89분으로 짧으며, 배우들의 흡입력 있는 연기가 금세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든다.

가슴 졸이는 긴장감이 매력인 스릴러 장르임을 생각하면, 이 영화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이야기는 잔잔하고 건조하게 흘러가고, 반전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흥미로운 이유는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드는 배우들의 연기력 때문이다. 특히 주연 ‘도니’를 연기한 앤드류 스캇은 드라마 [셜록]에서 깔끔하게 넘긴 머리와 잘 차려입은 슈트로 빛을 발하는 악역 ‘모리아티’로 익숙할 것이다. 그러한 모습이 아닌 후줄근한 행색과 멍한 표정으로 과도하리만치 사건에 집착하는 신선한 연기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영화의 묘미 중 하나이다.
처음부터 상대방에 대한 관심의 부재를 지적하고, 사건에 유일하게 관심을 가지는 주인공에게 남의 일에 신경 끄기를 강요하며, 결국 소년의 죽음을 막지 못했던 것은 상대방에 대한 관심의 부재였음을 그린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도 서로에게 좀 더 관심을 가졌다면 해결할 수 있었을 사건들이 많지 않았을까 돌아보게 된다.

 

아시아 영화의 새로운 면모

나의 500번째 영화 & 악당들

 

이미지: Drishyam Films

 

발리우드 영화라고 하면 으레 화려한 비주얼과 음악춤사위로 가득한 영화를 떠올리기 마련이다그러나 [나의 500번째 영화]는 익숙한 인도의 영화들과는 다르게 뮤지컬 요소는 없고유쾌하면서도 담백하고 진중한 코미디 드라마를 그린다.

하르디크 메타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만년 단역 배우였지만 한때 유명인사였던 배우 수디르가 어느 날 자신이 지금까지 출연했던 작품이 499편인 것을 알게 되어 500번째를 멋지게 장식하기 위해 벌이는 이야기를 그린다화려한 모습을 자랑하는 배우라는 직업군에서도 노년에 접어든 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가족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500번째 영화에 집착하던 수디르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엇이 정말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때로는 유쾌하게때로는 먹먹하게 그려내는 것을 보면서 인도 영화도 충분히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을 각인시킨 작품이다.

 

이미지: Great Dream Pictures, Inc.

 

[악당들]은 로맨스가 아닌 대만 영화라는 점이 흥미를 끄는 작품이다헝추슈안 감독이 대학 졸업 3년 만에 제작한 첫 장편 영화로이전에 액션 장르 단편 영화들을 성공적으로 연출한 경험을 살려 멋진 액션 영화를 만들어냈다.

서사는 어딘지 익숙하고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지만액션이 특히 발군이다전직 농구스타이자 차량 강도를 보조하는 주차단속요원 루이가 우비를 입은 은행강도범과 엮이며 점점 뒷세계로 빠져드는 모습을 그린다이들의 싸움은 늘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진다그들은 무술 전문가처럼 정교하고 화려하게 합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것을 닥치는 대로 던지면서 냅다 주먹을 내지르는이른바 싸움계의 하이퍼 리얼리즘을 묘사한다이러한 액션을 여러 각도와 여러 관점의 카메라 앵글로 담아내어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준다앞으로도 대만 영화계에서 선보일 새로운 액션 영화를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압도적인 기괴함을 남긴 작품

클라이맥스

 

이미지: Rectangle Productions

 

가스파 노에 감독의 신작 [클라이맥스]는 또 한 번 많은 관객에게 충격을 선사했다실제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15일간의 촬영 기간 동안 단 5페이지의 대본으로 완성한 이 작품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람했던 작품 중 가장 기괴한 영화로 꼽았다.

눈이 내리는 어느 외딴 건물에서 댄서들이 리허설을 성공적으로 마친다공연을 앞둔 그들은 리허설 성공을 자축하며 파티를 시작하는데파티가 무르익을 무렵 누군가가 음료에 마약을 탔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다내면에 숨겨왔던 본성이 드러나고파티장은 이내 광적인 혼돈만이 남는다폭력성행위마음속 깊은 곳에 내재된 갈망만이 남은 그곳은 가스파 노에 특유의 뒤틀린 화면으로 기괴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를 전달한다. 괴성을 지르고 한 가지에 강하게 집착하는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 어지럽게 흔들리는 카메라와 영화 내내 비추는 강렬한 붉은색은 마치 관객이 실제로 환각에 빠진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딱히 전달하고자 하는 서사나 메시지는 없다그저 극도의 불쾌함과 기괴함을 95분 동안 스크린에 그려내고자 했던 연출자의 의도가 여실히 느껴지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