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 스포일러 포함!

 

이미지: 넷플릭스

 

넷플릭스를 이용하면서 좋은 점은 미드와 영드로 국한된 시청 패턴에서 벗어나 세계 각국의 드라마를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동안 유럽에서 건너온 범죄 드라마를 흥미롭게 봤던 터라 매주 새롭게 공개되는 드라마에 촉각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슬프게도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한때는 신선하고 재밌기도 했던 유럽 드라마들이 지나치게 복잡한 플롯으로 피로감을 안기거나 너무나 막장스러운 상황 전개로 치를 떨게 한다. 이번 주도 피해 가지 못했다. 잠을 쫓아가며 끝까지 정주행을 달렸건만 불편하고 답답한 기분만 한가득이다. 대체 뭘 봤냐고?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에 영감을 얻은 6부작 드라마 [향수(Parfum)]다.

 

일단 소설의 기억은 아득하기에 순수하게 드라마에 관해서만 적는 글이니 참고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소설에 영향을 받았다고는 보기 어려운 전개…)

 

 

이미지: 넷플릭스

 

[향수]는 지난해 방송됐던 샘 라일리 주연 대체 역사 드라마 [SS-GB]의 필립 카델바흐가 연출을 맡았다. 만약 [SS-GB]를 봤다면, 서사의 생략된 지점은 많아도 음울한 시대를 매혹적으로 담아낸 영상은 샘 라일리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함께 기억에 남을 것이다. [향수] 역시 그러하다. 캐릭터 설정과 서사는 문제가 많지만, 현재와 과거를 유려하게 넘나드는 영상은 심미적인 만족감을 안기기에 충분하다. 그게 전부라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말이다.

 

드라마는 한 가수가 잔혹하게 살해된 채 발견된 후,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와 가수의 옛 친구들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다. 다시 모인 옛 친구들은 죽은 가수 카타리나와 딱히 막역한 사이는 아니다.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카타리나와 과거와 현재 관계를 맺긴 했어도 끈끈한 우정을 나눴다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죽음을 계기로 재회한다. 그러면서 학창시절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에 감명을 받아 향기 모으기를 했던 난잡하고 기묘했던 과거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인물들은 저마다 결함과 비밀이 있다. 이 드라마는 정말 밑도 끝도 없이 어둡고 잔뜩 뒤틀린 방식으로 문제적인 인물의 행동을 하나둘씩 꺼내 보인다. 사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싶지 않다면, 내 정신세계는 소중하다고 생각하면 젠더 묘사마저 문제 가득한 이 드라마에 발을 들이지 말자.

 

문제적 과거를 떠올리는 과정에서 드라마의 포문을 연 카타리나의 죽음은 굉장히 소외된다. 그저 다시 만난 옛 친구들의 막장 서사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을 뿐,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조차 카타리나의 죽음을 우선순위로 두고 있지 않는다. 물론 친구들도 잠시나마 서로를 범인으로 의심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지만, 개개인의 문제가 워낙 곪아있다 보니 카타리나는 잔인하게 난자당한 시신 그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부체, 로만과 엘레나 부부, 모리체, 다니엘 이 다섯 사람은 처음의 엽기적인 살인사건을 잊게 할 정도로 20년 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기기묘묘한 막장극에 초대한다. 막장 서사가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인물들의 행동이 불쾌한 기분을 마구 조성한다. 당시 향기를 모으며 어울렸다 해도 다섯 명의 관계는 지나치게 불평등하며, 놀랍게도 그 관계가 현재에도 변함없이 적용된다.

 

유일한 여성 엘레나는 다니엘과 함께 이들 관계에서 온전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심지어 결혼했다는 사실이 놀랄 정도로 과거와 현재에 걸쳐 심각한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엘레나가 겪은 폭력은 최근 본 드라마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경악스러운 수준인데, 이 드라마는 그런 인물을 지나치게 기능적으로 활용한다. 엘레나를 수동적인 인물로 묘사해 폭력에 무력하게 굴복시킨 것도 모자라 반전 장치를 위한 가해자로 만들고 만다. 이는 엘레나의 폭력적인 배우자 로만과 비교했을 때 부당한 처사로 보인다. 로만은 오랜 기간 엘레나에게 성적 수치심을 안기고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했을 뿐 아니라 딸마저 앗아가려 하는데도 그에게 어떤 고통도 주지 않는다. 다른 캐릭터도 막장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엘레나와 로만의 부당한 관계는 드라마임에도 심리적인 충격을 안긴다.

 

드라마에서 막장 서사의 문제는 대체로 남성에게 계속해서 기득권을 주고 여성을 무력한 캐릭터로 만든다는 것인데, 엘레나만 그런 게 아니다. 현재 시점에서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나디아 역시 복잡한 사생활이 발목을 잡는다. 유부남 상사와 만나는 그녀는 굉장한 집착녀다. 상대방이 가정을 버릴 생각이 없는 게 뻔히 보이는 데다 모욕적인 언행까지 행사했음에도 놓칠 못하고 질척거린다. 결국 그 집착이 결국 화를 부르는데, 너무나 어이없던 결말이 증거다. 자신을 봐주지 않는 남자를 위해 형사의 본분마저 망각하게 묘사했어야 했는지 의문과 불쾌감이 동시에 든다.

 

즉, 후반부에 이르러 반전을 거듭하는 결말은 각 인물들의 막장 사연에 치중했다가 황급히 결말을 맺었다는 인상이 강하다. 과거와 현재 발생했던 사건은 각각 다른 범인을 제시하는데, 첫 번째는 아까도 언급했던 엘레나다. 남성들의 폭력에 시달린 엘레나는 비뚤어진 방식으로 분노와 광기를 드러내 설마 하면서도 아니길 바랐던 마음을 허탈하게 한다. 두 번째는 별로 안 친했던 동창들의 사연에 쫓겨서 존재감도 희미했던 인물이다. 어차피 드라마의 모든 인물들이 문제적이라는 사실을 감안해도 살인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는 과정이 급조된 것 같아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사랑받고 싶은 갈망에서 파생된, 향기에 집착하는 인물들의 내면을 다뤄야 할 드라마가 지나친 막장 전개와 때때로 과한 장면 묘사 때문에 묻힌 기분이다. 정말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