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빈상자

 

 

많은 사람들을 들뜨게 하는 연말연시가 돌아왔다. 거리는 한해 중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불빛으로 반짝이고,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성대한 축제처럼 준비하고 치러내는 설렘과 벅참으로 가득하다. 올해처럼 크리스마스이브와 새해 전날이 휴일 사이에 껴버리면, 그런 날에는 하루 종일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기 쉽지 않다.

 

 

이미지: 워너브러더스 픽쳐스

 

하지만 일도 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는 게 꼭 연말연시가 마냥 반갑고 즐겁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송년회와 회식을 의무적으로 치르고, 연이은 선물과 외식으로 은행 잔고까지 줄어들면 남는 것은 피로한 간과 몸, 영수증 그리고 한 살 더 먹은 부담감뿐이다.

 

1년 전 다이어리를 살 때만 해도 새해가 되면 자신을 비롯한 주변의 많은 것이 자동적으로 달라질 것만 같은 희망(내지는 착각)이 있었는데, 다이어리가 낡아지기도 전에 겪었던 실패와 실망의 감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완전히 절망하기엔 이르지만, 온전히 기뻐하기도 어려운 연말연시다. 그런 우리의 복잡한 마음을 영화는 아는지 모르는지, 연말연시를 마냥 반가워할 수만은 없는 이유를 영화에서 골라보았다.

 

 

 

 

섣부른 고백 주의 –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

 

프로포즈, 혹은 처음 고백하는 날은 신중하고 신중하게 골라야만 한다. 이벤트나 선물을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때의 상황과 분위기도 고려해야 한다. 다만 미리 예측하기 어렵기에 모두가 반드시 들뜨기 마련인 순간을 고를 수 있다면 일단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 ‘새해맞이 파티’와 같은 순간 말이다.

 

이미지: 씨네그루, (주)키다리이엔티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멕 라이언의 전성기와 함께 90년대 로코 영화의 전성기를 견인했다. 연인인 듯 친구인 듯 우정을 쌓고 썸도 타던 해리(빌리 크리스탈)와 샐리(멕 라이언)는 영화가 시작하고 2시간이 흘러서야, 그리고 극 중에서는 무려 12년이란 긴 세월을 보내고서야 마침내 연인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사랑다툼보다는 여사친∙남사친의 가능성과 편안함을 즐겼던 영화지만, 해리와 샐리는 결국 친구의 선을 넘는 우(?)를 범하고 만다.

 

해리와 샐리의 지긋지긋한 썸이 드디어 결실을 보는 시간과 장소는 영화의 하이라이트도 되는 새해를 맞이하는 파티다. 모두가 흥겹고 설레는 새해맞이 파티는 고백에 적합한 순간으로 보인다. 하지만 해리의 고백에 당황한 샐리가 지적하듯, 한해의 마지막 날과 새해의 첫날이 교차하는 이때는 고조되는 외로움과 설렘이 범벅이 되어 순간의 감정이 실수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연말연시 분위기에 휩쓸려 썸남썸녀에게, 혹은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섣불리 고백하지 말자. 영화 속 해리와 샐리는 3개월 후에 결혼하며 해피엔딩을 맞이하지만, 현실에서는 새해 내내 이불킥할 가능성이 크다.

 

 

 

새해에도 안 생겨요 – 어바웃 어 보이(2002)

 

새해에는 드디어 내 짝을 만날 수 있을까? 올해도 ‘나혼자산다’를 촬영했던 솔로들은 새로 시작하는 새해에 기대를 걸어본다. 하지만 (올해도 그랬듯) 새해에도 ‘나혼자산다’가 종영될 기미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새해맞이 파티에서 새해 첫날 첫 순간부터 짝을 만나길 바란다면 마음만 너무 앞선 게 아닐까?

 

이미지: 유니버설픽쳐스

 

윈 히트 원더 곡 하나로 뜬 아버지를 둔 덕분에 평생을 놀고먹고 즐길 수 있었던 윌(휴 그랜트)이 유일하게 정성을 다하는 순간은 여자를 유혹할 때다. 지겹도록 들어온 아버지의 히트곡이 하필 캐롤이었기 때문인지, 윌은 한 번도 크리스마스를 즐겨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런 그가 친구가 된 12살 소년 마커스(니콜라스 홀트)와 그의 엄마 피오나, 그리고 피오나의 전남편, 그 전남편의 여친, 그 여친의 엄마까지 모인 교묘한 조합의 크리스마스 저녁에서 처음으로 따뜻함이라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바람둥이에 아이들도 싫어했던 윌에게 조금씩 변화가 온 건 윌이 마커스를 통해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참애정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윌의 말에 따르면, 한 사람을 위해 마음이 열리고 나니 다른 사람에게도 조금씩 마음이 열리고, 그 결과 새해맞이 파티에서 윌은 참사랑 레이첼을 만나게 된다. 레이첼을 만나면서 윌은 처음으로 점차 진실을 말하기 시작하며 자신에 대해서도 자각하게 된다.

 

워킹타이틀 작품답게 [어바웃 어 보이]는 낭만적이면서도 사실적인 감각도 완전히 놓치지 않는다. 특히 윌이 이어가는 내레이션에는 바람둥이의 솔직하고 뻔뻔한 마음이 시종일관 잘 담겨있다. 다만 (워킹타이틀 작품답게) 영화가 가장 낭만적으로 쏠리는 시점은 역시 연말연시이다. 새해맞이 파티에서 레이첼을 만나 연말쯤에는 모두가 모여 짝을 확인하고 행복해지는 결말은 거의 희망고문에 가깝다. 그러니 기대하지 말자. 새해에도 안 생긴다.

 

 

 

연말연시가 가장 쓸쓸하다 – 섹스 앤 더 시티(2008)

 

한해의 마지막 날은 새해를 앞두고 아주 흥겹고 설레는 날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누군가에겐 가장 쓸쓸하고 외롭게 느껴질 수 있는 날이기도 하다. 연말연시의 쓸쓸함은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신경 쓰이는 손가락 끝 가시 같다. 무시하고 싶지만 자꾸 걸리고, 끄집어 내려할수록 오히려 파고들어가 아픔만 더 심해진다.

 

이미지: (주)시네마서비스

 

새해 전날 밤, 사만다는 할리우드 스타가 된 연하 남친과 벽난로 앞에서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고, 샬롯은 첫 임신 성공의 문을 여는 밤을 남편 해리와 함께 맞이한다. 하다못해, 캐리의 비서 루이스마저 새해맞이 파티에서 아직 잊지 못한 전 남친과 다시 인연을 맺는 재회를 한다.

 

반면, 결혼식 당일 신랑이 나타나지 않은 캐리(사라 제시카 파커)와 바람피운 남편과 헤어진 미란다(신시아 닉슨)는 홀로 남은 한해의 마지막 날을 우울하게 보내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각각 컵라면과 싸구려 포장음식을 어두운 집안에서 홀로 흡입하고, 오래된 영화를 보면서 마음을 쓰지 않기 위해 정신을 수양해본다. 새해가 오는 순간에 깨어있지 않기 위해 잠도 일찍 청해보았다가 전화를 걸어 서로 위로도 해본다. 하지만 결국 연말 홀로서기에 실패한 두 사람은 새해맞이에 들뜬 뉴요커 인파를 뚫고 만나 포옹하면서 솔로의 쓸쓸함을 나눈다. 둘은 그나마 동병상련의 친구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지키지도 못할 새해 결심 –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여러 가지 결심을 한다. 새해에는 꼭 이루고야 말 것들을 새로 산 다이어리에 빼곡하게 적고, 그 결심을 착실하게 실행하고 꼼꼼하게 감독할 묘안도 고민해본다. 하지만 작심삼일이라는 저주는 어찌 벗어난다고 해도 3개월을 지나는 순간까지 새해 결심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미지: 유니버설픽쳐스

 

브리짓(르네 젤위거)은 새해에는 솔로인 30대를 위한 라디오의 우울한 플레이리스트를 듣지 않겠다는 것 외에도 많은 결심을 한다. 새해 결심의 단골 메뉴 살 빼기로 시작해서 담배를 끊고 술은 줄이고 전날 입은 속옷은 반드시 빨래 바구니에 넣기로 다짐한다. 또한 새해에는 알콜중독자, 일중독자, 변태이거나 관음증이나 과대망상이 있는 남자들을 피해 멋진 남친도 만나야 한다. 여기서 다시 등장하는 ‘새해 애인 출현설’.

 

연초 파티에서 마크(콜린 퍼스)를 처음으로 만나고, 도중에 바람둥이 대니얼(휴 그랜트)을 거치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마크와 키스를 하는 브리짓은 언뜻 새해 결심을 달성한 듯 보인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 영화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라기보다 ‘브리짓 존스의 소설’에 가깝다.

 

우선, 브리짓에게 추근대는 상사는 휴 그랜트, 오랫동안 연민을 품어온 남자는 콜린 퍼스라고?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다. 마크를 만나게 된 계기도 그렇다. 부모님의 주도로 열려 부모님의 친구들로 가득한 새해 파티에서 마크와 같은 남자를 만났다면 그날 로또 당첨될 운을 쓴 것으로 알아야 한다. 새해 결심 이후로도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고 보드카를 마시고 속옷을 아무 데나 널브러뜨리는 것을 봐서는 브리짓의 올해 결심도 오래 버티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뉴욕이 훔쳐가는 새해 카운트다운 – 뉴욕의 연인들(2011)

 

[뉴욕의 연인들]은 새해 전날 뉴욕을 배경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힐러리 스웽크, 미셸 파이퍼, 제시카 비엘, 할리 베리, 사라 제시커 파커, 애쉬튼 커처에 로버트 드 니로와 존 본 조비까지 출연진은 화려하다. 뉴욕판 [러브 액츄얼리]를 노린 듯한 영화는 런던에 대적하기 위해 뉴욕이 가진 강력한 카드를 꺼내 든다. 뉴욕에서 매년 새해를 여는 ‘볼드롭’ 행사다.

 

이미지: 워너브러더스 픽쳐스

 

새해를 맞이하는 카운트다운과 함께 서서히 거대한 조명구가 내려오는 볼드롭은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새해맞이 행사다. 당일 현장 주변에만 백만 명 정도가 모이고, 미국 전역에서 1억 명 정도가 생방송으로 함께 지켜본다. 다만 미국 땅이 넓고 시간대가 나눠진 탓에 현지에서 이를 생방송으로 보고 있다 해도 아직 새해 몇 시간 전인 경우가 발생한다는 점은 함정이다.

 

예전에 로스앤젤레스에 지낼 때, 아직 새해가 오기 3시간 전인 시각에 뉴욕의 새해맞이 행사를 지켜보곤 했는데 카운트다운이 끝나도 아직 새해까지 한참 남은 시계를 쳐다봐야 했다. 그 후 3시간이 지나서야 미서부에도 겨우 새해가 도착하면 그제야 진짜 카운트다운을 다시 하는데, 그때마다 찾아오는 무언가 김 빠진 허탈감을 뉴요커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지금은 뉴욕보다 앞선 보신각 타임존에 들어온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새해에 또 오른다고요? – 소공녀(2017)

 

그런데, 뉴욕보다 빨리, 그것도 전 국민이 함께 보신각 타임존을 누릴 수 있다고 해서 서러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보신각 타종을 멀리서 바라보던 [소공녀]의 미소는 새해 첫날부터 월세와 담뱃값이 오르면서 가계부가 적자의 위기에 빠진다. 얼마 안 되는 지출 중에서도 무엇이든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미소는 소확행을 주는 위스키와 담배를 지키는 대신 집을 포기로 한다. 그때부터 바리바리 싼 살림들을 모두 끌고 잠 잘 곳을 찾아 예전 친구들을 방문하러 다니는 미소의 ‘여행’이 시작된다.

 

이미지: CGV아트하우스

 

왜 이렇게 새해에는 동시에 가격을 인상하는 곳들이 많을까? 연말연시 분위기에 휩쓸린 사람들이 방심하는 순간을 노리는 것일까? 비난을 분산하고자 모두 비밀리에 모여 단합하여 결정하는 것은 아닌지 음모론에 자꾸 손이 간다.

 

[소공녀]에서 명확히 보여주듯 2015년 1월 1일은 특히 흡연가들에게 잔인한 새해 첫날이었다. 새해 첫날부터 비보를 전해 들은 미소가 순간 비명처럼 내뱉은 ‘IC’의 메아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새해에도 출구가 쉽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미소와 함께 깊은 한숨을 쉬어본다. 봄이 오면 하자고 약속했는데, 미소의 겨울은 유난히 춥고 쉽게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연말연시에도 일이라니 – 철도원(1999)

 

새해 첫날에 집에 혼자 있는 것보다 싫은 건, 새해 첫날부터 직장에서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새해 첫날에도 일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새해 첫날에도 쉬지 않는 편의점이나 마트가 대다수고, 많은 사람을 위해 버스나 지하철도 다녀야 하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휴일을 포기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미지: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조이앤클래식

 

홋카이도 어느 외진 시골의 종착역 호로마이 역의 역장 사토(다카쿠라 켄)는 새해 첫날은 물론, 딸을 잃은 날도 아내를 보낸 날에도 끝까지 역을 지켜야 했다. 일만 아는 무정한 남자라고 주변 사람이 비난하고 아내가 섭섭해해도 묵묵히 자기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우리 아버지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라져 가는 역과 기차, 그리고 탄광과 함께 점차 사회 구성원으로서 소용의 가치와 삶의 목적을 잃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참으로 쓸쓸하고 마음이 아프다.

 

다만 (20년 전에는 몰라도) 지금 시점에서 일을 위해 가족을 비롯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토는 불쌍함을 넘어서 다소 우둔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새해 첫날부터 일만 하다가 결국 일터에서 쓰러져 목숨까지 잃은 것을 단지 성실함과 강직함의 관점에서만 볼 수 있을까?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국가나 회사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했던 예전의 긴 시간들이 떠올라 마음을 무겁게 한다. 지난 시절이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 풍경처럼 아름답게만 보일지는 몰라도 그 냉정하고 차가운 본질까지 덮어버릴 수는 없다. 축제를 맞이하는 것 같은 연말연시의 화려하고 들뜬 분위기가 무거운 마음을 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모두 덮어버릴 수 없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