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코믹스 칼럼니스트 김닛코

 

 

영화나 소설, 게임에 푹 빠져서 내가 지금 저 캐릭터였다면, 혹은 아예 저 세계에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쯤은 있지 않을까? 특히 입시나 취업준비 등 팍팍한 현실에 지쳐 있다면, 만화책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설정이 와 닿을지 모른다. 마블에서 탄생한 또 하나의 히어로, ‘그웬풀’이 바로 그런 상상을 실천으로 옮긴 캐릭터다.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친구들이 다 떠난 시골 동네에서 알바를 하며 하루하루 버티고 살아온 그웬이 슈퍼히어로로 거듭나는 이야기는 <인간극장>을 찍어도 될 만큼 드라마틱하다.

 

 

그웬풀의 역사는 스파이더맨 여자친구 그웬 스테이시를 다양한 버전으로 그린 표지 중 하나인 <데드풀의 시크릿 워즈> 두 번째 이슈의 표지가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크리스 버챌로가 그린 데드풀 버전의 그웬 스테이시는 단순히 일회성 표지로 선보였지만, 팬들은 열광했다. 뜨거운 반응을 감지한 마블 코믹스는 실제 캐릭터로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코믹스 역사상 최초의 사례로, 독자의 반응과 요구를 반영해서 성공한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그웬풀은 작가 크리스토퍼 헤이스팅스가 <하워드 더 덕>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등장시킨 후, 데드풀이나 그웬 스테이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설정을 갖추고 단독 시리즈로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지나치게 상업적 처사로 보이는 이런 식의 탄생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낸 독자와 비평가도 있었지만, 잘 만든 캐릭터와 스토리는 이런 비난을 뛰어넘었다. 일본의 만화 팀인 구리히루가 그린 귀여운 작화도 인기를 얻는데 크게 한몫했다. 그웬풀 단독 시리즈의 첫 이슈는 그 달(2016년 4월)의 북미 코믹스 시장 전체에서 5번째로 많은 수익을 거두었다. 마블 코믹스 한정으로만 봐도 4번째이며, <스타워즈> 시리즈를 제외하면 마블 슈퍼히어로물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수익을 올린 셈이다. 한 주에 수많은 출판사에서 수백 종의 이슈를 발매하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이다.

 

 

헤이스팅스는 용병이라는 직업과 제4의 벽(픽션과 현실을 구분 짓는 경계)을 깨는 데드풀의 특징을 채택하고 싶었다고 한다. 때문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방법을 통해 마블 유니버스로 들어간 그웬은 일회용 단역이 아닌 고정적으로 등장하는 메인 캐릭터가 되려고 애를 쓰고, 돈을 벌기 위해 용병이 된다는 설정이 만들어졌다. 데드풀과 쉬헐크처럼 제4의 벽을 깨는 캐릭터는 전부터 있어 왔지만, 그웬풀은 더 특별하다. ‘현실세계’에서 온 그웬풀이 만화책으로 이미 봐 온 마블 캐릭터들의 정체와 특성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웬풀의 강력한 무기이다. 나중에서야 얻는 능력이지만, 그웬은 자신이 등장하는 만화 페이지를 볼 수 있고 칸과 칸 사이를 넘나들어 시간과 공간을 조작할 수 있다. 그만큼 대단한 능력자이면서도 마블 편집부에서 그웬풀 시리즈를 종료시킬까 두려워한다.

 

 

처음엔 유튜브 영상으로 싸우는 기술을 익히고 ‘만화 속 인물’들을 죽이는데 죄책감도 없었다. 중요 캐릭터는 어차피 되살아날 것을 아니까. 하지만 서툴고 충동적인 그웬풀은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빌런이든 히어로든 가리지 않고 주변의 마블 캐릭터들과 우정을 쌓아간다. 그웬풀은 현실에서 하루하루 그럭저럭 지내다가 만화 속으로 들어온 후에야 비로소 삶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시리즈가 연재 종료된다는 것을 알고 이를 막으려고 필사적이 된다. 하지만 그웬풀은 그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고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서 성장한다. 그렇다, 이 시리즈는 성장 만화인 것이다. 그웬풀은 빌런의 지시에 따르는 용병으로 시작해서 슈퍼히어로로 성장한다. 연재 종료 후에는 어벤져스의 멤버(웨스트 코스트 어벤져스)가 되면서 한 단계 더 위로 올라간다.

 

 

그웬풀의 사례는 두 가지 교훈을 준다.
하나는 잘못된 시작을 했더라도 얼마든지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것. 빌런의 부하로 시작한 그웬풀이 노력 끝에 어벤저가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블의 편집부가 그웬풀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히트시켰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