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습적인 역할에서 벗어난 여성 캐릭터의 등장은 반갑다. 마블 첫 여성 히어로 영화 [캡틴 마블]은 여성들의 연대, 자신의 힘과 의지로 각성하는 서사를 그려내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영화 안팎을 둘러싼 부조리한 현실이 자리한다. 여성 영화인과 여성 서사 영화를 갈망하는 목소리는 높아지고 있지만, 올해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를 봤듯이 오랜 시간 쌓아온 유리천장이 굳건히 버티고 있다.
이에 비해 드라마는 영화보다 나은 편이다. 남성보다 여성 캐릭터를 내세운 드라마 제작이 활발하며, 작품에서 여성이 소화하는 직업군도 다양하다. 그래서 찾아봤다. 매혹적인 여성 서사 드라마는 어떤 게 있을까? 내가 즐겁게 본 드라마가 없다 해도 서운해하지 말자. 흥미로운 여성들의 이야기는 영화보다 드라마가 훨씬 찾기 쉽다.

 

 

 

1. 슈퍼걸(Supergirl)
이미지: CWTV

CW의 DC 히어로 드라마 [슈퍼걸]은 슈퍼맨의 사촌 누나이자 크립톤 행성의 또 다른 생존자 슈퍼걸(카라 댄버스)의 활약을 다룬다. 슈퍼맨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닌 슈퍼걸의 매력은 평범한 성장기를 보냈던 카라를 성숙한 히어로로 거듭나게 하는 주변 캐릭터와의 관계다. [슈퍼걸]은 가장 든든한 조력자인 언니 알렉스를 비롯해 솔직하고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배치해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조력자도 빌런도 여성 캐릭터가 주도적인 히어로 서사를 원한다면 [슈퍼걸]을 권한다.

 

 

 

2. 제시카 존스(Jessica Jones)
이미지: 넷플릭스

엄청난 괴력을 지닌 제시카 존스는 정의감 넘치는 다른 히어로들처럼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냉소적인 태도의 근원에는 킬그레이브가 남긴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로 가득하다. 드라마는 깊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부정하며 술에 탐닉하는 제시카가 어두운 과거에 맞서 치열하게 분투하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제시카의 오랜 친구 트리시, 손익계산 철저한 변호사 호가스는 때에 따라 우호적이거나 대립 관계로 돌아서며 흥미로운 긴장감을 형성한다. 안타깝게도 넷플릭스와 디즈니의 결별로 시즌 3을 끝으로 떠난다.

 

 

 

3. 마블러스 미세스 메이슬(The Marvelous Mrs. Maisel)
이미지: 아마존

남녀의 역할 구분이 명확했던 1950년대를 배경으로 평범한 여성이 스탠드업 코미디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미리암 ‘밋지’ 메이슬은 모두가 선망하는 완벽하고 안정된 가정을 꾸려나가는 주부였지만, 비서와 바람난 남편의 외도로 평온했던 삶은 순식간에 흔들린다. 밋지는 이제 우연히 발견한 스탠드업 코미디의 숨은 재능을 실현시키기 위해 온실 같은 안락한 삶에서 벗어나 여성에게 차별적인 사회로 발을 내딛기 시작한다. 2017년 공개된 이후 끊임없이 찬사를 받으며 골든글로브와 에미상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4. 굿 파이트(The Good Fight)
이미지: CBS

[굿 와이프]의 스핀오프 드라마 [굿 파이트]는 다이앤 록하트가 흑인 변호사들이 모인 로펌에서 일하면서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그린다. 열정적이고 능력 있는 변호사 다이앤, 마야, 루카를 중심으로, 현재 미국의 불합리한 현실과 페미니즘의 복합적 지형을 갖가지 사건에 녹여내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캐릭터들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굿 파이트]의 중심에 있는 다이앤 록하트는 단연 발군이다. 이분법적인 시선으로 재단할 수 없는 이 인물은 친밀하면서도 선동적인 모습으로 시청자를 유혹한다.

 

 

 

5. 사브리나의 오싹한 모험(Chilling Adventures of Sabrina)
이미지: 넷플릭스

90년대 [미녀 마법사 사브리나]라는 제목으로 방영됐던 아치 코믹스 원작 드라마는 21세기에 어울리는 진보적 가치관을 입고 새롭게 태어났다. 오컬트와 하이틴 드라마가 흥미롭게 결합된 [사브리나의 오싹한 모험]은 마녀와 인간의 피를 물려받은 사브리나가 열여섯 생일을 맞아 선택의 기로에 놓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사브리나는 불합리한 관습에 얽매이고 순응하는 대신 진취적으로 맞서며 자신만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한다. 오는 4월 본격적으로 마녀의 세계에 들어선 사브리나의 두 번째 이야기가 공개된다.

 

 

 

6. 빨간 머리 앤(Anne with an E)
이미지: 넷플릭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이 섬세하고 사랑스러운 성장 드라마로 탄생했다. [빨간 머리 앤]은 메마른 풍경조차 따스하게 바라보는 상상력 풍부한 소녀 앤이 초록 지붕의 커스버트 남매와 함께 살면서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드라마는 최근의 사회적 이슈와 연결되는 페미니즘에 근간을 두고, 당시의 차별적이고 부당한 현실을 앤의 성장 서사에 설득력 있게 담아낸다. 애니메이션에서 막 튀어나온듯한 싱크로율 높은 캐스팅과 아름다운 자연을 담아낸 빼어난 영상미도 드라마를 보는 즐거움을 배가한다. [빨간 머리 앤]>은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2018년 중독성 강한 드라마 리스트에 올랐으며, 올해 세 번째 시즌이 공개된다.

 

 

 

7. 킬링 이브(Killing Eve)
이미지: BBC America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와 이를 쫓는 집요한 요원의 이야기는 새롭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킬링 이브]가 성공할 수 있던 건 ‘성전복’ 때문이다. 그동안 주로 남성이 연기했던 캐릭터를 여성 배우가 소화하면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색다르고 신선한 재미가 탄생했다. 산드라 오와 조디 코머의 능청스러운 연기도 예측을 벗어난 변덕스러운 전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여기에 루크 제닝스의 소설을 더욱 매력적인 드라마로 개발한 피비 월러 브릿지의 숨은 노고도 빼놓을 수 없다. 오는 4월 공개되는 시즌 2에서 두 여자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8. 굿 걸스(Good Girls)
이미지: NBC

범죄와 무관한 평범한 엄마들이 당장 필요한 돈을 마련하고자 마트 강도로 나선다. 그런데 하필 그들이 훔친 돈이 갱단의 불법자금이다. [굿 걸스]는 평범한 세 여성이 범죄조직과 얽히면서 가족을 위해 희생했던 억눌린 욕망을 깨닫고 더욱 대담하고 거침없이 변화하는 이야기를 유쾌한 ‘드라메디’로 담아낸다. 드라마는 세 여성이 처한 상황을 현실적으로 묘사하며 갈수록 과감해지는 변화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비열한 남성들을 응징하는 모습을 통쾌하게 그려내면서 격한 공감을 부른다. 최근 두 번째 시즌이 시작됐다.

 

 

 

9. 남부의 여왕(Queen of the South)
이미지: USANetwork

[남부의 여왕]은 위험한 마약 카르텔의 세계에 뛰어든 여성의 이야기다.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테레사 멘도자가 연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조직과 경쟁 관계인 조직에 들어선 뒤 범죄 세계의 거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다. 테레사가 점차 현실에 눈을 뜨고 성장하기까지, 독특한 공생관계를 이루는 카밀라의 존재감은 주인공만큼이나 강렬하며 프레임에 들어선 순간 저절로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된다. 생존과 복수를 위해 범죄 세계를 택한 테레사와 달리 카밀라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표출하고 대등하고 독립적인 관계로 서기 위해 더욱 차갑고 냉정하게 탐욕을 실현한다. 폭력의 세계에 들어서 욕망을 실현해가는 여성의 이야기는 그동안 남성이 주도했던 범죄물과 다른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10. 블렛츨리 서클(The Bletchley Circle)
이미지: ITV

오래전 비밀 정보기관에서 일했던 네 여성이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건 해결에 나선다. 과거의 경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밀리, 진, 루시, 수잔은 연쇄살인범의 희생자가 된 여성을 위해, 무고한 죄를 뒤집어쓴 여성을 위해, 인신매매당하는 여성을 위해 연대의 힘으로 의기투합한다. [블렛츨리 서클]은 여성의 역할이 제한적이던 시절 평범한 네 여성이 갖은 역경과 위기에도 사건의 단서를 추적하고 진실에 다가서는 이야기를 다룬다. 시대적 배경 탓에 답답할 순간도 있지만, 그들과 같은 또 다른 여성을 위해 난관에 봉착한 사건을 풀어가는 이야기는 공감이 되면서도 가벼운 추리극을 보듯 흥미진진하다.

 

 

 

11. 핸드메이즈 테일(The Handmaid’s Tale)
이미지: 훌루

2016년 11월 설마 하던 그 일이 현실이 되고, 2017년 본격적인 트럼트 시대가 열린 그해 4월, 훌루에서 선보인 [핸드메이즈 테일]은 공개와 동시에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1985년 쓴 소설을 원작으로 했음에도 드라마 속 가상의 이야기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현실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기독교 가치관이 지배하고 모든 것이 통제된 사회에서 소수의 남성이 권력을 쥔 채 여성은 억압받고 착취당한다. 주인공 오프레드는 이름과 가족, 인간적인 권리 모든 것을 잃은 채 사령관 집의 시녀가 되어 출산의 임무를 떠안는다. 편안하게 감상하기 힘든 무시무시한 내용임에도 억압받는 여성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궁금해서 계속해서 보게 된다. 오는 6월 공개될 세 번째 시즌은 논란이 분분했던 시즌 2 결말의 아쉬움을 어떻게 해소할지 궁금하다.

 

 

 

12. 퓨드(Feud)
이미지: FX

1930년대 할리우드를 주름잡았던 베티 데이비스와 조안 크로포드의 유명한 불화를 다룬다. 당시 전성기를 지나 하락세로 접어든 두 배우는 조안 크로포드의 제안으로 [제인의 말로(What Ever Happened To Baby Jane?, 1962)]라는 스릴러 영화의 공동 주연으로 나섰다. 라이언 머피가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퓨드]는 여성 배우의 역할이 제한적이었던 할리우드 시스템과 홍보를 위해 배우들의 신경전을 조장하고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풍토를 비추며 점점 불화가 깊어지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제시카 랭과 수잔 서랜든이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려는 두 배우로 나섰고, 스탠리 투치와 캐서린 제타 존스, 케시 베이츠가 제작사와 동료 배우로 출연했다.

 

 

 

13. 포즈(Pose)
이미지: FX

[포즈]는 드물게 트랜스젠더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80년 후반 뉴욕의 LGBTQ 커뮤니티가 주축이 되어 패션 경쟁을 펼쳤던 독특한 문화를 소재로, 자신만의 욕망과 꿈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당시 성 소수자의 삶을 위협하던 에이즈의 공포와 왜곡되고 억압적인 현실을 드라마틱하게 풀어내고, 화려한 무도회 문화를 관능적으로 재현해 낯설고 황홀한 볼거리도 선사한다.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은 트랜스젠더 블랑카를 중심으로 삶에 대한 열정을 놓치지 않는 이들의 이야기는 어느 누구보다 마음을 뒤흔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