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빈상자
미국 드라마(이하 ‘미드’)의 첫 방송을 의미하는 ‘파일럿(pilot)’은 조종사의 역할이 그렇듯 무언가를 주도하고 끌고 간다는 의미를 지닌다. 텔레비전 이전에 라디오 시대부터 첫 회를 뜻하던 파일럿은 기본적으로 방송 프로그램의 시작이자 시청자의 첫 심판을 받는 회이지만, 방송사와 제작사에게는 훨씬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복잡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결과물이다.
일반적으로는 매년 방송사는 제작사로부터 5백여 편의 새 프로그램 아이디어를 제안받고, 그중 대략 70여 편의 프로그램 대본을 요청한다. 그러면 방송사는 대본을 검토한 뒤 다시 20편 정도를 선정해 파일럿을 ‘주문’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파일럿은 책임프로듀서들, 때론 제한된 상영을 거쳐 최종적으로 4~8편 정도의 프로그램만 시즌 제작이 결정된다. 드라마의 시즌이 확정되면 파일럿은 그대로 방송되거나 혹은 대본을 수정하고 배우를 다시 캐스팅해서 재촬영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이렇게 여러 과정을 거쳐 어렵게 방송을 시작하면, 파일럿을 본 시청자의 반응에 따라 새로운 결정이 내려지기도 하고, 때로는 첫 방송 뒤 사라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해도 광고를 집중한 파일럿으로 최고의 시청률을 달성하는 경우가 많은 상황에서 파일럿을 망친 드라마가 그 이후의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청자의 입장에서도 파일럿은 계속해서 볼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제작 및 방송 환경이 변화하고 스트리밍 서비스가 부상하면서 봐야 할 미드가 수두룩한 요즘에는 파일럿에 대한 시청자의 평가도 더욱 매서워지고 있다. 어떤 미드는 파일럿만 보고 그대로 잊어버리거나 때론 보던 중간에 꺼버리기도 한다.
반대로 파일럿이 좋거나 인상적인 드라마는 호기심이나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게 되는데, 명작을 만나는 과정이 대체로 이렇게 시작한다. 21세기 들어 가장 기억에 남은 미드 파일럿을 모아 놓고 보니 모두 하나같이 명작이다. 명작이라 파일럿도 그러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잘 만든 파일럿이 아니었다면 시청자의 무관심 속에 묻혔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끝이 안 좋은 명작은 있어도 시작이 나쁜 명작은 없다. (*미드 제목, 방송사, 파일럿 제목 순)
1. 왕좌의 게임 – ‘겨울이 오고 있다’

이제 마지막 시즌을 남겨 둔 대히트작이자 명작 중의 명작 [왕좌의 게임]. 그런데 [왕좌의 게임]이 실패했을 수도 있었다면? 적어도 지금에야 그것을 상상하긴 어렵지만 두 기획자 데이비드 베니오프와 D. B. 와이스에 따르면, 파일럿을 다시 촬영하지 않았다면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 수 있었다.
우리가 본 파일럿은 90퍼센트를 다시 촬영한 결과물이다. 지금까지도 공개된 적 없는 최초의 파일럿은 베니오프와 와이스 스스로가 ‘쓰레기’라고 말할 정도였다. 첫 파일럿 제작에 이미 많은 예산을 썼지만, 결국 재촬영을 결정했는데 그만큼 파일럿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대본이 대폭 수정된 것은 물론 대러리스와 캐틀린도 다시 캐스팅되었다.
[왕좌의 게임]에서 웨스테로스 대륙은 넓고 등장인물들이 많은 탓에 모두가 오랫동안 뿔뿔이 흩어져 있어야만 했다. 그만큼 이들 하나하나를 잘 소개하고 플롯의 구심점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했는데 파일럿은 그 역할을 충실히 했다. 이를 위해 [왕좌의 게임]의 인물들이 가장 촘촘히 모이고 골고루 배분되었던 회가 파일럿이다.
플롯과 대립의 중심인 스타크가와 바라테온가를 포함한 대부분의 주요 인물들이 파일럿에서 소개된다. 이 한 편에서 엿볼 수 있는 여러 인물들의 성격과 성향은 나중에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하고, 플롯의 방향을 잡는 중요한 역할도 한다. 한편, 점차 능동적이고 강인한 인물로 거듭나는 대러니스와 산사가 파일럿에서는 상당히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전형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며 출발하는 것도 나중의 변화를 염두해 둔 큰 그림이었다.
[왕좌의 게임]처럼 회수가 거듭될수록 꾸준히 시청자 수가 증가하면서 파일럿의 시청률 아래로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드라마도 드물다. 하지만, 그것도 쓰레기 파일럿을 방치했다면 불가능했을 수 있다.
2. 하우스 오브 카드 – ‘제 1장’

[하우스 오브 카드]의 파일럿은 두 가지 의미에서 막중한 책임이 있었다. 하나는 [하우스 오브 카드]를 성공시켜야 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넷플릭스 최초의 오리지널 콘텐츠로 성공적인 첫 발을 디뎌야만 했다. DVD 대여에서 스트리밍 서비스 중심으로 완벽하게 변화하기 위해서는 자체 콘텐츠가 중요했는데, 그 모든 무게가 [하우스 오브 카드]에 파일럿에 실렸다.
영국 원작의 판권을 구입한 제작사와 드라마화를 구상한 데이빗 핀처는 HBO, 쇼타임, AMC 등의 회사와 협상을 했지만, 결국 넷플릭스와 손을 잡았다. 다른 모든 회사들이 파일럿만 먼저 보고 싶다고 말한 반면, 넷플릭스는 한꺼번에 26편, 두 개의 시즌을 만들기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데이빗 핀처 연출에 케빈 스페이시 주연이라고 해도 기존 방송사들은 생각할 수 없는 과감한 결정이었다.
[하우스 오브 카드]의 파일럿은 다양한 측면에서 시청자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아무리 안티 히어로의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프랜시스 언더우드(케빈 스페이시)는 너무 빌런스러운 주인공이다. 프랭크의 냉혹함은 파일럿의 짧은 첫 에피소드에 함축되어있다. 프랭크는 쓸모없는 것들은 참을 수 없다고 말하며, 직접 차에 치여 누워 있는 개의 숨통을 끊어버린다. 더욱이 프랭크는 시청자의 눈을 직접 바라보며 말하는데, 이렇게 제4의 벽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극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한편, 왠지 멀리하고 싶은 주인공으로부터 시청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묶어둔다.
파일럿에서 프랭크는 새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고 국무장관 자리가 물 건너가며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다. 하지만 치밀한 계산과 거래를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흐름을 바꾸며 마무리되는 파일럿은 그 자체로 [하우스 오브 카드]의 전체를 담은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로서 [하우스 오브 카드]는 물론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콘텐츠의 화려한 출발이 시작되었다. 그만큼 최근 이 모든 것에 흠집을 낸 케빈 스페이스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3. 브레이킹 배드 – ‘파일럿’

[브레이킹 배드]의 파일럿도 [하우스 오브 카드]의 그것 마냥 독립된 단편으로 손색없을 정도로 잘 짜인 플롯 구조와 깔끔한 마무리를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심심한 도시인 뉴멕시코 앨버커키에서 가장 재미없는 과목인 화학을 가르치는 교사 월터 화이트(브라이언 크랜스톤)는 가장 못생긴 자동차 아즈텍을 몰며 가장 지루한 듯한 삶을 살아간다. 교사 일로도 모자라 세차장에서 자존심을 구기며 알바를 하고 가족들의 응원과 사랑도 이어지지만, 빠듯한 살림과 무기력한 삶을 일으키기엔 역부족이다.
그런데 50세 생일을 맞이한 월터는 폐암 선고를 받고 길어야 몇 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는다. 위기는 오히려 기회일까. 그는 결국 결심한다. 지루하고 무기력한 삶에 변화를 주기로, 남자로서 그리고 가장으로서의 자존심과 기력을 되찾기로, 그러기 위해서 마약왕이 되기로.
파일럿은 [브레이킹 배드]의 핵심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마약왕으로서의 흥망성쇠가 아닌) ‘중년의 위기를 맞이한 아버지들에게 보내는 위로’다. 마약왕은 갱년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는 좀 파격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중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그 정도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조언처럼 들린다.
마약왕이 되는 월터가 결국 중년의 위기를 극복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것 같다. 하지만 가장 지루하고 무기력한 삶을 살았던 그는 파일럿을 전환점으로 가장 극적인 삶을 살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파일럿은 월터 화이트가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었던 시기를 아주 충실하게 담아낸다.
4. 홈랜드 – ‘파일럿’

알카에다에 포로로 잡힌 지 8년 만에 돌아온 미군 브로디(데미안 루이스)는 구출과 동시에 영웅으로 칭송받지만, 박수받기가 무섭게 CIA 요원 캐리 매티슨(클레어 데인즈)은 그가 변절한 테러리스트라는 의심을 시작한다. 문제는 시청자가 브로디를 의심하는 것만큼 캐리도 신뢰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파일럿에서 캐리의 ‘문제’는 곳곳에서 드러나며, 이는 앞으로 [홈랜드] 모든 시즌 내내 캐리와 시청자를 괴롭힌다. 국장이 주도하는 CIA 전체 회의에 가장 늦게 나타나 가장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캐리는 처음부터 아싸(아웃사이더)의 향기를 진하게 낸다. 분명 CIA 요원인 건 맞지만, 시스템을 활용하고 동료와 일하기보다 아웃소싱을 하고 편법과 불법을 동원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데 익숙해 보인다. 웬일인지 주변인들이 캐리의 욱하는 성질에 대한 지적을 많이 하는가 싶더니, 캐리는 (클레어 데인즈의 필살기인) 턱울음과 놀란 눈을 오가는 심한 감정 기복을 보이고, 결국 향정신병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얼핏 테러에 대한 미국인들의 과도한 집착과 과민반응을 상징하는 듯한 캐리의 모습은 나중에 플롯의 변화에 따라 같이 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캐리에겐 9.11 테러 이후 테러리스트 타도라는 보수주의의 지상목표와 오바마 시대의 출발로 정점에 다다랐던 진보적인 가치의 혼재로 빚어진 미국인의 혼란과 갈등이 압축되어 있다. 그러한 혼란과 갈등은 전체 시즌 내내 이어지는데, [홈랜드]는 파일럿부터 캐리를 통해 이를 명확히 했다.
5. 나르코스 – ‘심연’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남미는 물론 미국에서도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악명은 여전히 높다. 이와 같이 유명한 실존 인물을 극화한 드라마에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허구인지 일 것이다. [나르코스]는 그런 시청자들의 물음에 답을 해주듯 (비록 실화에 영감을 얻었을 뿐이라고 안전장치를 걸고 시작하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에 더 많은 힘을 주고 있다는 주장을 여러 가지 장치를 동원해 설득해간다.
우선 [나르코스]는 뉴스 등 실제 자료화면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오프닝 크레딧부터 실제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사진 등 자료화면으로 가득하다. 칠레에서 콜롬비아로 코카인 생산지가 이동한 정치적 배경과 이에 대응하는 미국의 움직임, 그리고 코카인의 소비지로 부상한 당시 마이애미 실상에 대한 설명이 닉슨과 레이건 대통령까지 등장하는 뉴스 자료화면 등을 통해 보여준다. 어느 순간 드라마가 아닌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나르코스]는 명목상으로는 두 명의 미국 DEA 요원이 주인공이지만, 실제 플롯은 거의 대부분 콜롬비아를 무대로 에스코바르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때문에 대사의 대부분은 스페인어인데, 이것이 어색할 미국 시청자를 위해 DEA 요원이 설명하는 내레이션을 더한다. 내레이션 또한 드라마가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는데 큰 역할을 한다. 자료화면과 내레이션 덕분에 7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실제로는 10년 넘게 걸친 역사와 사건, 인과관계가 파일럿 단 한편으로 깔끔하게 정리되고 설명된다.
6. 워킹 데드 – ‘사라지다’

[워킹 데드] 파일럿이 시작하면 이미 세상은 종말이 온 듯 황폐하고 릭 그라임스(앤드류 링컨) 혼자서 폐허 사이를 걸어간다. 그런데 인형을 들고 가는 어린아이의 머리에 총알을 박는 릭(‘미스트’의 프랭크 다라본트가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궁금할 때쯤, 드라마는 종말이 오기 전인 몇 주전으로 돌아간다.
종말 전, 잠시 평화로운가 싶더니 릭은 병원에 입원하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 꽃은 이미 시들었고 큰 병원에는 아무도 없다. 원래 병원이 그렇게 즐거운 곳은 아니지만, 종말 이후 어질러지고 시체들이 늘어선 텅 빈 병원만큼 음산한 곳은 없다. 그런 병원 안을 릭이 혼자서 한참을 서성이는 모습은 이후로 [워킹 데드]를 계속 이끌고 갈 긴장감과 끔찍한 현실을 예고하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병원 장면만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시작부터 아이에게 총질을 하는 드라마는 기존의 좀비 분장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특수효과와 CG 모두를 동원해 얼굴과 머리를 날리고 뼈와 장기를 드러낸다. 기어코 하체를 잃은 채 상체만을 끌고 가는 좀비까지 등장한다. 그동안 TV에서 보기 힘들었던 장면을 한꺼번에 쏟아내며 시청자들에게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선언하는 것만 같다. 그나마 희망을 갖게 된 것은 마지막을 농담으로 끌어올린 글렌(스티븐 연)의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7. 빅 리틀 라이즈 – ‘누군가 죽었다’

니콜 키드먼, 리즈 위더스푼, 로라 던 출연에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과 [와일드]의 장 마크 발레 감독이 전편을 연출했는데, 이 드라마가 실패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명배우들과 연출진이 모인 만큼 더 세심하게 만든 드라마는 시즌 전체를 끌고 가는 구조를 파일럿부터 안착시키며 이름값을 한다.
[워킹 데드]와 [브레이킹 배드]처럼 [빅 리틀 라이즈]도 나중에 일어날 일을 시청자에게 제일 먼저 던져주고 호기심을 유발한 다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을 택한다. 다만 [빅 리틀 라이즈]는 이 구조를 시즌 마지막까지 지속하며 누가 죽고 죽였는지를 감춘 채 나아간다.
파일럿은 샌프란시스코 교외의 부촌 몬터레이의 한 유치원, 모든 학부모들이 모인 이벤트에서 누군가 죽고 이미 경찰이 와있는 상황에서 시작한다. 다시 돌아간 과거 시점은 각각 다른 이야기와 성향을 가진 매들린(리즈 위더스푼), 셀레스트(니콜 키드먼), 레나타(로라 던), 그리고 제인이 한 자리에 모인 개학 첫날이다.
그들의 그림 같은 집과 부유한 생활에 빠져들 때쯤이면 드라마는 형사들이 학부모들을 면담하는 현재로 틈틈이 돌아와 긴장을 풀지 못하도록 한다. 하지만,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이 완벽해 보이는 이들의 삶 속에서도 균열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비밀이 많아 보이는 셀레스트와 제인의 불안한 밤과 불온전한 기억을 내비치며 파일럿은 끝난다.
도대체 누가 죽는다는 걸까, 누가 죽이는 걸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빅 리틀 라이즈] 전체 드라마가 그렇듯 파일럿 자체가 미스터리 투성이다. 파일럿을 보고 불 꺼진 방에서 잠들기 전 머릿속에서 궁금한 점들을 나열하다 보면 정확히 파일럿이 의도한 대로 됐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