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는 올해로 세 번째다. 앞서 두 번을 1박 2일로 짧게 다녀와 아쉬웠기에, 이번엔 하루 더 늘려 2박 3일 동안 영화 8편을 감상했다. 다음 상영작을 보기 위해 바쁘게 이동하고, 작년보다 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정신없고 비루한 체력도 실감했지만, 그래도 영화제에 간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해외에서 먼저 화제가 됐거나 평소 접하기 힘든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흥분이 비록 체력적으로는 고될지라도 빡센 영화제 투어에 기꺼이 몸을 내던지게 한다.

 

짧은 일정상 부지런히 영화를 보는데 바빠 영화제 프로그램을 알차게 즐기지 못해 아쉬움도 남지만, 오며 가며 [120BPM]의 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를 보았던 건 생각지 못한 수확이다.(올해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다) 다만, 정신이 없어서 사인 요청하지 못했던 게 두고두고 후회로 남지만. 어쨌든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관람한 8편의 후기를 적당히 길거나 짧은 형식으로 소개한다.

 

 

  1. 퀸 오브 하츠(Queen of Hearts)

이미지: 전주국제영화제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이 의붓아들과 금기된 관계에 빠진다. 시놉시스만 보면 불편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자극적인 막장 드라마가 그려지지만, [퀸 오브 하츠]는 관객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영화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금기된 관계를 매혹적으로 포장했던 기존 영화와 거리를 두고 냉철하고 현실적인 시선으로 관계의 부도덕한 민낯을 파헤친다.

 

[퀸 오브 하츠]는 풍요롭고 안락한 삶을 영유하는 안네가 남편 페테르가 첫 번째 결혼생활에서 얻은 10대 아들 구스타우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후 은밀한 욕망에 휩싸이는 이야기를 다룬다. 어느 하나 부족할 게 없는 완벽한 일상에서 권태로움을 느끼던 안네는 남편의 문제아 아들 구스타우에게 위험한 호기심이 발동한다. 안팎으로 자신만의 권력을 가진 여성이 순진하면서도 무모한 10대를 유혹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일찍 이혼한 부모에게 애정결핍을 느꼈던 구스타우는 친밀하게 다가오는 안네에게 불가항력적으로 빠져든다.

 

영화의 진짜 이야기는 두 사람의 불같은 관계가 일상에 균열을 초래하면서 시작한다.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만남은 구스타우의 영역에 불쑥 침범했던 안네가 차갑게 돌변하면서 순식간에 파국을 맞이한다. 안네는 근래 들어 가장 논쟁을 야기하는 인물이다. 금기된 욕망이 완벽한 삶을 파탄낼 조짐을 보였을 때, 안네는 극도의 이기심으로 가차 없이 행동한다. 이 위험한 권력자는 사회적 지위와 직업적 이점을 이용해 연약하고 위태로운 구스타우의 삶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메이 엘-투키 감독은 여성의 시선에서 위태로운 관계가 몰고 온 파국을 대담하고 강렬한 드라마로 직조해간다. 노골적이지만 결코 선정적이지 않으며, 조용하게 흘러가면서도 단단한 몰입감을 형성한다. 덴마크의 국민 배우 트리네 뒤르홀름의 사실적인 연기는 소름 끼칠 정도다. 위험한 욕망과 비열한 이기심이 충돌하는 안네의 이중성을 과감하면서도 섬세한 연기로 압도한다.

한편,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변호사 안네의 두 얼굴은 북유럽 부르주아의 위선을 빗대는 은유로 읽히기도 한다. 뒤틀린 욕망과 위선, 이기심, 지배욕, 죄의식이 복잡하게 얽혀 마지막 순간까지 묵직하게 내려친다.

 

 

 

  2. 신의 은총으로(By the Grace of God)

이미지: 전주국제영화제

[신의 은총으로]는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작품 중 독특한 선상에 위치한다. 특유의 도발적인 관능성을 배제하고, 철저히 현실을 반영해 고발적인 성격이 뚜렷한 영화로 완성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도 진행 중인 프랑스 가톨릭 내 아동 성폭력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신의 은총으로]는 성인이 된 생존자들이 어린 시절 그들에게 성폭력을 행했던 프레나 신부를 세상에 알리고 고발하는 과정을 다룬다.

 

[스포트라이트]의 프랑스 버전으로 알려진 영화는 외부인이 아닌 생존자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각 생존자들은 릴레이를 하듯이 그들이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열정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는지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알렉상드르, 프랑수아, 질, 극을 이끌어가는 중심적인 세 인물은 저마다 체감하는 고통과 살아가는 모습은 달라도 ‘분노’라는 공통된 감정을 나눈다. 30여 년 전 자신들을 성적으로 유린했던 프레나 신부가 여전히 아이들을 담당한다는 사실에 마침내 세상에 목소리를 내기로 결심한다.

 

소재는 무겁지만, 전반적인 호흡은 간결하고 담담하다. 경쾌한 속도감을 내는 게 아닌데도 각각의 이야기가 유려하게 맞물린다. 그러면서도 필요할 때는 분명하게 분노를 드러내고, 당시의 고통이 생존자뿐 아니라 가족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알렉상드르가 포문을 터뜨린 이후 제2, 제3의 피해자가 나타나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가톨릭 교구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종 감독은 에두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가톨릭 교구를 비판한다. [신의 은총으로]라는 영화의 제목이 바르바랭 추기경이 발언한 “신의 은총으로 프레나 신부 사건의 공소시효가 지났다”에서 착안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신의 은총으로]를 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면, 넷플릭스에서 [성역의 범죄]를 보는 것도 좋다. 3부작 다큐멘터리로, 스페인 가톨릭 교구에서 발생한 아동 성폭력을 다룬다. 어른이 된 생존자를 중심으로 한 구성 방식이 오종 감독의 영화와 비슷하다.

 

 

  3. 로이 앤더슨: 인간 존재의 전시

이미지: 전주국제영화제

로이 앤더슨 작품은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거둔 뜻밖의 성과다. 영화제 홈페이지에 ‘스웨덴을 대변하는 거장이지만 국내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감독’으로 소개됐듯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감독이 누군지 잘 알지 못했다. 내가 본 로이 앤더슨 감독의 작품은 [자전거를 가져오다], [영광의 세계], [10월 5일 토요일] 세 편의 단편영화다. 카메라는 감정적인 개입 없이 관찰자의 시선으로 인간관계와 사회가 만들어내는 풍경을 차분하게 묘사한다.

 

먼저 [영광의 세계]는 시작부터 강렬한 스타일로 시선을 끈다. 시작하자마자 고통스러운 표정의 발가벗은 사람들과 점잖게 옷을 빼입고 구경하는 무심한 관중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트럭은 나체의 사람들을 트럭 짐칸에 가두고 배기관과 트럭 내부를 연결한 뒤 공터를 빙글빙글 돈다. 이 참혹한 광경에도 구경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갇힌 사람들이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챙긴다. 창백한 얼굴의 남성이 숨이 콱 막힐듯한 충격을 뚫고 관객을 응시한다. [영광의 세계]는 창백한 남성을 화제로 내세워 기묘한 분위기가 가득한 짧은 영상을 연작 형식으로 내보인다. 간결하고 실험적인 영상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현대인의 공허한 삶을 말하는듯하다.

 

[자전거를 가져오다]와 [10월 5일 토요일]은 젊은 연인의 일상을 관찰한다. [자전거를 가져오다]는 아침을 맞이한 연인 사이에 오가는 미묘하게 다른 감정의 흐름을 포착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장난을 치며 나름의 사랑스러운 아침을 보내고 싶지만, 무심한 남자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렇다고 젊은 연인의 관계가 심각하게 틀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늘 그렇듯 변함없는 아침을 보낸다.

 

[10월 5일 토요일]은 좀 더 확장된 버전의 영화다. 젊은 남성을 화제로 내세워 여느 때와 같은 주말을 보내는 평범한 연인의 하루를 관찰한다. 다만 남성 화자가 이렇다 할 인생의 목표가 없는 무기력한 청춘이라는 데서 전하는 느낌은 달라진다. 영화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건설 노동자로 살아가는 주인공이 처한 현실이 그리 녹록지 않음을 암시한다. 사무직에서 빵집 점원이 된 여자친구도 마찬가지다. 크게 내세우며 강조하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함이 언뜻언뜻 스쳐 지나간다.

 

 

  4. 로호(Rojo)

이미지: 전주국제영화제

개인적으로 국내에서 정식 개봉을 바랄 만큼 레트로풍의 세련된 연출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1970년대 중반 아르헨티나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명망 있는 지역 변호사와 이방인의 갈등이 빚어낸 기묘한 풍경을 그린다. 겉으로는 범죄 스릴러의 긴장과 재미를 추구하면서, 비판적인 시각을 덧입혀 군부독재 시대의 불합리함을 담아냈다. 그 시절의 분위기를 꼼꼼하게 재현한 미장센, 긴장감을 연출하는 강렬한 사운드 디자인, 스타일리시한 영상미가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5. 폴 상셰즈가 돌아왔다(Paul Sanchez is back!)

이미지: 전주국제영화제

일종의 우화 같은 범죄 코미디. 젊은 여성 경찰 마리아가 오래전 자취를 감춘 살인범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모습을 따라가며, 우매한 본성과 계급화된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묘사한다. 과잉된 감정으로 움직이는 인물들의 모습에 거부감이 들면서도 극단적인 풍경이 남기는 여운은 묘하게 씁쓸하다.

 

 

 

  6. 하나레이 베이(Hanalei Bay)

이미지: 전주국제영화제

[화장실의 피에타]란 작품으로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았던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을 영화화한 작품. 내겐 리메이크 드라마 [콜드케이스 ~진실의 문~]으로 친숙한 요시다 요가 주인공으로 등장해 반가웠던 작품이다. 오는 6월 6일 개봉을 앞둔 [하나레이 베이]는 요시다 요로 시작해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들을 잃은 주인공 사치 역을 맡아 절제된 내면 연기로 상실의 슬픔과 고독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한 여인이 내면의 슬픔을 극복하기까지 여정은 상업영화의 문법과 거리가 멀지만, 요시다 요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정적인 이입이 된다.

 

 

 

  7. 가라앉는 가족(A Family Submerged)

이미지: 전주국제영화제

가까운 가족을 잃은 여성의 슬픔과 방황을 신비롭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더해 독특하게 그려낸다. 마르셀라는 언니 리나를 잃고 감정적인 공백이 생기지만, 가족들을 챙겨야 하는 하루는 조금의 변화도 없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공간을 갖지 못한 채 변함없는 하루를 보내던 마르셀라에게 딸의 지인 나초가 친절을 베푼다. 낯선 청년과의 묘한 교류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하게 겹치며 마르셀라의 감정적 여정을 쫓는다. 단, 상업적인 재미가 충분한 영화가 아닌 데다 독특하게 흘러가는 부분이 많아서 많은 관객들을 졸게 했던 기억;;

 

 

 

  8. 애틀란틱 시티(Atlantic City)

이미지: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독립영화 특유의 하이퍼 리얼리즘에 충실한 영화. 무거운 내용을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관람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끝을 모르고 궁지로 몰리는 어두운 현실 묘사는 차지하고라도 낯선 도시를 부유하는 주인공의 자기연민에 빠진 감성적 내레이션이 영화적 몰입을 방해한다. 덕분에 분위기는 더욱 올드해지고, 대학시절 봤던 독립영화를 보는 기분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