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빈상자

 

 

1940~50년대 할리우드는 수많은 서부영화를 양산하며, 한참 영웅들의 무용담에 빠져 정의감에 도취됐었다. 그러다 1960년대 들어서는 시대 변화와 함께 피로도가 증가하면서 영웅들의 ‘약빨’도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그때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미국을 벗어난 영화는 서부영화의 장르 안에서 기존 할리우드의 관습을 비틀어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점차 미국 관객에게도 호응을 얻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로 대표되는 캐릭터 ‘안티히어로’가 있었다.

 

마블의 슈퍼히어로들이 스크린과 텔레비전을 장악하면서 소외되는 관객들과 장르의 수명을 걱정하던 사람들은 슈퍼히어로 콘텐츠가 필연적으로 다양해지고 곧 안티히어로가 대거 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같은 마블 출신이면서도 -적어도 지금까지는-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끼지 못했던 [데드풀]이 스크린에서 안티히어로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가장 과감한 시도와 극단적인 변화는 최근 아마존의 드라마 [더 보이즈]에서 이뤄졌다.

 

이미지: 아마존 ‘더 보이즈’의 세븐

[더 보이즈]에는 마치 ‘저스티스 리그’를 연상시키는 슈퍼히어로의 결집 ‘세븐’을 중심으로 익숙해 보이는 캐릭터가 대거 등장한다. 파일럿에서 초인적인 능력으로 강도들을 단숨에 제압하는 모습도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슈퍼히어로 모습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정의로운 슈퍼히어로의 가면을 썼을 뿐, 사악하고 잔인하며 변태이기도 한 초능력자들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들은 올곧은 모습을 조금 벗어난 안티히어로가 아닌 악행을 일삼는 빌런이었다.

 

드라마 [더 보이즈]는 북아일랜드 출신의 미국 작가 가스 에니스(Garth Ennis)의 동명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다. 상당 부분 원작 코믹스에 충실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차이를 나타낸다. 보통은 원작에 충실한 만큼 점수를 주고 싶기 마련이지만, 솔직히 [더 보이즈]의 경우는 확실히 원작과 달라서 다행이라고 여긴 부분이 더 많다. 드라마 버전의 수위나 이야기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시청자도 많겠지만, 그 무엇을 상상해도 더 더럽고 더 잔인하며 더 충격적인 내용이 코믹스에 훨씬 많다. 차마 거론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을 제외한, 드라마 [더 보이즈]와 코믹스 『더 보이즈』를 비교해본다.

 

 

*** 이 글은 드라마 <더 보이즈>와 코믹스 『더 보이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DC의 슈퍼히어로를 저격하다

드라마와 코믹스의 공통점을 먼저 살펴보면 ‘세븐’의 슈퍼히어로가 DC의 유명한 슈퍼히어로를 확연히 닮았다는 게 눈에 띈다. 홈랜더는 슈퍼맨, 퀸 메이브는 원더우먼, 딥은 아쿠아맨, 에이-트레인은 플래시를 쉽게 연상시킨다. 코믹스에서 드라마로 옮겨 가면서 의상에 변화가 생기고 인종이 바뀌기도 하지만, DC 슈퍼히어로들을 닮은 유사성은 그대로 유지한다.

 

이미지: 아마존 ‘더 보이즈’의 퀸 메이브와 홈랜더

어설픈 짝퉁처럼 보이는 유사성은 사실은 유명한 슈퍼히어로를 직격으로 저격해서 히어로에 대한 기존 관점을 보란 듯이 뒤틀고 완전히 전복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전혀 새로운 슈퍼히어로들을 등장시켜 둥글게 비판한 것도 아니고 DC의 슈퍼히어로들을 닮은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폭력과 성적인 내용의 수위가 높은 코믹스는 DC를 불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바지를 내린 슈퍼맨을 상상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2006년 처음에 『더 보이즈』의 연재를 시작한 와일드스톰은 DC코믹스의 임프린트 출판사였기에 DC의 이름을 걸고 출판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DC코믹스는 결국 6권 만에 연재를 중단했고, 이후의 출판 계획도 모두 취소했다. 다행이라면 DC코믹스는 콘텐츠의 앞길까지는 막지 않아서, 『더 보이즈』는 새로운 출판사 다이너마이트 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해서 2012년에 마무리할 때까지 연재를 이어갔다.

 

 

모두가 인간이에요

드라마 [더 보이즈]의 쇼러너 에릭 크립키(Eric Kripke)는 인터뷰에서 코믹스보다 현실성의 무게감을 늘리기 위해 상당히 많은 것을 바꾸었다고 말했다. 마법과 같은 요소는 ‘콤파운드 V’로 한정했으며, “신화에서 비롯된 신이나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은 없다고 못 박았다. 이 때문에 코믹스에선 원래 ‘세븐’의 멤버였던 외계인 ‘잭 프롬 주피터’가 드라마에선 투명인간으로 대체되었다.

현실성을 고려하면서 드라마 [더 보이즈]의 슈퍼히어로는 코믹스와 달리 기본적으로 모두 인간이다. 슈퍼맨을 닮은 홈랜더(안토니 스타)도 원더우먼을 닮은 퀸 메이브(도미니크 맥엘리곳)도 예외가 아니다. 코믹스에선 스타라이트와 퀸 메이브를 비롯하여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슈퍼히어로들이 여럿 있었지만, 드라마에선 홈랜더 외에는 늘 땅바닥에 발을 붙이고 다녀야 하는 신세다.

 

이미지: 아마존 ‘더 보이즈’의 더 보이즈

현실적인 설정은 ‘더 보이즈’의 팀원에게 더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더 보이즈’는 리더 빌리 부쳐(칼 어반)와 주인공 휴이 캠벨(잭 퀘이드)을 중심으로 타락한 슈퍼히어로 처단에 나서는 팀이다.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피메일/키미코(캐런 쿠후하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초능력이 1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라 그들의 원대한 계획이 무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나마 코믹스에선 치트키 ‘콤파운드 V’가 있다. 드라마에서 ‘콤파운드 V’는 이미 초능력을 가진 슈퍼히어로의 능력을 (스테로이드처럼) 일시적으로 높이는 정도만 할 수 있지만, 코믹스에선 초능력이 전혀 없는 보통 사람에게도 주입하면 며칠 동안 유효한 초능력이 생긴다. ‘콤파운드 V’의 약효가 미치지 않는 드라마의 ‘더 보이즈’는 코믹스의 동료들보다 힘든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이후 시즌에서 ‘더 보이즈’도 ‘콤파운드 V’를 사용하게 될 거라는 예측도 있다)

 

 

중심으로 들어온, 부패한 거대 기업과 정치

[더 보이즈]에서 가장 사악한 빌런 홈랜드가 상징하는 것은 (슈퍼맨을 떠나) 너무나 분명해 보인다. 초강대국 미국이다. 그가 두르고 있는 망토 자체가 아예 성조기다. 홈랜드는 슈퍼히어로 중에서도 월등히 막강한 능력을 갖고 있어서 ‘세븐’의 다른 슈퍼히어로에게 갑질을 하거나 강압적으로 대한다. 정의와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힘을 행사하고 다니지만, 철저히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캐릭터다. 카메라와 대중 앞에서는 선한 연기를 뻔뻔스러울 정도로 잘 하지만, 카메라가 꺼지고 대중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선 곧바로 본색을 드러낸다.

 

이미지: 아마존 ‘더 보이즈’의 홈랜더

정복 욕구보다 명예 욕구가 높은지, 그런 홈랜드도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있는데 ‘보우트 인터내셔널’이란 기업이다. (코믹스에선 ‘보우트 아메리칸’) 보우트에 소속된 홈랜드의 처지는 부사장 메들린(엘리자베스 슈)과 묘한 로맨스를 통해 더 강화된다. 코믹스에서 부사장은 남자였고 둘 사이의 로맨스는 없었다. 전체적으로 코믹스보다 드라마에서 기업 보우트의 역할은 더 중요해지고 플롯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하늘에 떠 있는 본부를 가진 코믹스의 보우트 아메리칸이 확연히 공상 속의 악의 조직처럼 느껴진다면, 드라마에서 뉴욕에 있는 고층 빌딩을 본사로 둔 보우트 인터내셔널은 보다 현실적이어서 미국의 군수산업체나 거대 엔터테인먼트 기업을 떠올린다. 보우트는 직접 키우고 만들어내어 브랜드화된 슈퍼히어로의 대중적 인기에 기반하여 각종 파생상품을 팔고, 궁극적으로 슈퍼히어로의 전략무기화를 목적으로 한다. 엔터테인먼트라는 소프트웨어와 슈퍼히어로라는 하드웨어를 모두 장악한 보우트는 그 독점적인 힘을 바탕으로 미국의 정치와 대중을 좌지우지하려 한다. 막강한 군사력(슈퍼히어로)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궁극의 무기인 ‘콤파운드 V’를 이슬람 테러리스트에게 공급하는 모습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폭망한, 여객기 구하기

드라마와 코믹스는 공통적으로 뉴욕을 배경으로 하지만, 눈에 띄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코믹스에 묘사되는 뉴욕의 풍경을 보면 9.11 테러 이후인 2006년 발간된 작품임에도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이 멀쩡히 서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신 브루클린 다리가 파괴되었다) 미국 현대사에 충격적인 사건을 지우고 싶었기 때문일까 생각도 들지만, 사실 『더 보이즈』의 어두운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

 

드라마와 코믹스는 공통적으로 테러리스트가 장악한 여객기를 구출하려는 장면이 등장한다. 드라마는 홈랜드와 퀸 메이브만 나서는 현재 시점에서 다룬다면, 코믹스는 ‘세븐’이 모두 출동한 과거 시점에서 이야기한다. 자세히 들어가면 더 확연한 차이가 드러난다. 드라마는 홈랜더의 본성과 갈등하는 퀸 메이브를 보여주는 정도에 그치지만, 코믹스에서는 거대한 음모가 숨어 있다.

 

이미지: ‘더 보이즈’의 홈랜더

코믹스에서 ‘세븐’이 구하려는 여객기는 바로 9.11 테러 때 쌍둥이빌딩으로 향하고 있던 두 번째 여객기다. 미국 대통령은 이미 테러리스트의 계획을 알고 있었지만 파키스탄으로의 침공 빌미를 얻고자 공군을 대기시킨 채 9.11 테러를 기다린다. 전투기 편대는 쌍둥이로 향하던 첫 번째 여객기를 (승객들과 함께) 격추시키고, 두 번째 여객기도 격추하려고 하지만, 슈퍼히어로들이 활약할 기획을 주기로 한 대통령과 보우트의 밀약에 따라 눈앞에서 회항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인 ‘세븐’과 가장 자주 쓰는 능력이 ‘성질내기’인 홈랜드는 구출에 실패하고, 홈랜드가 반파한 여객기는 브루클린 다리에 추락한다.

 

9.11 테러 음모론을 닮은 이런 플롯은 드라마와 코믹스 통틀어서 가장 극단적인 설정으로, 드라마로 옮겼다면 정치와 거대 기업의 밀착을 더 부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는 보우트 인터내셔널을 전면으로 내세운 드라마의 방향과도 일치한다. 하지만, 9.11 테러는 여러 면에서 과감했던 드라마 [더 보이즈]조차 차마 건들 수 없는 아픈 상처, 혹은 민감한 소재였을 것이다.

 

 

사회초년생 스타라이트의 잔혹한 사회 첫 발

아이오와 시골 출신의 애니 재뉴어리는 스타라이트(에린 모리아티)라 불리는 슈퍼히어로다. 보수적인 지역과 어머니 밑에서 성장해 (한때) 신앙심이 깊기도 했지만, (드라마보다 코믹스에서) 종교적인 갈등을 겪는다. 어려서부터 애니의 꿈은 ‘세븐’의 일원이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슈퍼히어로를 선하고 정의로운 존재로만 믿었다.

 

이미지: 아마존 ‘더 보이즈’에서 휴이와 애니(스타라이트)

‘세븐’에 결원이 생기고 스타라이트는 오디션 끝에 마침내 ‘세븐’의 일원이 되지만, 사회초년생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위와 힘을 악용하려는 변태 선배였다. 그래도 스타라이트도 슈퍼히어로인데 싸우면 되겠지 싶지만, 평생의 꿈을 입사 첫날에 접을 수 없던 스타라이트는 더러운 현실에 굴복하고 만다.

 

드라마도 (성행위 장면이 많은) 코믹스도 스타라이트의 성폭행에 관련해서 사건의 전과 후만 보여줄 뿐 직접적인 묘사는 피해 간다. 하지만, 코믹스는 역시 상황을 더 잔인하게 만드는데, 드라마에선 스타라이트를 성폭행하는 슈퍼히어로가 딥 하나에 불과하지만 코믹스에선 홈랜더를 주축으로 에이-트레인과 블랙 누와르까지 무려 3명이 가담한다.

 

이미지: 아마존 ‘더 보이즈’에서 휴이와 애니(스타라이트)

드라마에서 스타라이트는 몇 편의 에피소드 내에서 곧 부당함에 저항하고 빠르게 상처를 극복해 나간다. 반면, 코믹스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속도는 상당히 더디게 진행된다. [더 보이즈]가 제작을 준비하던 2017년 말은 하비 와인스타인으로 성폭행 이슈가 한창 뜨거웠던 때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에릭 크립키는 처음에는 스타라이트의 성폭행 플롯을 아예 뺄 것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드러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더불어 더 이상 여성 피해자들이 침묵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생각에 2000년대의 코믹스와 달리 2010년대의 드라마에서는 스타라이트가 빠르게 용기를 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