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 열풍이 거세다. 오죽하면,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뉴트로(Newtro)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이제 복고는 단순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중문화를 넘어 소비 업계 전반에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2012년 드라마 [응답하라 1997]과 영화 [건축학개론]이 나왔을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과거를 소비한다. 신선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추억을 소환하는 복고 트렌드에 맞춰 그 시절의 모습을 담은 해외 드라마를 모아봤다. 과거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거나 혹은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 시대상을 정밀하게 재현한 드라마는 어떤 게 있는지 살펴보자.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American Crime Story)

이미지: 넷플릭스

앤솔로지 드라마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는 90년대 미국 사회에 논란을 일으켰던 실제 사건을 다룬다. 시즌 1은 1994년 부인과 식당 종업원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O.J. 심슨의 법정 공방을, 시즌 2는 1997년 자택 앞에서 살해된 지아니 베르사체의 용의자 앤드류 커내넌의 서늘한 행적을 담아낸다. 같은 90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시즌 1과 2의 분위기는 다르다. 시즌 1은 O.J. 심슨 사건을 통해 인종차별, 사법제도의 허점 등 당대의 모순을 비추고, 시즌 2는 화려한 사교계와 성적 정체성 사이에 방황하는 청년의 비뚤어진 일탈에 집중한다. 2020년 방영될 시즌 3은 미국을 발칵 뒤집은 클린턴 전 대통령-르윈스키 스캔들을 다룬다.

데리 걸스(Derry Girls)

이미지: 넷플릭스

[데리 걸스]는 영국과 북아일랜드가 대립했던 90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심각하거나 엄숙하지 않다. 혈기 왕성한 10대들은 정치적인 혼란에 짓눌려 있기보다 고지식한 어른들을 상대로 시트콤 같은 하루를 보내기 바쁘다. 무심코 주고받는 대화에서 당대의 무거운 분위기가 감지되지만, 그보다는 [중경삼림]의 삽입곡으로 유명한 크랜베리스의 ‘Dreams’가 반갑다.

포즈(Pose)

이미지: 넷플릭스

[포즈]는 80년대 후반 뉴욕의 LGBTQ 커뮤니티가 주도했던 볼 문화(ball culture)를 배경으로 트랜스젠더의 치열한 삶을 그린다. 에이즈에 대한 공포와 성 소수자를 차별하는 사회적 편견 속에 욕망과 꿈을 실현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또한 패션 경쟁을 벌이는 독특한 사교 문화를 소재로 한만큼 에피소드마다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볼거리가 압권이다. 1987년에서 시작한 드라마는 시즌 2에서 90년대로 넘어가 그들의 삶을 위협하는 에이즈에 대한 이야기를 강화했다.

체르노빌(Chernobyl)

이미지: 왓챠

말이 필요 없는 올해 최고의 화제작 [체르노빌]은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1986년 소련 원자력발전소에서 일어난 폭발 사건을 다룬다. 5부작의 길지 않은 분량에도 사건이 발생한 순간부터 이후 법정으로 이어지는 수습 과정까지 정밀하게 담아내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는데, 그중 1986년의 구소련 시절 풍경을 완벽에 가깝게 재현한 미술을 빼놓을 수 없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시청자들에게 인정받을 정도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철저한 자료 조사를 토대로 현재도 충분히 공감할 수 이야기로 만들어낸 제작진의 노력이 새삼 놀랍다.

글로우: 레슬링 여인천하(G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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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우]는 1986년부터 2002년까지 지속된 미국의 여자 레슬링 쇼 ‘G.L.O.W’를 모티브로 제작된 드라마다. 80년대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무명 배우 루스와 은퇴한 배우 데비가 주축이 된 여성 레슬링 팀이 새로운 인생 목표를 향해 도전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당시 유행했던 번개 머리와 화려한 복고 패션, 그리고 훈련으로 다져진 다이내믹한 레슬링 쇼가 볼거리를 자아낸다. 최근 공개된 시즌 3은 라스베이거스로 무대를 옮겨 개인의 꿈과 레슬링 쇼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Black Mirror: Bandersna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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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근미래의 이야기를 다뤘던 [블랙 미러]와 달리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는 1984년을 배경으로 어두운 상상력을 발휘한다. 드라마는 독특하게도 시청자의 선택에 따라 전개와 결말이 달라지는 인터랙티브 방식을 도입해, 수많은 결정장애자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머뭇거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넷플릭스가 선택지를 낚아채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주인공은 [덩케르크]로 알려진 핀 화이트헤드가 연기한 프로그래머 스테판이다. 비디오 게임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져 혼란에 빠지는데, 그의 운명을 조종해야 할 시청자들도 새로운 선택지가 당도할 때마다 어려움을 겪는다. 그 과정에서 보이는 80년대 풍경은 드라마를 보는 또 하나의 소소한 재미다.

기묘한 이야기(Stranger Things)

이미지: 넷플릭스

한국에 [응답하라] 시리즈가 있다면, 미국에는 [기묘한 이야기]가 있다. 2016년 여름 전 세계 시청자들은 80년대의 추억을 소환하는 [기묘한 이야기]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1983년 가상의 도시 호킨스 마을에서 일어나는 기묘한 사건을 해결하려는 아이들은 귀엽고 풋풋하며, 드라마 곳곳에 배치된 대중문화의 흔적은 누군가에게는 추억을 상기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발견의 즐거움을 안긴다. [이티], [구니스], [스탠 바이 미], [미지와의 조우], [에이리언] 등의 유명 영화와 신디 로퍼, 본 조비, 듀란 듀란 등 팝스타들의 음악, 그리고 레트로 감성이 담긴 패션이 이야기만큼 즐거운 볼거리를 더해준다.

나르코스(Narcos)

이미지: 넷플릭스

[나르코스]는 80~90년대 미국과 콜롬비아의 마약 전쟁을 다룬다. 미국 정부를 근심에 빠뜨렸던 악명 높은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와 콜롬비아 최대 마약 조직 칼리 카르텔, 이들을 추격하는 미국 DEA 요원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생생한 사실감을 더하기 위해 그 시절의 미디어 자료 영상과 DEA 요원의 내레이션을 곳곳에 배치하고, 밀도 높은 서사로 마약 전쟁의 어려움을 설득력 있게 전한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콜롬비아에서 무대를 옮겨 멕시코의 유명한 마약왕 펠릭스 가야르도를 다룬 [나르코스: 멕시코]가 공개됐다.

마인드헌터(Mindhu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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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FBI 요원 존 E. 더글라스의 저서에 영감을 얻은 [마인드헌터]는 현재의 우리에게는 친숙하지만, 과거에는 생소했던 프로파일링이 어떻게 정립됐는지 살펴본다. 때문에 실제 일어난 사건과 연쇄살인범들이 등장하며, 프로파일링의 개념을 구축해가는 인물 또한 실제 인물에 영향을 받았다. 그뿐인가, 완벽한 연출로 악명 높은(?) 데이빗 핀처가 참여한 만큼 그 시대의 공기를 꼼꼼하게 재현하고자 하는데, 극중 인물과 실제 인물의 싱크로율이 상당하다. 특히 시즌 2에 등장한 찰스 맨슨은 분장팀의 노력 덕분인지 Ctrl+C, Ctrl+V를 한 것처럼 놀라운 일치를 보여준다.

리틀 드러머 걸(The Little Drummer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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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드러머 걸]은 1979년 영국의 무명 배우 찰리가 이스라엘의 스파이가 되어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에 침투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작품마다 독창적인 미장센으로 유명한 박찬욱 감독답게 매혹적인 영상이 시선을 끈다. 기존 첩보물에 흔한 회색빛의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탈피하고 강렬한 컬러를 과감하게 활용해 생동감과 활기가 느껴지는 70년대를 창조했다.

더 겟 다운(The Get D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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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랑 루즈]의 바즈 루어만 감독이 연출을 맡아 70년대 후반 뉴욕 사우스 브룽크스에 살아가는 10대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1억 2천만 달러의 예산을 들여 힙합씬이 태동하던 흑인 문화를 재현하고, 소울, 디스코, 힙합, 펑키 등 다채로운 음악을 이야기만큼 중요하게 다룬다. [물랑 루즈], [위대한 개츠비]에서 익히 본 화려한 영상과 음악이 압도하는 드라마다. 진부한 이야기는 아쉽지만, 다소 아쉬운 내용을 견딜 수 있다면 그 시절 흑인 문화를 정성스럽게 재현한 영상과 음악은 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