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토론토국제영화제에 소개된 프랑스 영화 중 9편(TV 시리즈 1편 포함)이 여성 감독의 작품이다. 지난 1월 세상을 떠난 아녜스 바르다의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를 비롯해 마티 디옵의 [아틀란디크], 셀린 시아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쥐스틴 트리에의 [시빌], 알리스 위노커의 [프록시마], 레베카 즐로토프스키의 TV 시리즈 [세비지스]까지 다양하다. 2000년대 이후 활동한 여성 감독들이 대거 포진한 것이 특징이다. 미국 영화 매체 버라이어티는 이 작품에 주목하며, 프랑스 여성 영화감독의 새 세대가 새 흐름을 만들고 있다고 평가한다.

프랑스 영화계는 미국, 한국 등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남성과 백인 중심적이지만, 지난 몇 년간 여성 감독들의 작품이 평론가와 시네필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이들이 현재 프랑스 영화의 ‘얼굴’이 된 건 작품 완성도가 뛰어나고 주제가 전 세계 관객에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영화로 결실을 보기 쉽지 않은 걸 고려하면, 이들의 약진에는 특별한 무엇인가 있다. 버라이어티는 그 이유를 프랑스 영화 산업의 제도적 노력에서 찾았다.

이미지: 그린나래미디어

레베카 즐로토브스키 감독은 프랑스 영화 산업의 특성 덕분에 여성 감독이 의미 있는 작품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프랑스의 영화 투자가 단편 영화, 릴 필름, 뮤직비디오 등 감독이 이전에 만든 영상물이 아니라 ‘각본’에 기반한다고 설명했다. 각본 자체는 다른 창작물보다 창작자에겐 경제적 장애물이 가장 적기 때문에, 좋은 각본을 쓴 여성 영화인들에게 기회가 돌아간다. 감독은 프랑스 영화 시스템이 점점 진화하는 것도 이유로 꼽았다.

“우리 세대는 이미 다들 장편영화를 2편, 3편, 4편째 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일반적이지는 않다. 프랑스엔 언제나 여성 영화 감독이 있었지만, 계속해서 장편 영화를 만드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는 시스템이 바뀐 결과다.”

즐로토브스키와 셀린 시아마 감독은 영화계 내 성 평등 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활발히 활동했다. 이들은 2013년, 프랑스 영화 산업 내 성차별과 대표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된 네트워크 ‘두 번째 시선(Le Deuxième Regard)’에 합류했다. 두 번째 시선은 프랑스 레 아르크 영화제와 함께 산업 내 포용 정책을 연구하는 싱크 탱크, 영화 여성 랩(Le Lab Femme de Cinema)을 조직했고, 젊은 영화인을 대상으로 워크숍과 마스터 클래스 등을 개최한다.

2018년 칸 영화제 레드카펫 위에서 여성 영화인들이 행진한 후, 두 번째 시선은 ’50/50 콜렉티브’와 통합했다. ’50/50 콜렉티브’는 시아마가 창립에 참여하고 쥐스틴 트리에, 알리스 위노커도 가입한 모임으로 2020년까지 영화계의 젠더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5050×2020 운동’을 주도한다. 50/50 콜렉티브는 카메라 앞과 뒤에서 모두가 동등한 기회와 임금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위한 법률 기반 조성에 힘을 쏟는다.

https://youtu.be/0x-hD8STDBs

두 번째 시선과 5050×2020 모두 프랑스 영화 산업의 진보를 목표로 하되 프랑스 특유의 문화에 맞춤 해법을 찾고 실행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즐로토프스키는 “프랑스의 문화적 패러다임 때문에 영화계에 쿼터제나 제재를 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우리의 방법은 젠더나 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양측이 이성을 잃을 수 있는 논의를 과학적으로 체계화시키는 것이었다.”라고 설명했다.

2018년, 프랑스 국립영화센터(CNC)와 프랑스 문화부는 영화계 양성평등 고취를 위한 인센티브 제도를 발표했다. 감독, 작가, 촬영감독 등 주요 스태프가 여성인 경우 1점씩 포인트를 주고, 점수에 따라 최고 15%까지 지원금을 더 받는다. 2019년 초부터 실시, 지금까지 약 20편 정도가 혜택을 받았다. 프랑수아즈 니센 전 문화부 장관은 “변화의 속도가 더딜 때 변화를 빠르게 가져오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 인센티브 제도의 의의를 설명했다. 즐로토브스키는 프랑스에선 “인센티브가 강제 제재보다 더 효과적”이며, “정치적 인식을 고취하면 모든 분야로 긍정적 영향력이 전파될 것”이라 보았다.

작년부터 유럽의 여러 영화제는 5050×2020이 제안한 ‘성 평등 및 영화계 여성을 위한 포용 특약 선언’에 서명했다. 선언 내용은 1) 프로그래밍 위원회의 구조와 관리 투명성, 2) 영화제 조직 내 여성 인력 증가 등이다. 올해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선 여성 또는 유색인종 필름 메이커의 작품이 드라마틱하게 증가하진 않았으나, 결과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평등으로 가는 길은 멀고, 속도는 너무나 느리지만, 변화의 조짐이 조금씩 보인다는 것에 희망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