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상범

때론 어떤 이야기는 영화 한 편으로 끝내기에 아쉽고 드라마의 긴 호흡으로 보고 싶을 때기 있다. 또는 영화 이후의 이야기를 보고 싶을 때도 있다. 신작을 끊임없이 선보이는 할리우드 제작자들도 이를 아는지 영화의 유명세 혹은 아쉬움을 드라마로 옮기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미스트], [마이너리티 리포트], [리미트리스]처럼 드라마로 제작된 후 기대에 못 미치는 평가를 받을 때도 있지만, 영화의 드라마화 작업은 현재 진행형이다. 독특한 설정의 호러 영화 [더 퍼지]는 두 번째 시즌을, 맷 데이먼 주연의 [본] 시리즈는 스핀오프 [트레드 스톤] 방영을 앞두고 있으며, 최근에는 해리슨 포드 주연의 [도망자]를 리메이크한 드라마가 나올 거라는 소식이 알려졌다. 그럼 영화에서 드라마로 제작된 작품은 어떤 게 있을까? 그중 준수한 평가를 받은 드라마 5편을 소개한다.

웨스트월드(Westworld)

이미지: HBO

드라마 [웨스트월드]는 소설가 마이클 크라이튼이 직접 쓰고 연출한 1973년작 [이색지대]를 원작으로 미래형 테파마크 ‘웨스트월드’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과학기술이 발달한 미래, 거대기업이 미국 서부 시대를 재현한 엄청난 규모의 테마파크를 운영하고, ‘호스트’라 불리는 인간의 모습을 닮은 인공지능 로봇이 그곳을 찾는 고객의 판타지를 실현해준다. 현실에 존재하는 비디오 게임인 셈인데, 어느 날 자아를 가진 호스트들이 역할을 거부하고 반란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드라마의 큰 틀은 영화와 동일하지만, 구체적인 이야기와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웨스트월드]는 [왕좌의 게임]에 버금가는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해 인간성을 각성하는 인공지능이라는 매력적인 이야기를 독특한 비주얼로 선보여 첫 방영부터 호평을 받았다. 다만 2020년 시즌 3 방영을 앞둔 지금은 초기보다 관심도가 떨어졌다. 2018년 방영된 두 번째 시즌이 화려한 겉모습에 비해 잔혹하고 떡밥만 과도하게 투입한 이야기로 실망스런 반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제작진도 이를 의식하고 있는지 시즌 3에서는 쓸데없는 떡밥 뿌리기는 없을 거라고 밝혔다.

베이츠 모텔(Bates Motel)

이미지: aetv

[베이츠 모텔]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 이전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처럼 긴장감이 넘치는 스릴러는 아니지만,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뒤틀리고 애증 어린 관계를 폭넓게 담아낸다. 유약한 10대 노먼 베이츠가 사이코패스로 성장한 과정에 초점을 맞춰 어머니 노마와의 복합적이고 비정상적인 관계에 집중한다. 드라마로 각색하면서 이야기의 배경을 현재로 바꾸고, 노먼과 노마 사이에 이복형제와 마을 보안관 등 새로운 인물을 추가해 영화를 보지 않은 시청자들도 흥미롭게 볼 수 있게 서사를 강화했다. 영화와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없지만, 기존 팬들을 위한 서비스 장면도 등장한다. [컨저링] 시리즈의 베라 파미가와 [어거스트 러쉬]의 아역 배우 출신 프레디 하이모어가 유난한 애정을 나누는 엄마와 아들로 호흡을 맞춰 호평을 받았다. 프레디 하이모어는 [베이츠 모텔]에서 아역 이미지를 벗는 데 성공하면서 현재 [굿 닥터] 주연으로 성공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한니발(Hannibal)

이미지: NBC

[한니발]은 영화 [양들의 침묵]을 비롯해 한니발 렉터를 다룬 시리즈의 명성을 등에 업고 제작된 드라마다. 1991년작 [양들의 침묵]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할 만큼 완성도를 인정받으면서, 문제적 인물 한니발을 다룬 후속편이 제작됐지만 [양들의 침묵]은 뛰어넘지 못했다. [한니발]은 그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진 이후에 선보였다. 드라마로 넘어온 [한니발]은 연쇄살인마 한니발 렉터와 프로파일러 윌 그레이엄을 중심으로 어둡고 기괴한 내면을 파고든다. 살인마의 심리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윌과 그를 동화시키려는 한니발의 끈적한 관계를 치밀하게 묘사한다. 다만, 느린 서사와 지나치게 잔혹한 살인 묘사 등으로 많은 대중의 관심을 얻지는 못했다. 당초 영화의 내용을 모두 커버할 계획으로 시즌 7까지 제작될 예정이었지만 세 개 시즌으로 마무리했다.

파고(Fargo)

이미지: FX Networks

블랙 코미디 드라마 [파고]는 1996년에 선보인 코엔 형제 감독의 동명 영화에서 출발한다. 빚에 허덕이는 주인공이 부유한 장인에게 돈을 뜯어내고자 부인의 유괴를 청부하면서 벌어지는 어이없는 촌극을 살을 보태어 10부작 드라마로 옮겼다. 마틴 프리먼, 빌리 밥 손튼이 소심한 주인공과 살인청부업자로 등장해 다양한 인물이 얽히고설켜 갈수록 걷잡을 수없이 꼬여가는 이야기를 이끈다. 전개 과정에서 영화와 달라진 부분도 있지만, 코엔 형제 감독의 건조하고 엉뚱한 유머는 여전하다. 시즌 1이 성공적인 반응을 얻은 이후 각기 다른 사건을 다룬 앤솔로지 드라마로 제작됐는데, 내년에는 1950년대 캔자스시티를 배경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이탈리아 마피아의 전쟁을 다룬 시즌 4가 공개될 예정이다. 덧붙여, 에피소드 시작 시 나오는, 실제 벌어진 일을 토대로 했다는 자막에 속으면 안 된다.

데어데블(Daredevil)

이미지: 넷플릭스

데어데블은 어린 시절 사고로 시력을 잃은 대신 다른 감각이 초인적으로 발달한 마블 코믹스의 슈퍼히어로다. 2003년 벤 애플렉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어 형편없는 완성도로도 유명하다. 망작 히어로란 오명을 쓰고 실추된 이미지는 넷플릭스-마블의 첫 번째 드라마 [데어데블]로 만회했다. 드라마로 재탄생한 [데어데블]은 전체적으로 유쾌한 톤의 마블 영화와 달리 어둡고 진지한 분위기에 성인 등급의 거친 폭력을 선보인다. 낮에는 변호사, 밤에는 자경단으로 활동하는 맷 머독의 고통과 어두운 내면을 묘사하며 헬스키친의 불의에 맞서는 고뇌하는 히어로의 서사를 담아낸다. 다소 느린 서사에도 데어데블의 특성을 잘 살린 격투 액션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시즌 2에서 개연성을 잃은 서사와 오리엔탈리즘으로 비판을 받았다. 2018년 10월 공개된 시즌 3은 이전의 실망을 만회했지만, 아쉽게도 넷플릭스와 마블이 결별하면서 더 이상의 이야기를 볼 수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