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폐막식을 끝으로 지난 열흘간의 영화 축제가 끝났다. 에디터는 지난 4일(금)부터 9일(수)까지 부산에 머물며 총 11편의 영화를 관람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한국에 처음 방문한 티모시 샬라메다. 아이돌 부럽지 않은 어마어마한 인기를 실감했다고 할까. 해마다 영화제를 방문하면서도 게스트 방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올해만큼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이후 팬이 된 티모시의 방문에 들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각종 행사에서 팬들을 소중히 대하는 태도를 지켜보면서 흐뭇한 마음에 팬심은 더욱 굳건해졌다. 야외극장 상영이 있던 날 영화의전당 건물 주변에 길게 늘어선 입장 행렬도 놀라운 풍경 중 하나다. 부국제의 즐거운 기억을 안고 다시 한국을 찾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건 더위다. 지난해 태풍 때문에 잔뜩 고생했다면, 올해는 따사로운 햇살에 센텀 내의 이동거리조차 힘겹게 느껴졌다. 아니 체력과 나이의 한계일까. 그렇다면 정말 슬픈 일(ㅠㅠ)이다. 어쨌든 몸은 고단했지만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본 영화를 정리해본다.

더 킹: 헨리 5세(The King) – 왕이 되는 여정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 티모시 샬라메 첫 내한으로 화제를 모은 [더 킹: 헨리 5세]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출발해 어린 왕자에서 진정한 왕으로 거듭나는 여정을 그린다. 전쟁과 왕권에 반하는 젊은 왕자 할이 아버지 헨리 4세의 서거 이후 왕위를 계승하고 혼란에 빠진 국가의 운명과 마주하고 한 나라의 통치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전작에서 주로 소년(혹은 청춘)의 이미지가 강한 인물을 연기했던 티모시 샬라메가 이번에는 무거운 책임을 떠안은 젊은 왕 역할에 도전해 거친 전투신을 소화하고 고뇌하고 반목하며 지도자로 변모해가는 인물을 그려낸다. 조엘 에저튼, 숀 해리스, 로버트 패틴슨, 벤 멘델존, 릴리-로즈 뎁, 톰 글린-카니 등이 합세해 인물의 변화하는 심리에 설득력을 뒷받침한다. 

전작 [워 머신]에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부조리를 고발했던 데이비드 미쇼 감독은 조엘 에저튼과 함께 각본을 쓰고 연출한 [더 킹: 헨리 5세]에서도 계속해서 전쟁의 명분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더 나아가 처음에는 전쟁에 반대했던 할이 왕이 된 이후 권력과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거침없이 변화하는 과정을 비추며, 국가의 상징적인 존재인 왕권의 정당성과 이면에 의문을 표한다. 즉, 할은 누구에게나 존경받고 위엄 있는 왕으로 성장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토록 비난했던 아버지가 걸었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파괴해야 하는 자리. 전쟁은 권력을 지키기 위한 명분이다.

원 차일드 네이션(One Child Nation) – 악명 높은 산아제한 정책을 고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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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앵글: ★★★☆ 2015년 폐지된 중국의 산아제한 정책의 민낯을 폭로하는 다큐멘터리. [원 차일드 네이션]은 감독 왕 난푸의 개인적 경험에서 시작해 가족, 친척, 이웃으로 확장해가며 불합리한 정책을 시행한 중국 정부에 문제를 제기한다. 산아제한 정책의 이면을 몰랐던 이에게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가 취합된 이 작품은 놀랍고 가슴 아프며 충격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사회적, 경제적 이유로 시행하는 산아제한 정책은 개인의 삶을 억압하는 동시에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강제 피임/낙태, 아동 납치, 밀매 등 다양한 사회 문제를 초래했지만, 국가는 개인의 고통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산아정책을 폐지한 후에는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자녀를 둘 이상 출산할 것을 홍보할 뿐이다. 한편 현재 미국으로 이민한 감독은 낙태를 강력하게 금지하는 트럼프 정부의 현주소를 거론하며 여전히 여성의 권리가 침해되는 현실을 직시한다.

# 존 덴버(John Denver Trending) – 사이버 불링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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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커런츠: ★★★ [# 존 덴버]는 현재의 민감한 화두 사이버 불링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평범한 학생 존 덴버가 같은 반 친구의 악의적인 의도로 폭행 영상의 가해자로 둔갑되면서 평온했던 일상이 파괴되는 과정을 차분히 따라간다. 영상 속의 단편적인 모습을 보고 온라인 여론에 쉽게 동조하고 개인의 삶을 철저히 짓밟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풍경이다. 또한 여론을 조작하는 악마적인 편집, 가십에 민감한 미디어의 폭력, 존 덴버를 대하는 사람들의 선입견도 어린 소년의 삶을 위태로운 벼랑으로 밀어 넣는다. 때문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섬뜩하고 씁쓸하며 아프다.

에마(Ema) – 관습에 반기를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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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네마: ★★★☆ 파블로 라라인의 신작 [에마]는 미첼 프랑코의 [에이프릴의 딸]처럼 관습적으로 기대하는 여성의 역할(모성애)에 해방감을 안기는 영화다. 무용수 에마는 뜻하지 않는 사건 이후 파양된 아들 폴로를 되찾고 싶지만, 안무가이자 남편인 개스톤부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다. 사회복지사도 에마를 탓하고, 동료 교사도 자신들의 눈에 불안정해 보이는 그를 탓한다. 영화는 나쁜 엄마라고 비난받는 에마의 대담한 욕망을 강렬한 색감의 영상과 음악과 함께 담아낸다. 몽환적이고 관능적인 에로틱한 분위기가 102분의 러닝타임을 압도하며, 에마의 저돌적인 여정을 통해 관습적인 가족의 형태를 철저히 파괴한다. 결국 결말에 다다르면 에마는 누군가의 도움(특히 남자)이 필요하지 않고 스스로 삶의 방식을 선택한 하나의 인격체로 우뚝 선다. 단번에 시선을 붙잡는 금발 머리의 마리아나 디 히롤라모는 가만있어도 빛나는 존재감이 매혹적이다.

진실과 거짓 사이(Port Authority) – 차가운 현실을 감싸는 따스한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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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네마: ★★★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덩케르크] 배우들의 출연작에 도전했는데, [진실과 거짓 사이]는 그 첫 번째 작품이다. [덩케르크]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던 토미 병사를 연기한 핀 화이트헤드가 이번에는 목적지를 상실한 떠돌이 청년으로 등장한다. [진실과 거짓 사이]는 드라마 [포즈]처럼 LGBTQ 커뮤니티가 주축이 된 볼룸 문화를 배경으로 사회적 편견과 혐오의 시선에 굴하지 않는 사랑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복 누나와의 만남이 좌절된 폴은 선뜻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리의 도움으로 노숙자 쉼터에 거처를 마련하고 [라스트 홈]의 앤드류 가필드처럼 가난한 입주자를 위협하는 일을 한다. 그러면서 우연히 만난 매혹적인 여성 와이에게 빠져들지만, 뒤늦게 그가 트랜스젠더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영화는 이질적인 두 세계 사이에서 불안해하는 폴이 내면의 진실과 마주하고 거짓으로 무마했던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는 여정을 통해 사랑과 신뢰, 용기로 맺어진 대안가족을 응원한다.

종말(Calm with Horses) – 거친 폭력이 지배하는 황량하고 쓸쓸한 아일랜드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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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네마: ★★☆ 배리 케오간의 이름을 보고 선택한 [종말]은 폭력의 방식으로 살아온 남자의 처연한 현실을 그린다. (‘덩케르크’ 배우 자체 기획전 두 번째;;) 한때 권투 선수 유망주였으나 사고로 선수 생활이 끝난 암은 폭력적인 지역 마약상의 하수인으로 살아간다. 유일한 희망이라면 자폐아 아들 잭에게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지만, 거친 삶에 익숙한 그가 아빠 노릇을 하기는 쉽지 않다. 영화는 애틋한 부성애와 거칠고 비정한 폭력의 삶에서 갈등하고 생존하기 위해 분투하는 암의 절망적인 현실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보는 내내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이 무겁게 짓누르고, 폭력이 앞서는 남성 중심의 서사는 불편한 감정을 자아낸다. 다만 배우들의 연기는 역할의 비중에 상관없이 인상적이다.

시너님스(Synonyms) – 이상하고 재미있고, 슬프고 씁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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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네마: ★★★☆ 노란 코트를 입고 활시위를 당기는 듯한 포즈를 취한 남자의 사연이 궁금했다.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보다 엉뚱해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호기심이 동해 [시너님스]를 선택했는데, 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독특한 사람이었다.

이스라엘 청년 요아브는 프랑스에 대한 환상을 품고 파리로 향하지만 첫날밤부터 일정은 제대로 꼬인다.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인 배낭을 도둑 맞고 빈 아파트에서 동사하기 직전 젊은 부르주아 커플 에밀과 캐롤라인을 만나 구조된다. 젊은 커플은 발가벗은 이스라엘 청년에게 호기심을 갖고, 이어 [쥴 앤 짐], [몽상가들]을 연상시키는 삼각 구도가 형성되며 요아브의 파리 표류기가 시작된다.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군국주의)을 부정하고, 프랑스어 사전을 들고 파리의 거리를 배회하며 타국의 문화에 동화되려 하지만 그의 희망은 순진해 보일뿐이다. 군대를 피해 프랑스로 도피했지만 여전히 폭력의 그림자가 사방 곳곳에 드리워져 있다. 오히려 폭력의 양상이 군대처럼 선명해 보이지 않을 뿐 더 뿌리 깊게 박혀있다.

[시너님스]는 단번에 이해하기 쉬운 선형적인 구조가 아니다. 서사는 불규칙적이고 때로는 엉뚱하게 과장된 장면이 부지불식 튀어나오기도 한다. 관객에게 비협조적인 영화는 단번에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이상하게도 곱씹고 다시 보고 싶은 의욕이 샘솟는다. 순진한 몽상에 빠져 더 헤어 나오기 힘든 곤경에 처한 요아브의 파리 표류기를 한 번만 보기는 아쉽다.

소년, 소총을 만나다(Boy Meets Gun) – 뻔하지만 장르물의 재미에 충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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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네마: ★★★ [소년, 소총을 만나다]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평범한 사람이 총을 가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우연한 기회에 총의 주인이 된 인물은 권태와 무료함에 빠진 철학과 교수 마르텐이다. 마트를 털던 강도가 실수로 떨어뜨린 총을 엉겁결에 주워들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간 것. [조커]의 아서 플렉처럼, 총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무기력한 중년 남자 마르텐도 총의 기운을 받아 자신감을 얻고 대담하게 행동하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행보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총이 비극을 불러올 거란 사실은 불 보듯 뻔하지만, 개성 있는 캐릭터와 스릴과 위트를 오가는 변덕스러운 리듬감을 더해 예상 가능한 전개를 끝까지 흥미롭게 밀고 나간다.

늪의 침묵(The Swamp’s Silence) – 차갑고 음습한 늪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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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네마: ★★★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넷플릭스 드라마 [종이의 집]에서 베를린을 연기한 페드로 알론소(Pedro Alonso)가 출연해 보게 된 영화. [늪의 침묵]은 성공한 범죄소설 작가가 부패한 권력에 자신만의 응징을 꽤 하는 이야기를 차갑고 건조한 서사로 담아낸다. 작가는 사인회에서 주인공 살인자의 동기를 왜 다루지 않냐는 팬의 질문에 자신도 모른다고 답을 하는데, 그의 대답은 이 영화가 갖는 맥락과 맞닿아 있다. 속내를 가늠하기 힘든 주인공처럼 영화는 범죄물의 관습을 따르면서도 명쾌하게 흘러가지 않고 쉽게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작가는 스캔들에 연루된 정치인을 잔혹하게 납치 살해하고 정치인과 마약 카르텔이 얽힌 부패의 흐름을 포착하지만, [내부자들]의 안상구처럼 공개적으로 확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야기는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개인적인 서사로 변화하고,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는 결말을 택한다. 아마 이 결말부를 놓고 도대체 작가는 무엇을 한 것인지 말들이 오갈지도 모르겠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서 모호하게 살아간 인물은 거대한 비리 스캔들도 책 속의 이야기로 담아내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리지 않을까.

싸이코시아(Psychosia) – 추상에 힘쓰다 내면을 상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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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네마: ★★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가장 빠르게 잊힌 영화. 자살을 연구하는 빅토리아가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환자 제니를 만나면서 흔들리는 이야기를 그린다.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극도로 절제된 연구원 빅토리아는 거칠고 변덕스러운 환자 제니를 상대하는 데 처음엔 어려움을 겪지만, 그와 자신을 같은 이해 공간에 두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한다. 영화는 무심하게 단서를 흩뿌리며 빅토리아가 제니와의 경계가 무너지는 동일화의 혼란을 대칭과 과장, 왜곡의 표현주의 스타일로 담아낸다. 한 마디로 영화제에서 볼법한 영화적인 영화인데, 결말부에 다다르면 남아있는 이야기에 비해 영화적인 기법만 앞서나간 게 아닌지 의문스럽다.

봄베이의 장미(Bombay Rose) – 황홀하고 매혹적인 발리우드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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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영화의 창: ★★☆ 인도에서 온 애니메이션 [봄베이의 장미]는 가난한 청춘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황홀하고 낭만적인 터치로 담아낸다. 발리우드 액션 스타가 위기에 처한 여성을 구하는 영화 속 이야기로 포문을 열고, 동생을 돌보며 낮에는 꽃을 팔고 밤에는 바에서 댄서로 일하는 카말라와 군인에게 부모님이 살해당한 뒤 거리의 삶을 살아가는 살림의 로맨스를 주축으로 활기차면서도 우울한 풍경을 녹여낸다. 사람들을 매혹하는 발리우드의 환상과 달리, 녹록지 않은 실제의 삶이 봄베이의 거리 곳곳에 드러난다. 카말라와 살림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관습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곁가지로 흐르는 주변부의 이야기가 서사를 풍성하게 뒷받침하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색감의 영상과 음악이 절대적인 지분을 차지한다. 이 시청각적 경험만으로 신선한 인상을 받을 수 있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