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는 늘 그렇듯 시끌벅적하고, 흥겹다. 그저 그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들뜬다. 올해는 10월 4일(금)부터 9일(수)까지 머물렀는데, 아침부터 밤까지 영화를 보는 대신 인터뷰와 행사 취재, 마켓 방문 등 다양한 경험을 하려 했다. 물론 아침부터 예매 전쟁에 시달리고, 스케줄 변동으로 정말 보고 싶었던 영화를 두 번이나 놓쳤다. 막판엔 티켓까지 잃어버리며 불운의 정점을 찍었지만, 뜨거운 햇살과 코끝을 스치는 밤바람 내음을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 올해 체력과 불운을 무릅쓰고 본 영화를 정리했다.

시너님스 (Synonyms) – 고통 어린 표정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월드 시네마: ★★☆ 올해 첫 영화는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시너님스]다. 이스라엘 청년 요아브는 과거에서 도망치듯 파리로 와서 새로운 삶을 꾸리려 한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훌륭한” 군인이었지만, 히브리어를 사용하거나 아버지와 만나는 걸 거부한다. 하지만 프랑스어를 열심히 배워도, 프랑스 국가를 목이 터져라 외쳐도 그가 원하는 세계는 자신에게 닿지 않을 듯하다. 요아브는 결국 이곳에서도 ‘별난 인간’으로 취급받고 배척당하고, 쓸쓸히 떠난다. 이 모든 내용은 요아브의 중얼거림, 현실을 이상으로 만들려는 요아브의 몸부림 때문에 한 번에 와 닿지 않는다. 처음부터 만만치 않은 영화를 골랐단 건 알았지만, 지금도 절반은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렇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요아브의 표정과 몸짓에 서린 절박함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안다.

그냥 그대로 (Just Like That) – 내 맘대로 자유롭지 못하는 사회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 인도 작은 마을의 중산층 여성인 사르마 부인은 남편을 잃고, 평소처럼 정숙한 여성이자 존경받는 어른으로 남기를 거부한다. 그는 생전 처음 자유라는 것을 마음껏 누린다. 새로운 경험에 도전하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며, 자식들과 친척, 친구들의 압박에서 조금은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랬듯, 사르마 부인이 “그냥 그대로” 남길 바란다. 남편에 속해 있던 삶은 아들에게로 속하고, 그의 모든 재산도 아들에게 속한 채 그저 조용히 죽어가길 원한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조용하고, 이야기는 각 인물의 복잡한 사정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흘러간다. 그러나 남성이 여성에게, 고용주가 직원에게, 종교와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은 숨 막히게 끔찍하다.

프린세스 아야 (Pincess Aya) – 기술, 감성, 혁신의 조화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 [마리 이야기], [천년여우 여우비] 등 한국 애니메이션을 이끄는 이성강 감독의 신작이다. 몸이 동물로 변하는 저주를 받은 연리지 공주 아야가 바타르 왕국의 왕자 바리와 정략결혼하고,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게 된 후 공통의 적을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작화는 아름답고, 백아연과 갓세븐 진영이 주축이 된 목소리 연기도 훌륭하다. 가수 두 사람을 기용한 만큼 음악도 귀를 잡아 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이야기의 배경 설정이다. 한국 애니메이션이 모두 한국적일 필요는 없다고 선언하듯 이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배경과 복식이 인상적이었다. 한국 최초로 스크린X 효과를 적극 활용한 화면 구성도 돋보인다. 에디터는 스크린X 기술에 다소 비관적인데, 기술을 적극 활용한 콘텐츠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프린세스 아야]가 보여준 기술 활용이나 독창성은 그 의심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었다.

원 차일드 네이션 (One Child Nation) – 몸과 자유, 행복에 대한 국가의 폭력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 1970년대부터 2015년까지 실시된 중국의 국가 주도 1자녀 정책의 비밀을 드러낸 다큐멘터리. 사회주의 국가의 강력한 선전 정책과 남아 선호 사상이 결합해 수많은 여성들이 자기 몸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했고, 많은 여아들이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았다. 중국 아동의 해외 입양이 허가된 후 마을의 우두머리, 공무원, 브로커, 보육원의 음모로 해외에 팔려나갔다. 감독은 작은 마을에 보기 드문 2자녀 집안의 장녀라는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해 가족과 마을 주민, 정책 실행자, 브로커까지 인터뷰하고 꼼꼼하게 자료를 구성해 몸과 생명에 대한 국가의 폭력을 고발한다. 영문도 모른 채 가족과 생이별해야 했던 수많은 아이들, 태어난 아이를 살리기 위해 버린 부모들의 눈물을 보면 슬프고, 국가는 잘못을 하지 않는다며 여전히 국민의 몸을 통제하는 정부의 태도엔 분노가 솟구친다. 여성을 인간이 아닌 출산 기계로 보고, 개인보다 국가를 우선하는 사고방식은 언제쯤 바뀔까?

소녀 안티고네 (Antigone) – 고전을 재해석해 현재를 비판하다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월드 시네마: ★★★★ 이민자 출신 고등학생 안티고네에겐 할머니와 오빠, 언니만 남아 있다. 어느 날 큰오빠가 경찰의 손에 죽고 작은 오빠가 범죄 혐의로 체포되자, 안티고네는 가족을 위해서 오빠를 탈옥시킨다. 가족을 위한다는 안티고네의 명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지만, 일은 안티고네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고 그의 가족 모두 불행한 결말을 맞이한다.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를 현대 캐나다 몬트리올을 배경으로 재해석한 [소녀 안티고네]는 사법 시스템이 유색인종과 난민에게 가혹하고, 사람을 죽이고도 공권력이라 죄를 받지 않으면서 한 가정에 비극이 초래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안티고네는 사법 시스템에 호소하거나 ‘절차’를 따지는 대신 간 크게도 죄수를 탈옥시킨다. 두 오빠가 사실 그의 희생을 대가로 치를 만큼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아도 말이다. 하지만 안티고네의 법은 현실과 어울리지 못했고, 결국 소녀는 최후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

전형적인 자기 팔자 자기가 꼬는 스토리라, 누군가는 안티고네의 어리석음을 탓할 테고, 누군가는 그의 절박함을 이해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 비극을 현대에 훌륭하게 이식하고, 안티고네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재해석한 솜씨에는 저절로 나온다. 소피 데라스페 감독은 각본뿐 아니라 촬영도 겸하며 현대적 감성과 고전의 비극성을 극대화했다. 안티고네 역의 나에마 리치는 올해의 발견이라 할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망자의 계곡 (Valley of Souls) – 눈물은 강이 되어 바다로 흐르네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플래시 포워드: ★★★ 어부 호세가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날, 두 아들은 민병대에 납치된다. 호세는 강을 따라 내려가며 아마도 죽었을 아이들의 시신을 찾지만, 마을 사람들은 민병대가 무서워 강에서 시체를 건져내려는 호세를 외면한다. 민병대는 평범한 어부 호세를 비웃고 조롱하며, 강압적인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죽이겠다 협박한다. 어디선가 많이 본 상황 같다면 그 생각이 맞다. 모든 부분이 세월호 사건을 떠오르게 하기에 영화는 더욱 강렬하고 특별하다. 목포 앞바다와 아마존 강 모두에 뿌려진 눈물을 보며 개인이 느끼는 무력함과 폭력(또는 국가 권력)에 느끼는 두려움은 맥락이 지역적이어도 세계인 모두가 공감하는 감정임을 깨닫는다. 러닝타임 138분 동안 스코어가 없고 대부분 강물이 흐르는 소리로 채워졌는데, 그 자체가 구슬픈 장송곡으로 들린다.

더 킹: 헨리 5세 (The King) – All Hail to the King!

이미지: 넷플릭스

갈라 프레젠테이션: ★★★☆ 티모시 샬라메, 조엘 에저튼, 셰익스피어. 고민할 것도 없이 올해 부국제 최고의 기대작이었고, 영화는 그 기대에 부응했다. [헨리 4세 I, II]와 [헨리 5세]에 바탕을 두었지만, 영화는 소년왕의 성장 과정에 집중한다. 이상주의자이며 왕권과 전쟁에 비판적이었던 할 왕자가 왕이 되고 왕관과 자존심을 지키려 국운을 건 전쟁을 벌이는 과정을 통해 영화는 권력이 얼마나 비정하며,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잘 보여준다. 샬라메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는 완전히 다른 표정, 눈빛, 목소리를 보여주며 헨리 5세의 변모를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늙은 주정뱅이 기사 폴스타프는 희곡과 완전히 다르게 해석됐고, 각본을 쓴 조엘 에저튼은 새로운 폴스타프를 훌륭하게 전달한다. 고증에 심히 충실한 아쟁크루 전투, 프랑스 황태자를 연기한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 또한 강한 인상을 남긴다. 한국 극장에서 일주일 간 상영될 예정이라, 넷플릭스 공개 전 극장에서 한번 더 보려 한다.

글로리아 먼디 (Gloria Mundi) – 불행의 열차는 멈추지 않는다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 로베르 게디기앙 감독은 지난 30년간 개인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회 시스템을 날 선 태도로 비판했다. [글로리아 먼디] 또한 프랑스 마르세이유의 노동계층 서민들의 고단한 삶과, 잘못된 선택과 순간의 실수로 인생이 불행의 늪에 서서히 가라앉는 모습을 그린다. 등장인물 모두가 우리 주위에 있을 만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인물들의 상황이 변하는 걸 보면 마치 사회가 이들을 끝이 어딘지 모를 나선형 미끄럼틀에 올려놓고 등을 밀어버린 것 같다.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자 아리안 아스카리드를 비롯한 배우들의 현실감 가득한 연기는 세상 어딘가에 저런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란 생각을 들게 한다. 무엇보다 이들의 불행이 시작된 게 세상의 모든 영광을 누릴 자격이 있는 아기의 탄생이라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