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포스터. 고민 끝에 탄생한 포스터는 한 장의 이미지로 영화를 표현하고 상상력과 호기심을 유도하며 호감을 자아낸다. 잘 만든 포스터는 그 자체로 영화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마케팅이 된다.

따라서 마케팅 효과를 높이기 위해 개봉 국가의 현지 상황(문화, 배우 인지도, 종교 등)에 맞게 포스터를 수정할 때가 많은데, 간혹 영화의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 이미지로 곤혹스럽게 할 때가 많다. 경우에 따라 정치 혹은 사회적으로 민감한 논란을 부를 때도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한다.

이미지: Universal Pictures

E.T.(E.T. The Extra Terrestrial)

영화만큼이나 포스터도 유명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SF 영화 [E.T.]. 지구를 탐색하러 왔다 홀로 낙오된 외계인과 외로운 소년 엘리엇의 우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내어 많은 관객의 눈물샘을 훔치며 폭발적인 흥행을 거둔 작품이다.

[E.T.] 포스터는 훈훈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신비로운 이미지로 형상화해 지금도 회자되는 잘 만든 포스터로 꼽힌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에 영감을 얻어 우주를 배경으로 두 주인공이 손가락을 맞대는 포스터와 푸르게 빛나는 달을 뒤로 하늘을 나는 자전거를 실루엣으로 담아낸 포스터가 유명하다. 그런데 이 신비로운 감성의 포스터가 해외에선 다른 느낌으로 재탄생했다. 그 예로 폴란드에서는 오리지널 포스터의 동화 같은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소 기괴한 느낌의 삽화로 대체되었다. 주름이 가득한 외계인을 보고 있으니 전 세대를 아우르는 모험 영화보다 마니아를 위한 컬트영화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미지: Paramount Pictures

컨택트(Arrival)

드니 빌뇌브의 SF 영화 [컨택트]가 원제와 달라진 국내 개봉명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을 때, 홍콩에서는 포스터가 파장을 불러왔다. 지구 곳곳의 상공에 나타난 12개의 외계 비행 물체(쉘)를 형상화한 포스터에서 홍콩 빅토리아항을 배경으로 한 포스터에 어울리지 않는 건축물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상하이를 상징하는 동방명주가 마치 홍콩 스카이라인의 한 부분처럼 들어선 것이다.

이는 즉각적으로 중국과 정치적으로 분열된 홍콩을 자극했고, #HongKongisnotChina라는 해시태그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결국 제작사 파라마운트는 홍콩인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포스터를 삭제하고 성명을 발표했으나 중국이란 거대한 시장을 의식했는지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는 사과를 표하는 대신 모호하게 둘러대고 책임을 회피했다.

이미지: 20th Century Fox

스타워즈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Star Wars : Episode IV – A New Hop)

지금의 마블 영화보다 먼저 영화를 넘어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 된 [스타워즈]. 당시 척박했던 SF 영화에 스페이스 오페라로 불리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지금까지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주 블록버스터의 시초가 된 1977년작 [스타워즈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 포스터에서 루크 스카이워커와 레아 공주는 시스의 암흑 군주 다스 베이더의 기세에 굴하지 않고 늠름하고 당찬 자태를 뽐낸다.

덕분에 해외 매체가 선정한 베스트 포스터로 꼽히기도 했는데, 이탈리아로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으스스한 존재감을 뽐내던 다스 베이더는 사라지고, 루크 스카이워커와 레아 공주의 육체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미지: Walt Disney Studios Motion Pictures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Star Wars: The Force Awakens)

J.J. 에이브럼스가 연출을 맡아 새로운 인물과 함께 돌아온 스타워즈 새 시리즈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는 영화에 대한 호불호는 차지하더라도 중국 버전 포스터가 좀 많이 이상하다.

극중에서 데이지 리들리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 보예가의 비중이 포스터에서 확 줄어든 것이다. 오리지널 포스터에서는 한 솔로의 해리슨 포드, 레아 공주 역의 캐리 피셔와 대등한 비중을 차지하지만, 중국 버전 포스터에서는 BB-8와 비중을 바꿔치기한 듯 조그맣게 축소됐다. 그뿐인가. 포 대머론 역의 오스카 아이삭과 마즈 카나타 역의 루피타 뇽오는 완전히 지워졌다. 인종차별적 시선이 반영된 포스터가 [스타워즈]가 지향하는 가치관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다.

이미지: Walt Disney Studios Motion Pictures

블랙 팬서(Black Panther)

또 다른 디즈니 영화 [블랙 팬서]도 인종차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최초의 흑인 히어로 단독 영화임에도 주연 배우 채드윅 보스만의 얼굴을 가면을 쓴 풀착장으로 가려버린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그는 온몸을 블랙 슈트로 감싸고 활약하지만, 배우도 함께 강조한 포스터에서 채드윅 보스만의 흔적을 지워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블랙 팬서]는 개봉 후 북미를 비롯 전 세계적인 흥행을 거두었지만, 세계 영화 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국에서는 [툼 레이더]에 밀려 1주일 만에 박스오피스 1위에서 물러났다. [블랙 팬서]는 중국 개봉 열흘 만에 1억 달러를 돌파했는데, 바로 전에 개봉한 마블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의 최종 성적 1억 1200만 달러에는 못 미친다.

이미지: Fox Searchlight Pictures

셰임(Shame)

스티브 맥퀸 감독의 영화 [셰임]은 육체적 쾌락에 집착하는 섹스 중독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파격적인 소재와 노골적인 성적 표현으로 미국에서 NC-17 등급 판정을 받는 등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지만, 자극적인 노출을 우선시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보다는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 소통의 부재를 탐구하는 작품에 가깝다.

포스터 역시 영화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노골적인 표현으로 눈길을 끌기보다 극의 분위기를 암시하는 방식을 택했다. 다만, 헝가리의 홍보 담당자는 [셰임]을 다르게 봤던 것 같다. 점점 수위 높은 쾌락을 탐닉하는 브랜든을 연기한 마이클 패스벤더의 상반신에 ‘Shame’ 철자 형태로 체액이 흘러내리는 이미지의 포스터를 배포한 것. 영화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다면 성애 영화로 오해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미지: Summit Entertainment, variety

노예 12년(12 Years A Slave)

스티브 맥퀸 감독 영화의 수난은 [노예 12년]에서도 계속된다. 이번에는 더 심각하다. 아카데미 3관왕에 빛나는 [노예 12년]은 노예 수입이 금지된 1840년대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던 흑인 남성이 어느 날 갑자기 납치되어 노예로 팔린 뒤 필사의 탈출 과정을 그린다. 차별의 형태는 달라도 현재도 계속되는 인종차별을 소재로 묵직한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다. 하지만 이탈리아 영화 관계자는 이를 가볍게 넘긴듯하다.

[노예 12년]에서 출연 분량이 고작 5분가량 되는 브래드 피트가 마치 주연 배우처럼 포스터의 정중앙을 차지한 것이다.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주인공 솔로몬을 연기한 치웨텔 에지오포의 비중이 형편없이 축소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영화의 줄거리를 모른 채 포스터만 보고 영화관에 갔다면 난감할 게 뻔하다. 브래드 피트의 인지도가 높다고 해도 영화를 오해할 만큼 포스터를 바꾼 것은 곤란하다.

이미지: Warner Bros

매트릭스(The Matrix)

1980년대 가정용 비디오테이프가 서아프리카의 가나에 상륙하면서 이동식 극장이 생겼다. 그들은 휴대용 발전기와 TV, VCR을 갖추고 도시 근교와 시골을 떠돌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부터 홍콩, 인도, 나이지리아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이동식 극장을 홍보하고 상영작을 알리는 데 필요한 어떤 공식 자료를 얻을 수 없었다.

그렇게 탄생한 게 사람 키만 한 높이의 캔버스에 그린 놀랍도록 이상하고 기괴한 포스터다. 그림 속 인물이 실제 배우와 다르고 포즈도 어색하다고? 그럴 수밖에 없다. 포스터를 그린 사람들은 전문가가 아닌 아마추어 화가인 데다, 사전 정보가 부족할 때도 많았다. 이동식 극장의 유일한 홍보 수단인 이 포스터는 도로변이나 시장 등 공공장소에 전시되어 사람들의 흥미를 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