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cliché)는 좋게 말해 ‘공식’, 나쁘게 말해 ‘진부한 표현’이다. 해마다 수백 편의 영화가 나오고, 습관적인 표현이나 이야기가 반복되어 왔다. 슈퍼히어로 영화도 마찬가지다. 특히 요즘처럼 슈퍼히어로 영화 전성시대를 맞아 클리셰는 빠르게 굳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런 뻔한 장치를 타파하고 새로운 시도로 예상 밖의 재미를 준 작품도 분명 있다. 슈퍼히어로 영화의 대표적인 클리셰를 살펴보고, 이를 과감하게 벗어나거나 비틀어 더 큰 사랑을 받은 작품들을 살펴본다.

클리셰 1. 정체를 감춘다

부순 영화들: ‘아이언맨’을 비롯 대부분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많은 슈퍼히어로들이 복면을 쓰거나, 슈트를 입고 정체를 감춘다. 가장 큰 이유는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배트맨]과 [슈퍼맨]을 들 수 있다.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반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영웅도 있다.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가 대표적인 예다. 처음에는 그도 슈트를 입고 정체를 감췄다. 1편에서 아이언 몽거와 대결한 후 이를 수습하려는 기자회견에서 아이언맨의 정체를 부정하려 했다. 그랬다면 슈퍼히어로 시대를 선언하는 명대사 “나는 아이언맨이다”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언맨] 뿐만 아니라 마블 영웅들 대부분 정체를 굳이 감추지 않는다. 시민들에게 스스럼없이 사인을 해 줄 정도다. 정체를 감추지 않아 사생활과 영웅의 고뇌가 더욱 밀착해 현실적인 영웅이 탄생할 수 있었다. 뻔히 누군지 다 아는데 아닌 척해야 하는 불필요한 이야기도 줄고.

클리셰 2. 악당은 무조건 나쁘다

부순 영화들: 스파이더맨 & 배트맨 시리즈, 조커

이미지: 콜럼비아트라이스타

[스파이더맨]과 [배트맨] 시리즈가 큰 인기를 얻은 이유 중 하나는 매력적인 악당에 있다. 이들 악당은 절대 악의 존재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어 공감대를 갖는다. 인류에게 보다 나은 에너지를 주기 위해 무리하게 실험하다 악당이 된 닥터 옥토퍼스, 감옥에서 탈출했지만 아픈 딸을 만나고 싶은 아빠의 마음이 있었던 샌드맨 등 [스파이더맨]에 등장하는 악당은 무조건 나쁘다고 배척하기 힘든 양가적인 면을 드러낸다.

이미지: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배트맨]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다크 나이트]에는 고담의 평화를 지키려고 했지만 내부의 배신으로 모든 것이 무너진 투페이스가 있고, [조커]에서 아서 플렉은 자신을 무시하고 짓밟는 사람들로 인해 조커로 변해간다. 물론 그들이 저지른 일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들이 타락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모순을 함께 담아내면서 인간적인 공감대를 형성한다.

클리셰 3. 위기의 순간, 연설로 뭉치게 한다

부순 영화들: 다크 나이트

위기의 순간 연설로 용기를 북돋우고 감동을 주는 장면은 슈퍼히어로뿐만 아니라 액션, 재난 영화에도 흔한 클리셰다. 주인공이 지친 동료들에게 “힘내자”라며 일장연설을 하면, 사람들은 그에 감명받고 젖 먹던 힘까지 낸다. 그러나 나와도 너무 나와 이제는 진부한 표현이 되었다.

이미지: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다크 나이트]는 이런 클리셰를 뒤집는다. 고담의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투페이스가 추락해 죽자 배트맨은 고든 경감에게 자신이 죽였다고 밝히라고 한다. 사람들이 믿는 희망을 저버려서 안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비난을 받든, 경찰에게 쫓기든 상관없이 적으로 만들고, 투페이스의 죽음을 위대한 희생으로 남기길 바란다. ‘배트맨’이라는 타이틀을 버리면서 택한 제목 ‘다크 나이트’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촌스러운 연설 없이 말이다. 클리셰를 뒤집어 만든 최고의 엔딩이자 큰 울림을 준 명장면으로 꼽힌다.

클리셰 4. 중요한 순간에 납치당하는 슈퍼히어로의 연인

부순 영화들: 아이언맨 3, 앤트맨, 아쿠아맨

어떤 위기를 해결하고 한숨 돌릴 때쯤 악당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네 연인을 납치했다!” 슈퍼히어로는 연인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지만 함정에 빠진다. ‘중요한 순간에 납치당하는 주인공의 연인’은 슈퍼히어로뿐만 아니라 대부분 장르 영화가 반복하는 클리셰다.

이미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최근 들어 이 같은 클리셰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아이언맨 3]에서 페퍼는 1편과 마찬가지로 납치당하지만 해결 방법은 다르다. 자신에게 주입된 익스트리미스 파워를 역이용해 토니 스타크도 해치우지 못한 킬리언을 없애 버린다. [앤트맨]에서 와스프, [아쿠아맨]에서 메라는 연인이 아닌, 힘을 가진 강력한 파트너로 공동의 적을 함께 무찌른다. 로맨스가 싹트는 건 덤이다. 이 같은 클리셰 부수기는 연인 캐릭터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시대의 변화를 담은 것과 동시에, 케미 파워까지 더해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클리셰 5. 슈퍼히어로는 언제나 정의롭다

부순 영화들: 데드풀

[어벤져스], [캡틴 아메리카]에서 스티브 로저스는 리더로서 투철한 정의감을 가지고 있지만 고지식하다.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도 정의를 지키려는 모습이 대단하지만 안쓰럽다. 슈퍼히어로는 언제까지 높은 수준의 정의감을 요구받아야 할까? 이 같은 모습은 작품의 주제의식을 강력하게 전달하지만, 그만큼 캐릭터에 쉽게 질려버리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미지: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그래서 [데드풀]은 정의 찬가에 지친 슈퍼히어로 영화에 맛있는 불량식품 같다. 그에게 세계평화, 투철한 정의감 같은 것은 애초에 없다.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녀석들을 해치우기 위한 복수심만 있을 뿐, 슈퍼히어로의 절대 금기인 ‘살생’도 밥 먹듯이 한다. 자신이 죽인 악당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질 리도 없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짓궂은 농담으로 그만의 매력으로 승화시킨다. 이처럼 데드풀은 슈퍼히어로가 할 수 없는 금기를 뻔뻔하게 넘나들며, 정의로운 슈퍼히어로에 대한 피로도를 시원하게 날려버린다.

클리셰 6. 슈퍼히어로를 반대하는 경찰/정부

부순 영화들: 어벤져스 & 배트맨 시리즈

슈퍼히어로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모두 민간인이다. 법적으로 공권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인물은 거의 없다. 그렇기에 많은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정부나 경찰은 그들의 활약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는 슈퍼히어로 법안을 만들어 그들의 행동을 제약하려 하고, [배트맨]에서 경찰은 그를 범법자로 규정하고 추격하는 일도 벌어진다. [아이언맨]에서 정부는 토니 스타크에게 슈트를 넘기라고 종용한다. 

이미지: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반대로 슈퍼히어로의 목적을 공감하는 이들도 있다. [배트맨]의 고든 경장과 [어벤져스]의 닉 퓨리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현재의 공권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빌런들을 상대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슈퍼히어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원칙보다 대의를 우선순위에 둔 덕분에 슈퍼히어로들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탁상공론에 그치는 정부기관과 대비되어 세상에 슈퍼히어로가 필요한 이유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클리셰 7. 영웅은 죽지 않는다

부순 영화들: 어벤져스: 엔드게임, 로건

많은 영웅들은 필연적으로 죽을 위기를 겪지만 끝내 이겨내거나, 설사 죽었다고 해도 다음 편에서 부활해 팬들의 환호를 받는다. 시리즈의 명맥을 위해서라도 죽을 뻔한 위기에서 탈출하는 영웅의 모습은 흔하게 반복되어 왔다.

이미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하지만 과감하게 영웅을 죽였기에 더 빛나는 영화도 있다. 대표적으로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토니 스타크와 [로건]의 울버린이다.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한 두 영웅의 죽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울렸다. 정들었던 캐릭터와 이별하는 것은 해당 배우와 보는 관객 모두에게 슬픈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이 있기에 영화의 감동은 더욱 빛났고 시리즈의 마침표를 멋지게 찍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