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 6社 (이제는 5社 )는 전 세계 영화 산업을 이끌었다. 지난 몇 년간 영상 시청과 감상 문화가 바뀌면서, 스튜디오는 극장과 스트리밍 서비스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인터넷 위에서 전 세계 최대 미디어 기업들이 사활을 건 전투를 벌인다면, 기업의 자회사인 스튜디오는 변화에 맞춰 성격을 재규정하고 있다. 내, 외부에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스튜디오들이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최근 할리우드 리포터는 흥미로운 라운드테이블을 개최했다. 사상 처음으로 할리우드 5대 메이저 스튜디오(워너 브라더스, 파라마운트, 디즈니, 유니버설, 소니 픽쳐스)를 이끄는 대표들과 시대 변화의 선봉에 선 넷플릭스, 아마존의 대표를 한 자리에 초대했다. “제한도 없고, 쉬운 대답도 없다”라는 타이틀만큼 이들은 “할리우드에서 영화 사업을 하는 것”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았다. 주목할 만한 내용을 정리했다.

대담 참가자
토비 에머리히 (워너 브러더스 영화부문 회장), 짐 지아노풀로스 (파라마운트 회장 & CEO), 앨런 혼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공동 회장 및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 도나 랭글리 (유니버설 영화 엔터테인먼트 그룹 회장), 톰 로스먼 (소니 영화 그룹 회장), 스콧 스튜버 (넷플릭스 영화 부문 총 책임자), 제니퍼 살케 (아마존 스튜디오 책임자)

디즈니 천하는 계속될까? 마블이 더 이상 쿨하지 않다면?

이미지: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디즈니의 2019년 미국 박스오피스 점유율은 40%까지 올랐다(20세기 폭스 포함). [캡틴 마블], [어벤져스: 엔드게임], [토이 스토리 4], [알라딘]이 큰 성공을 거뒀고, [겨울왕국 2]와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는 개봉을 앞두고 있다(‘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 국내 개봉은 2020년 1월). 디즈니의 전략은 명확하다. 이미 검증된 프랜차이즈의 속편과 리메이크 영화를 만들되, 다른 스튜디오보다 적게 만들어 개봉한다는 것이다.

앨런 혼은 디즈니가 실사 영화로 제작할 명작이 언젠가는 다 떨어질 것이라 인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알라딘]과 [라이온 킹] 같은 영화도 있지만 [말레피센트], [크루엘라] 등 원작을 비튼 작품도 만들었다. 마블 스튜디오가 영화 23편을 연속으로 흥행시킨 건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앨런 혼은 이를 인정하면서도 “마블 영화를 보는 게 더 이상 쿨하지 않을 시기가 올까?”라는 질문엔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마블 스튜디오는 1년에 영화 3~4편뿐 아니라 디즈니+ 실사 미니시리즈와 애니메이션 시리즈도 제작한다. 앨런 혼은 마블 영화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설득력 있는 스토리, 인간적 면모, 유머가 담긴 일정 퀄리티의 영화가 나온다면 20편이 아니라 30편, 40편 연속 히트가 가능할 것이라 보고 있다.

넷플릭스, 아마존의 시청자 수 공개 & 박스오피스 수치 공개 필요성

이미지: 넷플릭스

넷플릭스와 아마존은 스트리밍 서비스의 시청자 수 공개를 꺼린다. 작년부터 넷플릭스가 실적 보고서를 통해 몇몇 히트작의 성적을 공개하고 있으나, “검증되지 않은 데이터”라 신뢰를 얻지는 못한다. 스콧 스튜버는 넷플릭스가 시청률을 공개하지 않았던 것은 창작자들이 시청률에 구애받지 않고 작품을 만드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라 설명했다. 다만 앞으로는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더 많은 데이터를 공개할 것이라 밝혔다.

민디 케일링 주연 [레이트 나이트]의 극장 상영 성적이 예상에 못 미치자 아마존이 거액을 지불하며 영화 배급권을 획득한 데에 의심의 눈길이 머물렀다. 하지만 제니퍼 살케는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가 작품을 선택하고 배급하는 기준은 다른 기업과 다르다고 설명했다. 프라임 비디오는 전 세계 프라임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하며, 이들이 [레이트 나이트]를 좋아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에 배급권을 얻었다고 밝혔다. 아마존은 [레이트 나이트]의 미국 내 스트리밍 권한만 가지고 있는데, 시청자 수는 (구체적 수치는 공개하지 않았으나) [맨체스터 바이 더 씨]와 비슷하다.

영화의 성공을 측정하는 박스오피스 수치는 왜 중요할까? “산업 규모 측정에 도움이 되고, 기업의 성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며, 창작자를 널리 알리는 데 도움을 준다(도나 랭글리).” 하지만 박스오피스 성적과 작품의 퀄리티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해지면 영화의 완성도와 창작자의 노력을 절하한다(톰 로스먼). 단기 박스오피스 결과에 집중하면 영화가 얻어야 할 기회를 주지 못하기 때문에(토비 에머리히),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려면 기대감을 잘 관리해야 한다 (짐 지아노풀로스).

도박이 된 극장 상영, 스타 파워는 유효한가?

이미지: 소니픽쳐스 코리아

극장 상영이 메이저 스튜디오 제작 영화에도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가 왔다. 랭글리는 “5~10년 전만 해도 시각 효과 좋고 스펙터클이 보장되면 어떤 지역에선 잘 됐고, 코미디도 웃기기만 하면 퀄리티가 상관없는 시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영화가 ‘그저’ 좋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쁜 영화가 성공할 확률은 낮아졌고, A급 영화 스타도 흥행을 보장하지 못한다. 디즈니처럼 예전 히트작을 다른 형태로 만드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극장 상영되는 영화는 넷플릭스 등 스트리밍 서비스뿐 아니라 게임 등 여가를 보내는 다양한 서비스와 경쟁해야 한다. 홈비디오 시장도 스트리밍으로 대체되며 부수적인 서비스도 장담할 수 없는 지금, 극장 사업은 톰 로스먼의 말대로 “아예 바닥이라는 게 없는데, 천장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히트작은 더 크게 히트하고, 실패작은 더 크게 실패한다.”

A급 스타를 출연시킨 작품도 제작비의 절반도 회수하지 못하거나 대형 프랜차이즈도 실패해 제작사에 극심한 손해를 안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일각에선 배우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올해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제작한 소니의 경우, 절대 그렇지 않았다 (로스먼). 순수 오리지널 영화가 히트하려면 각본도 좋아야 하지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브래드 피트, 마고 로비 등 스타들의 출연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것이다.

극장 상영 영화와 스트리밍 서비스 영화를 가르는 기준

이미지: 넷플릭스

문제는 극장성(theatricality)이다. 극장 흥행 성공을 담보하기 위해서 스튜디오는 검증된 IP를 확보하고, 거액의 출연료를 주며 스타를 섭외하며, 제작과 마케팅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는다. 단계마다 신중한 결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영화가 기준에 충족하지 못하면, 앞에 언급한 것처럼 극장 상영이 ‘사치’가 되어버린다.

그러면 한 작품이 극장 상영을 할 만한지, 또는 스트리밍 서비스에 적합한지 어느 시점에서 결정해야 할까? 파라마운트는 올해 초부터 넷플릭스와 오리지널 영화 제작 공급을 합의했다. 짐 지아노풀로스는 프로젝트 기획개발 단계에서 극장과 스트리밍 서비스 공개를 결정할 때, 이 질문을 던진다고 말했다. “영화가 잘 되긴 할 텐데, 여기에 마케팅 비용으로 3천, 4천, 5천 달러를 쓸 것인가?” 하지만 스트리밍 서비스에 공개한다고 해서 B급 영화이고, 극장 상영을 해서 A급이라는 뜻은 아니다.

마틴 스콜세지의 [아이리시맨]의 경우를 보자. 1억 5천만 달러라는 제작비로 만든 3시간 30분짜리 시대극. 어느 스튜디오도 명운을 건 도박을 할 수 없었고, 프로젝트는 여러 투자배급사를 전전한 끝에 11월 27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된다(그 전에 최장 4주간 일부 지역에서 극장 상영). [아이리시맨]은 스트리밍 서비스용 영화로 기획되지 않았고, 메이저 스튜디오가 망설일 때 넷플릭스가 제작비를 지급한 것이다. [아이리시맨]의 극장성은 창작자, 제작사가 아니라, 투자배급사의 속성이 결정했다. “결국 재정 문제다(혼).”

[더 헌트]의 개봉 취소, [조커]의 대성공과 영화의 폭력성

이미지: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올해 미국 내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잇달아 벌어지며 유니버설과 워너 브라더스의 희비가 엇갈렸다. 유니버설의 [더 헌트]는 트레일러까지 공개하고 개봉이 무기한 연기되었지만, 워너 브러더스의 [조커]는 [데드풀]을 따돌리고 R등급 영화 전 세계 흥행 1위를 기록했다. 도나 랭글리는 [더 헌트] 마케팅에 가장 힘을 많이 실어야 할 때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마케팅을 취소하고 개봉을 연기한 것은 당시로는 옳은 선택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영화가 우려한 만큼 영향을 미쳤을지는, 지금으로선 아무도 모른다.

[조커]의 개봉도 논란과 우려를 불러왔다. 상영 당일 경찰과 군이 특별 경계령을 내리고, AMC에선 얼굴을 가리는 코스프레를 금지할 만큼 안전에 주의를 기울였다. 2012년 오로라 극장 총격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영화가 폭력을 조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토비 에머리히는 “총격 사건은 ‘조커’와 관계가 없다.”라고 선을 그으며, “우리는 영화가 정말 훌륭한 작품이라 판단했고,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으로 확신을 굳혔다”라고 말했다. 지아노풀로스의 말대로, 스튜디오가 할 일은 “창작자의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되 특정한 책임과 선을 정하는 것”이다.

중국의 검열 문제와 문화적 민감성

이미지: Walt Disney Studios

중국 정부의 검열 문제도 화두였다. 중국 정부는 영화 내용을 규제할 뿐 아니라 자국 스타들을 이용해 정부의 정책을 선전한다. [뮬란] 주연배우 유역비가 홍콩 경찰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히며 소셜 미디어에서 #보이콧뮬란 운동이 벌어졌고, 비정치적이고자 했던 디즈니는 난처해졌다. 혼은 “표현의 자유는 중요하며, 원하는 말은 자유롭게 해야 한다.”라는 개인의 의견을 밝히면서도, 동료들에겐 “어떤 발언이든 언론에 인용될 수 있고 특정한 책임을 수반하는 것을 명심하라.”라고 당부한다고 말했다.

지아노풀로스는 중국의 정책에 따르는 것을 거대 시장에 대한 ‘아첨’으로 보는 시각을 지적한다. 중국이 최대 영화 시장이 되며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게 문제가 됐지만, 중국만 그런 건 아니라는 것이다. 말레이시아나 인도 등 다른 곳도 몇 년간 영화 검열을 해 왔는데, 다른 나라의 정책을 따르면 ‘문화적으로 민감한’ 조치가 되고, 중국에선 ‘아첨’이 된다고 비판한다. 다만 중국에서 크게 흥행하는 영화는 중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분노의 질주]가 중국에서 흥행하는 이상 중국인 빌런을 보기는 어렵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