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드라마에서 인물의 의상은 단순한 소품에 그치지 않는다. 의상은 캐릭터의 색채를 구현하는 주요 장치로 쓰인다. 인물의 성격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의상은 다채롭게 나타나는 데, 개성 강한 캐릭터일수록 그들이 입는 옷은 남다르다. 멀리서 걸어오기만 해도 누군지 알아볼 만큼 톡톡 튀고, 어떤 때는 따라 입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멋지기도 하다. 드라마 속 배우들처럼 멋스럽게 소화할지는 의문이지만, 패션 교본으로 삼고 싶은 패셔니스타를 소개한다.

이미지: 넷플릭스

더 폴리티션(The Politician) – 아스트리드(루시 보인턴)


[글리],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의 제작자 라이언 머피가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한 [더 폴리티션]은 재기 넘치는 이야기와 화려한 볼거리로 무장했다. 대통령을 꿈꾸는 고등학생 페이튼이 학생회장에 출마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영락없이 현실 정치를 닮았고,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은 저마다 뚜렷한 개성이 넘친다. 그중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인물이 있으니, 페이튼의 입지를 좁히며 위협하는 경쟁자 아스트리드다. [보헤미안 랩소디]로 잘 알려진 루시 보인턴이 연기한 이 인물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감이 넘치는 스타일링으로 단연 눈길을 사로잡는다. 냉소적이고 차가운 이성과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패션이 자연스러운 매치된다. 극중에서 일관되지 않은 선거 전략은 아쉽지만, 겉보기와 다른 복잡한 속사정은 아스트리드란 인물에 묘한 연민을 불러온다.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기로 한 그의 진정한 활약을 다음 시즌에서 계속 볼 수 있길 기대한다.

이미지: HBO

유포리아(Euphoria) – 줄스 본(헌터 샤퍼)


10대들의 방황과 일탈은 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올해 6월 출격한 HBO 새 시리즈 [유포리아]는 마약, 범죄, 섹스, 폭력, 소셜미디어에 노출된 Z세대의 어두운 단면을 과감한 스토리텔링과 감각적인 영상으로 그려낸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젠다야가 약물중독자 17세 루로 분해 기존에 볼 수 없던 파격적인 연기를 선보이며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10대들의 세계로 초대한다. 루를 비롯해 저마다 내면의 상처와 고통에 맞서는 10대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에서 초반부터 강력하게 시선을 고정하는 인물이 있다. 루와 우정을 쌓는 전학생 줄스다. 유난히 하얀 피부와 금발 머리, 신비로운 이미지를 부각하는 독특한 메이크업, 10대 만의 발랄함을 드러내는 상큼하고 화사한 의상, [유포리아] 이전까지 연기 경력 전무한 헌터 샤퍼는 모델 출신이라는 자신의 강점을 살려 루 못지않게 혼돈 가득한 이중생활을 하는 트랜스젠더 줄스를 자연스럽게 소화한다.(헌터 샤퍼는 트랜스젠더 배우다) 겉보기엔 상냥하고 온화한 성격의 10대 소녀로 보이지만, 복잡하고 어두운 속사정은 계속해서 줄스를 돌아보게 한다.

이미지: HBO

왓치맨(Watchmen) – 안젤라 아바(레지나 킹)


드라마로 재편되어 돌아온 [왓치맨]은 원작 코믹스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다. 1921년 미국 최악의 인종학살사건이 벌어졌던 오클라호마 털사로 무대를 옮겨 노란색 마스크를 쓰고 신분을 감춘 (비밀)경찰과 제7기병대라 불리는 백인우월 집단의 대립을 담아낸다. 원작의 세계관을 차용해 새로운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는 평소에는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상황이 발생하면 자경단으로 변신하는 안젤라 아바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영화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레지나 킹이 시스터 나이트란 히어로 네임을 가진 안젤라 아바를 연기하는데, 그의 히어로 의상은 정말 근사하다. 대개 히어로들이 보기만 해도 답답하게 몸에 딱 붙고, 때에 따라 색도 선명하고 화려한 데 반해, 그의 의상은 눈에 띄는 기교 대신 실용성과 품위를 택했다. 복면을 쓴 자경단은 새롭지 않지만, 검게 칠한 눈과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 신비감을 더하고 흰색 터틀넥과 후드 망토 원피스로 개성을 살린다. 가죽 벨트에 찬 배지와 길게 늘어뜨린 묵주도 멋스러움을 더한다. 그가 앞에 있다면 위풍당당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주눅 들지 않을까.

이미지: 넷플릭스

포즈(Pose) – 프레이 텔(빌리 포터)


최근 넷플릭스에 두 번째 시즌이 공개된 [포즈]는 8~90년대 볼 문화를 화려하게 재현한 드라마다. 보깅이라 불리는 패션 경쟁을 소재로 한 만큼 시종일관 볼거리는 넘치고 인물들은 저마다 형형색색 개성이 돋보인다. 올해 에미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빌리 포터 역시 그중 한 명이다. 프레이 텔은 그 시절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에이즈와 싸우는 인물로 죽음의 공포에 무너지지 않는 모습으로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하지만 역시 그의 진가는 하우스들이 트로피를 두고 경쟁하는 쇼에서 드러난다. 거침없이 독설을 내뱉으며 참가자들에게 무안을 주면서도 환상적인 퍼포먼스는 극찬을 아까지 않는 재기 넘치는 언변과 직접 경쟁 무대로 뛰어들어도 무방할 만큼 탁월한 패션 감각을 가졌다. 게다가 그 모든 걸 자연스럽게 소화한다. 그 덕분일까, 시즌 2에서는 뜻밖의 로맨스의 주인공이 된다.

이미지: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마블러스 미세스 메이즐(The Marvelous Mrs. Maisel) – 미리암 ‘밋지’ 메이즐(레이첼 브로스나한)


아마존 오리지널 시리즈 [마블러스 미세스 메이즐]은 1950년대 후반 여성의 홀로서기를 그린다. 밋지는 뉴욕의 고급 아파트에서 완벽한 남편과 두 아이를 둔 엄마의 삶에 만족했지만, 어느 날 모든 게 뒤바뀌는 사건이 발생한다. 믿었던 남편의 외도, 그날 이후 밋지는 우연히 발견한 숨은 재능 스탠드업 코미디의 꿈에 도전하며 독립에 나선다. 드라마는 여성차별이 일상적이던 시절 자신의 꿈과 행복을 위해 당당하게 부딪히는 밋지의 모습을 사랑스럽고 활기차게 묘사한다. 처음으로 드라마 주연을 맡은 레이첼 브로스나한은 밋지 역에 제격이고, 1950년대 중산층 여성의 우아하고 로맨틱한 패션은 감탄을 자아낸다. 특히 패션은 제2의 주인공이라 불러도 될 만큼 매 순간 호사스러운 즐거움을 안긴다. 빈티지 색감의 클래식한 의상은 그 시절 화보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일 만큼 매력적인데, 한 벌쯤은 갖고 싶기도 하다.

이미지: 왓챠플레이

킬링 이브(Killing Eve) – 빌라넬(조디 코머)


[킬링 이브]는 첩보물에서 기능적인 조력자로 그쳤던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서면서 짜릿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MI5 요원 이브와 킬러 빌라넬의 집요하게 얽힌 관계가 곳곳에서 예상외의 재미를 선사하는데, 드라마를 보는 즐거움은 또 다른 데서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패션잡지에서 빌라넬에 관한 기사를 열렬히 쏟아낼 수밖에 없는 강렬한 패션이다. 두 시즌 동안 선보인 그의 패션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변덕스러운 성격만큼이나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빌라넬의 의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부담스럽게 화려하고 풍성한 핑크빛 드레스는 무심하게, 10대 소년의 장난기가 담긴 트레이닝복은 태연하게, 옥스퍼드풍의 고급스럽고 단정한 의상은 젠틀하게 소화한다. 그뿐인가, 자신의 넘치는 패션 감각을 이브에게 선물하는 대담한 여유로움도 있다. 이제 이브의 지루한 패션에 변화를 줄 때가 됐다.

이미지: 넷플릭스

사브리나의 오싹한 모험(Chilling Adventures of Sabrina) – 사브리나(키어넌 쉽카)


메이크오버는 TV 리얼리티쇼에서 흔하다. 대상이 무엇이 됐든 분야별 전문가의 손길을 거치면 새롭게 재탄생되어 이전의 평범하거나 촌스럽던 이미지는 싹 잊힌다. [사브리나의 오싹한 모험]의 주인공 사브리나는 조금 다른 경우다. 시즌 1과 2에서 확연히 달라진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그에겐 전문가가 아닌 사악한 마법의 힘의 개입됐다. 시즌 1에서 평범한 삶을 지키려 분투했던 사브리나는 결국 마녀 세계로 입문하고 외형적으로 크게 변화한다. 이전까지 소박하고 단정한 스쿨 룩을 즐겼다면, 원래의 삶과 이별한 후 마녀의 길을 걸으면서 시크하고 세련된 스타일로 바뀐다. 이제 더블 코트 대신 가죽 재킷을 입고, 손톱은 검게 칠하고, 탈색한듯한 금발의 보브컷을 선보이며 귀엽고 사랑스러운 10대 이미지를 탈피한다. 무엇보다 자신감에 찬 도전적인 태도와 표정으로 새로운 스타일을 완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