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분량이지만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준 배우를 씬 스틸러(Scene stealer)라고 한다. 올해 한국영화에도 많은 배우들이 장면을 훔칠 정도의 명연기를 펼쳐 즐거움을 선사했다. 믿.보.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지만, 신선한 마스크와 남다른 재능으로 기대 이상의 열연을 보인 새로운 배우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이들의 활약상을 모아본다. 

기생충 – 박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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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한국영화 속 최고의 등장을 뽑는다면 [기생충]의 ‘근세(박명훈)’가 아닐까. 전원백수 기택네 가족이 박사장 집에 위장 취업하는 이야기를 다룬 [기생충]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올해의 한국영화’다. [기생충]이 이런 평가를 받은 데는 후반부 근세의 등장 때문인데 소소한 코미디인 줄 알았던 영화를 오싹한 스릴러로 바꾸기 때문이다. [기생충]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준 박명훈은 연말 시상식의 단골손님으로 28회 부일영화상 남우조연상과 19회 디렉터스컷 어워즈 ‘올해의 새로운 남자배우상’을 수상했다. 근세는 지하에 숨어 빛을 보지 못하고 살지만, 박명훈은 국내외 영화계에서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벌새 – 김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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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는 중학생 소녀의 성장담을 섬세하게 그려내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다. 신인 답지 않은 박지후의 연기와 에드워드 양의 초기 작품이 떠오르는 김보라 감독의 연출이 돋보인다. 이중 주인공 은희의 고민을 들어주던 한자학원 선생님 영지를 연기한 김새벽의 존재감도 대단하다. 영지는 여러 가지 문제로 힘들어하는 은희를 차분하게 위로하며 작품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다. [벌새]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인 김새벽은 여러 시상식 후보에 올랐고, 39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김새벽은 [벌새] 뿐만 아니라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서 유관순을 도와주는 김향화도 맡아, 주인공에게 힘이 되는 ‘올해의 멘토’로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우리집 – 김나연, 김시아, 주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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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와 더불어 2019년 한국 독립영화에 놓칠 수 없는 작품 [우리집]. 매일 다투는 부모님이 고민인 하나가 자주 이사를 다녀 동네 친구 하나 없는 유미, 유진 자매를 만나는 이야기를 그린다. 아역배우 김나연, 김시아, 주예림은 어른들이 만든 문제에 아이다운 순수한 마음으로 접근하는 세 아이들을 연기했는데,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미소 짓게 하는 연기로 영화에 더욱 빠져들게 한다. 아이들의 숨은 연기력을 발굴하기 위한 윤가은 감독의 노력도 빛난다. 현장에서 세심하게 배려하며 놀이와 연기의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자연스럽게 캐릭터에 빠져들도록 이끌었다. 

미성년 – 김혜준, 박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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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의 주리와 윤아도 [우리집]과 같이 어른들이 만든 문제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이들이다. 주리의 아빠 대원이 윤아의 엄마 미희와 바람을 피우면서 같은 학교에 다니는 딸들이 고생한다. [미성년]은 대한민국 대표 배우 김윤석의 첫 번째 장편영화 데뷔작으로 화제를 모았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실질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김혜준과 박세진이 더욱 돋보인다. 부모들 때문에 학교에서 으르렁거려도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함께 벌이는 소동은 웃음과 공감을 이끌어낸다. 김혜준은 올 초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에서 연기력 논란으로 마음앓이가 심했지만 [미성년]에서의 호연으로 이를 지워내고, 이 작품이 스크린 데뷔인 박세진도 신인 답지 않은 좋은 연기를 선보였다.

신의 한 수: 귀수편 – 원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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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한 수: 귀수편]은 바둑판 위에서 목숨을 거는 이야기로 주인공 귀수와 승부를 벌이는 고수들의 레벨에 따라 흥미가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귀수의 스승 허일도의 팔을 자른 장성무당과 대결은 영화에서 가장 살 떨리는 장면이다. 상대방의 트라우마를 건드려 점점 지옥으로 끌고 가는 장성무당은 존재감이 대단한데, [빙의]에서 무시무시한 살인마를 맡은 배우 원현준이 연기했다. 직접 무당을 찾아가 디테일을 배웠다는 그의 노력은 초반에 잠깐 등장한 캐릭터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영화 끝까지 잊을 수 없게 한다. 

엑시트 – 유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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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시트]는 지난여름 짠맛 나는 재난 블록버스터로 942만 관객을 모아 큰 인기를 얻었다. 조정석과 윤아의 믿고 보는 케미, 기대 이상으로 아찔했던 건물 등반이 화제가 되었는데, “사람 살려주세요”라고 외치던 용남의 사촌동생 용수도 잊을 수 없다. 영화에서 가장 큰 웃음을 줬던 장본인은 배우 윤수빈. [엑시트]는 물론 영화 [선물], 드라마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에 출연했고, 최근 [사랑은 불시착]에서 한류드라마의 마니아 김주먹 역할을 맡아 드라마에서도 씬 스틸러를 노린다. 

나의 특별한 형제 – 안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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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좀 쓰는 형 신하균과 몸 좀 쓰는 동생 이광수가 만나 웃음과 눈물, 감동을 안긴 [나의 특별한 형제]. 두 배우의 뛰어난 연기도 인상적이지만 영화 초반 세하의 아역으로 등장한 안지호도 기대 이상의 몫을 해낸다. 기댈 곳 없는 세하의 절박한 심정을 잘 표현해 초반부터 몰입감을 형성하고, “약한 두 사람이 함께 해야 한다”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호소력 있게 전달한다. 안지호는 [나의 특별한 형제]뿐만 아니라 독립영화 [우리집]과 [보희와 녹양]에도 출연해, 앞으로의 성장을 기대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