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개봉한 수많은 영화 중 기억에서 쉽게 휘발되지 않고 진한 잔상을 남긴 장면들이 있다. 순수한 영화적 즐거움을 안기거나 호기심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혹은 생경한 감정에 몰아넣는 갖가지 장면들은 영화를 더욱 또렷하게 기억하게 한다. 꿈결처럼 잠재의식에 남아있는 인상적인 장면을 올해의 개봉 영화 중에서 찾아봤다.

이미지: (주)쇼박스

미성년 – 추격전

배우 김윤석의 첫 연출작 [미성년]은 부모의 불륜을 알게 된 주리와 윤아를 중심으로 어른 같은 미성년과 그와 대비되는 미성숙한 어른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김윤석은 자신의 첫 연출작에서 평소 가진 마초적인 이미지를 배반하는 우유부단하고 회피하기 급급한 아버지 대원 역을 맡아 마음껏 망가지는데, 병원에서 시작된 추격전은 대원의 무책임한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산한 미희가 입원한 병원에 찾아간 대원이 주리와 윤아를 못 본 척하고 본능적으로 도망가는 장면이다. 대원은 “아빠, 아빠”라고 외치며 자신을 뒤쫓아오는 윤아를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는데, 숨을 헉헉거리며 “누구니, 너?”라고 묻는 장면에 이르면 웃음이 나오면서도 어이없고 허탈하다. 한국영화에서 이만큼 중년 남성의 권위를 무너뜨린 장면은 없을 것이다.

이미지: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애드 아스트라 – 달에서의 추격전

[애드 아스트라]는 지구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밀 프로젝트를 막기 위해 실종된 아버지를 찾아 나선 우주비행사 로이의 긴 여정을 철학적인 메시지와 함께 담아낸다. 달을 시작으로 태양계 끝 해왕성에 이르기까지 기존 SF 영화와 차별화된 비주얼을 선보이는데, 첫 행선지 달에서 벌어지는 추격전은 영화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쾌감을 선사한다. 달의 뒤편 기지로 향하는 로이 일행이 미확인 차량에 쫓기는 장면은 낮은 중력에서 달리는 차량의 움직임을 실감 나게 묘사하기 위해 24~25 프레임으로 이루어지는 다른 영화보다 많은 32~36 프레임으로 촬영한 뒤 슬로모션을 더하고 시간을 지연시키는 과정을 거쳤다. 덕분에 50년 전 아폴로 11호 대원들이 달에서 찍은 영상과 흡사한 분위기를 연출해, 현실감 넘치는 신선한 충격을 전한다.

이미지: TCO(주)더콘텐츠온, ㈜제이앤씨미디어그룹

허슬러 – 폴 댄스

[허슬러]는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직격탄을 맞은 월스트리트의 스트리퍼들이 생존을 위해 대담한 범죄를 벌인 실화를 각색한 작품이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스트리퍼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동안 쉽게 대상화되어 성적 코드만 부각됐던 여성을 주체적인 인격으로 대하고, 그들이 범죄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안팎의 상황을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 감독의 의지는 영화 초반 일찌감치 감지된다. 2008년 이전 쾌락주의가 흥건했던 시절, 부푼 꿈을 안고 뉴욕으로 온 데스티니는 클럽에서 운명처럼 라모나와 마주친다. 데스티니와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전하는 라모나의 첫인상을 떠올려보자. 그가 폴댄스를 추는 장면은 마치 스포츠 경기를 보는 것 같은 박력과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지배한다. 남성 고객들은 라모나에게 열광하지만, 그 사이에는 성적 환상 이상의 동경이 깃들어 있다. 데스티니가 라모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이미지: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존 윅 3: 파라벨룸 – 상점 격투신

아내와 반려견을 잃고 다시 총을 든 존 윅의 세 번째 이야기는 액션 영화에 기대하는 쾌감이 총집결된 종합선물세트 같다. 파문 조치를 당하고 암살자들의 타깃이 된 존 윅이 뉴욕을 탈출하는 초반부 시퀀스는 다채로운 액션을 뷔페처럼 푸짐하게 차려놓았는데, 각종 무기가 진열된 상점에서 쉴 새 없이 칼과 도끼, 총 등을 찌르고 던지고 쏘는 액션은 놀랍도록 짜릿한 쾌감과 혼돈이 혼재되어 있다. 희극적인 동시에 (현실적으로) 잔인하고 끔찍한 이 무분별한 액션을 하나의 안무처럼 완벽하게 연출했다는 점에서 다른 어느 액션 장면보다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이미지: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조커 – 계단

DC 코믹스의 인기 빌런 아서 플렉을 다룬 [조커]는 하반기 화제작 중 하나다. 개봉 전부터 긍정적이든 그렇지 않든 뜨거운 관심을 모으더니 개봉한 이후에도 화제성은 식지 않고 이어졌다. 특히 관객들은 영화의 몇몇 상징적인 장면에 깊은 관심을 갖고 각자의 해석을 내놓으며 몰입했는 데, 사람들을 사로잡은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혼돈과 광기의 조커로 각성한 아서가 춤을 추듯 흐느적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신이다. 아서 플렉의 변화하는 심리를 엿볼 수 있는 계단 장면은 열띤 논쟁을 부르며 강렬하게 각인됐고, 더 나아가 일종의 밈으로 발전해 실제 촬영지에 관광객이 몰리는 현상을 초래했다. 토드 필립스 감독과 호아킨 피닉스는 브롱크스 계단이 뉴욕의 새로운 관광명소가 될지 예상했을까. 영화의 힘이란 참 대단하고, 한편으론 지나치게 과몰입하는 사람들이 염려스럽기도 하다.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기생충 – 방문객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 계층·계급 갈등을 탐구하는 [기생충]은 풍자 코미디로 시작해 스릴러로 전환하는 장르적 기교를 부린다. 장르가 전환되는 문제의 장면은 기택네 가족이 캠핑을 떠난 박사장 가족의 고급스러운 저택을 점령하고 난장 같은 회포를 푸는 중에 일어난다. 잔뜩 긴장이 풀린 기택 가족 앞에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비와 함께 뜻밖의 방문객이 나타난 것이다. 가족의 계략으로 쫓겨난 가정부 문광이 한순간에 꼼짝할 수 없는 불안한 긴장을 조성하며, 수면 아래의 비밀을 불러온다. 박사장 가족을 속인 기택 가족처럼 문광의 속사정이 드러난 후, 영화는 예상치 못한 처절한 비극으로 흘러간다.

이미지: 찬란, (주)팝엔터테인먼트

미드소마 – 의식

[유전]으로 화제를 모은 아리 애스터 감독의 두 번째 영화 [미드소마]는 상실의 고통에 빠진 여성의 기묘한 여정을 그린다. 대니의 삶을 파괴한 가족의 죽음으로 시작해 기괴한 의식으로 막을 내리는 스웨덴 마을의 축제는 충격적인 순간들의 연속이다. 섬뜩한 자살의식, 대니를 둘러싸고 함께 울부짖는 여성들, 끔찍한 화형식 등 ‘치(명적)유(해)물’의 명성에 걸맞은 장면이 수차례 나오는 데, 알고 보면 최악의 남자친구인 크리스티안이 능멸을 당하듯 강제로 성관계 의식을 갖는 장면도 기묘하기 짝이 없다. 대니의 심경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성관계 의식은 크리스티안의 남성성을 기능적으로 취급하며 가부장적 남성 중심사회를 비튼다. 약에 취한 크리스티안의 시선을 반영한듯한 환각적인 분위기도 [미드소마]만의 음습하는 공포를 드러낸다.

이미지: ㈜제이앤씨미디어그룹

경계선 – 야성적인 교감

[경계선]은 올해 가장 잊을 수 없는 낯선 로맨스를 선보인다. 후각으로 타인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티나는 독특한 능력에도 남들과 다른 외모 때문에 열등감과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가던 중 자신과 닮은 듯한 남자 보레를 만나면서 억눌린 욕망에 눈뜨고 정체성을 찾아간다. 묘한 긴장 속에 점차 가까워진 두 사람이 벌거벗은 채 숲속을 뛰어다니다 호수에 뛰어들어 동물적인 교감을 나누는 장면은 영화 초반 티나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구더기를 잡아먹는 보레의 모습만큼이나 강렬하다. 세상의 모든 관습을 거부하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과감히 무너뜨렸기에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다.

이미지: ㈜올스타엔터테인먼트

하이 라이프 – 오르가즘

[하이 라이프]는 드물게 SF와 에로티시즘이 만난 영화다. 한 무리의 범죄자들이 실험체가 되어 태양계 너머 우주 공간으로 향하지만, 점차 폐쇄적인 우주선에서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무너지기 시작한다. 인간의 본능과 인류의 운명을 건 실험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은 어두컴컴한 외딴 방에서 욕구를 해소할 수 있을 뿐이다. 죄수들을 데리고 기묘한 실험을 총괄하는 과학자 딥스가 그곳에서 벌이는 행위는 영화 사상 기묘한 섹스신으로 남을 듯하다. 줄리엣 비노쉬가 어둠에 쌓인 채 황홀하게 몸부림치며 절정에 도달하는 장면은 입을 틀어막고 볼 수밖에 없는 기이한 긴장이 압도한다.

이미지: (주)엣나인필름

벌새 – 우는 남자들

1994년을 살아가는 14살 은희의 일상은 영화 속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방식은 달라도 은희가 느끼는 감정은 일상의 사소한 순간에서 마주치는 감정과 맞닿아 있다. 은희를 억누르는 가부장적 가족 관계는 폭력과 부조리가 만연한 사회를 압축한 것 같은데, 아들에게만 관심을 두는 아버지와 동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오빠가 쏟아내는 눈물은 의아한 감정을 자아낸다. 무엇이 미안하고 슬퍼서 운 것일까. 눈물을 흘린 당시에는 진심이 담겨있을지라도 가족 관계에서 은희가 느끼는 무게는 달라지지 않았을 텐데. 이 괴리감은 [윤희에게]의 전남편과 [82년생 김지영]에서 대현이 흘린 눈물에서도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