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나 시대, 공간 등 특정 기준에 따라 여러 개의 에피소드가 결합된 앤솔로지.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독립된 이야기로 전개되기도 하고, 또는 하나의 중심 사건에서 파생된 별개의 이야기가 촘촘하게 맞물리며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진 요즘, 아래에 소개하는 다양한 유형의 앤솔로지 영화 중 미처 보지 않은 작품이 있다면 감상해보는 건 어떨까.

카우보이의 노래(The Ballad of Buster Scruggs, 2018)

이미지: 넷플릭스

에단 코엔, 조엘 코엔 형제 감독이 선보이는 서부 개척 시대 이야기. 팀 블레이크 넬슨, 제임스 프랭코, 리암 니슨, 조 카잔 등이 출연하며, 버스터 스크럭스라는 총잡이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코엔 형제 감독 특유의 어두운 드라마와 블랙 코미디가 결합된 총 6개의 단편을 선보인다. 베니스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러브 액츄얼리(Love Actually, 2003)

이미지: ㈜제이앤씨미디어그룹

겨울, 크리스마스, 로맨스 하면 떠오르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 그래서인지 연말이 다가오면 꾸준히 재개봉을 반복하고 있는데(2013, 2015, 2017, 2019), 그만큼 시간이 흘러도 질리지 않는 이유는 사랑을 주제로 다양한 형태의 감정을 그려내기 때문이 아닐까. 게다가 휴 그랜트, 리암 니슨, 콜린 퍼스, 엠마 톰슨, 키이라 나이틀리, 빌 나이, 알란 릭맨, 앤드류 링컨, 마틴 프리먼 등 지금은 도무지 한 작품에서 모이기 힘들 것 같은 쟁쟁한 출연진까지. 2017년에는 14년 이후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영화가 공개되기도 했다.

사랑해, 파리(Paris, I Love You, 2006)

이미지: 미로비젼

올리비에 아사야스, 코엔 형제, 웨스 크레이븐, 알폰소 쿠아론, 알렉산더 페인, 구스 반 산트 등 다양한 국적의 유명 감독들이 모여 파리를 배경으로 18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에피소드당 5분 남짓의 이야기를 위해 모인 배우들도 쟁쟁하다. 나탈리 포트만, 줄리엣 비노쉬, 일라이저 우드, 윌렘 대포, 스티브 부세미, 가스파르 울리엘, 매기 질렌할 등이 출연해 사랑의 한순간을 포착한다. 이후 ‘사랑의 도시’라는 프랜차이즈로 발전해 [뉴욕 아이 러브 유(2008)], [사랑해, 리우(2014)], [베를린, 아이 러브 유(2019)]가 차례로 나왔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All For Love, 2005)

이미지: (주)수필름

7쌍의 커플이 펼치는 한국형 ‘러브 액츄얼리’. 황정민, 엄정화, 주현, 오미희, 천호진, 김수로, 전혜진, 서영희, 윤진서, 정경호 등이 출연해 기쁨의 순간부터 슬픔까지 각양각색의 사랑을 조명한다. 민규동 감독이 연출을 맡아 담백하고 짜임새 있는 전개로 아류작에 머물지 않고 한국형 옴니버스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비슷한 시기에 네 커플의 이별 이야기를 그린 옴니버스 멜로 영화 [새드무비]가 개봉했다.

중경삼림(Chungking Express, 1994)

이미지: ㈜미디어캐슬

실연의 아픔을 잊으려고 애쓰는 경찰과 금발머리 가발을 쓴 마약 딜러, 늘 헤어진 연인이 좋아했던 샐러드를 주문하는 경찰과 그를 짝사랑하는 패스트푸드점 직원. [중경삼림]은 중국 반환을 앞두고 불안과 혼돈이 공존하는 도시, 홍콩을 살아가는 외로운 네 청춘남녀의 사랑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아낸다. 신선하고 새로운 형식으로 영화 팬들을 매료했던 왕가위 감독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이다.

커피와 담배(Coffee and Cigarettes, 2003)

이미지: (주)안다미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필 수 있는 작은 공간. [커피와 담배]는 일상의 소소한 공간을 오가는 사람들이 나누는 엉뚱하면서도 수다스러운 대화의 현장으로 끌어들인다. 11개의 단편엔 짐 자무쉬 감독 특유의 나른하면서도 지적인 위트가 흐르며, 개성 넘치는 인물 군상으로 등장하는 빌 머레이, 로베르토 베니니, 케이트 블란쳇, 스티브 부세미, 이기 팝과 잭 화이트, 스티븐 쿠건, RZA 등의 출연진은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짐 자무쉬 감독의 또 다른 앤솔로지 형식의 영화로는 [미스터리 트레인], [지상의 밤]이 있다.

클라우드 아틀라스(Cloud Atlas, 2012)

이미지: (주)NEW

릴리 워쇼스키, 라나 워쇼스키, 톰 티크베어, 세 감독이 데이비드 미첼의 동명 SF 소설을 원작으로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톰 행크스, 할리 베리, 배두나, 짐 스터게스, 벤 위쇼, 휴 그랜트, 수잔 서랜든 등으로 구성된 배우진이 불교의 윤회사상을 바탕으로 1849년부터 2346년까지 6개의 시간대에 벌어지는 이야기에 1인 다역으로 출연하는데, 인종과 성별, 나이를 넘나드는 분장이 인상적이다. 워쇼스키 자매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센스8]을 좋아한다면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더 흥미로울 것이다.

테일 오브 테일즈(Tale of Tales, 2015)

이미지: 오드 AUD

현재까지도 사랑받는 걸작 동화의 원형이 된 잠바티스타 바실레의 작품이 고딕풍의 화려한 비주얼로 탄생했다. [테일 오브 테일즈]는 원작에 수록된 50개의 이야기 중 욕망에 사로잡힌 세 여성을 선택해 섬뜩하면서도 기이한 판타지의 세계로 안내한다. 셀마 헤이엑, 뱅상 카셀, 스테이시 마틴, 존 C 라일리, 토비 존스 등이 출연하며, [고모라]로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마테오 가로네 감독이 연출했다.

씬 시티(Sin City, 2005)

이미지: 쇼이스트

부패와 범죄로 얼룩진 도시 씬 시티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의를 지키는 고독한 아웃사이더의 이야기. 원작자 프랭크 밀러의 어둡고 폭력적인 세계를 B급 감성의 누아르가 공존하는 실험적인 흑백 영상으로 담아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제시카 알바, 브루스 윌리스, 미키 루크, 베니시오 델 토로, 클라이브 오웬 등이 출연하며, 2013년에 주연 배우 일부가 교체된 속편이 공개됐으나 무미건조한 속편이라는 반응을 얻으며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Once Upon a Time… in Hollywood, 2019)

이미지: 소니픽처스코리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아홉 번째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1969년의 할리우드를 그만의 스타일로 재현한 러브레터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한물간 액션 스타 릭 달튼과 그의 스턴트 겸 매니저 클리프 부스, 그들의 새로운 이웃 샤론 테이트의 이야기를 교차하며 전개하다 후반부에 특유의 폭력적인 화력을 터뜨린다. 타란티노 하면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B급 감성의 노골적인 즐거움을 덜하지만, 애수 어린 감상은 황금기를 누렸던 할리우드를 추억하기에 충분하다. [저수지의 개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데쓰 프루프]도 앤솔로지 형식을 차용했다.

바벨(Babel, 2006)

이미지: MK픽처스

모로코, LA, 도쿄, 멕시코. 접점이 없을 것 같은 4개의 도시에서 각기 다른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각각의 장소에서 수수께끼 같은 방식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고 교차하지만 서서히 우연과 오해, 편견이 만들어낸 하나의 톱니바퀴로 맞물린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전작 [21그램]도 [바벨]처럼 앤솔로지 형식을 취했다.

트래픽(Traffic, 2000)

이미지: 코리아픽처스

불법 마약 거래로 교묘하게 얽힌 각기 다른 공간에서 벌어지는 세 이야기. 다큐멘터리를 보는듯한 절제된 연출과 빈틈없는 각본, 모순된 상황에 처한 인물들을 생생하게 전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어우러져 복잡하고 광범위한 마약 문제를 설득력 있게 전한다.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세 공간을 선명하게 다른 톤의 영상으로 담아내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제7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각생상, 남우조연상, 편집상을 수상했다.

기담(Epitaph, 2007)

이미지: 스튜디오2.0

한국 공포영화의 수작으로 꼽히는 [기담]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섬뜩하면서도 슬프고 아름다운, 색다른 공포를 전한다. 엘리트 의사 부부의 비극,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소녀, 아름다운 시체에 마음을 빼앗긴 의대 실습생의 이야기가 불길한 기운이 흐르는 안생병원에서 펼쳐진다. [기담]의 정범식 감독은 2018년 개봉한 [곤지암]으로 다시 공포영화 붐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