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마라맛 드라마로 불리는 [부부의 세계]의 인기가 뜨겁다. 막장 드라마에 흔한 불륜과 복수를 소재로 삼지만, 심리 스릴러를 보는듯한 치밀한 전개로 기존 작품과 선을 긋는다. 배우자의 외도를 알아채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자 애쓰며 반격에 나서는 지선우는 파격적일 정도로 새롭다. 절망적인 현실에 무력하게 굴복당하지 않는 지선우와 같은 여성들은 영화에서도 종종 찾을 수 있다. 통쾌한 해방감부터 복잡 미묘한 감정을 전하는 여성들의 복수를 그린 영화를 소개한다.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나를 찾아줘(Gone Girl)

이미지: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부부의 갈등을 막장 서사로 풀어낸 영화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작품이 있으니 데이빗 핀처 감독의 날카로운 연출과 로자먼드 파이크의 서늘한 눈빛이 뇌 속을 파헤치는 것 같은 [나를 찾아줘]다.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뽐내는 에이미는 이제껏 여러 작품에서 실패한 결혼생활에 힘들어했던 여성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무능력한 것도 모자라 바람까지 피우는 닉을 벌하고자 꼼짝달싹할 수 없는 치명적인 덫을 계획하고 결혼기념일에 감쪽 같이 사라진 것. 선동적인 미디어에 대한 풍자를 더해 애증으로 점철된 결혼 생활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비밀은 없다(The Truth Beneath)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연홍은 배우자 종찬의 선거유세 기간 중 딸 민진이 실종됐는데도 수사가 지지부진하자 나 홀로 추적에 나선다. 그런데 극한의 고통에서 마주한 진실은 잔인하기만 하다. 예상하지 못했던 배신과 거짓말, 우연이 만들어낸 비극. 분노와 절망이 부른 복수는 그래서 더 처절하고 처연한 감정이 앞선다. 데뷔작 [미쓰 홍당무]에서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여성 캐릭터를 내세웠던 이경미 감독은 [비밀은 없다]에서도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인물로 극을 이끌며 독특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손예진은 기존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모습으로 분노와 절망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어가는 인물의 심리 변화를 생동감 있게 전한다.

심판(In the Fade)

이미지: 그린나래미디어㈜

[심판]은 무능한 사법제도 대신 자신이 직접 복수에 나서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의 주인공 카티아는 폭발 테러사건으로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고 견디기 힘든 고통에도 재판의 증인으로 나서 가해자를 단죄하고자 하지만, 법은 그의 편에 서지 않는다. 결국 카티아는 제 손으로 나치즘의 인종혐오범죄를 응징하고자 극단적인 결심을 한다. 하지만 카티아의 복수는 화력으로 무장한 통쾌한 복수극과 거리가 멀다. 절절한 고통과 분노에서 비롯된 절규에 가깝다. 절망적인 내면을 생생하게 전하는 다이앤 크루거의 연기는 마지막까지 휘몰아치는 진한 여운을 남긴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Earnestland)

이미지: CGV아트하우스

열심히 살아도 행복해질 수 없는 이상한 나라. 수남의 세상은 발버둥 칠수록 꿈과 행복을 앗아간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지만 잔인한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남을 통해 성실과 성공이 비례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수남은 손재주는 남다르게 뛰어나지만 컴퓨터에 일자리를 빼앗기고, 공장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하지만 현실은 소박한 행복을 꿈꿀 여유를 주지 않는다. 결국 수남은 노력할수록 불행해지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잔혹한 광기를 내뿜는다.

친절한 금자씨(Sympathy for Lady Vengeance)

이미지: ㈜모호필름

단번에 시선을 뺏길 만큼 아름답지만, 차갑고 무심해 보이는 표정이 어쩐지 서늘한 여자, 이금자.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에 이은 박찬욱 감독의 복수 삼부작을 마무리하는 주인공 이금자는 앞서 주인공들 못지않게 긴 시간을 잔인한 복수를 준비하는 데 몰두해왔다. 자신에게 유아 납치 및 살인 누명을 씌운 백선생에게 그에 마땅한 벌을 내리기로 한 것.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차근차근 복수를 실행해가지만, 그의 표정에선 도통 후련한 기색을 엿볼 수 없다. 백선생을 단죄한다고 한들, 죽은 아이의 삶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그의 표정처럼 통쾌함보다는 복잡 미묘한 감정에 빠진다.

퍼펙션(The Perfection)

이미지: 넷플릭스

촉망받는 첼리스트였지만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꿈을 접은 샬롯. 그가 떠난 자리를 꿰차고 유망 첼리스트가 된 리지. 옛 스승을 찾아간 과거의 제자가 현재의 제자와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질투심이 유발한 파국의 스릴러로 흘러갈 것 같지만, [퍼펙션]은 예상과 달리 짜릿한 반전으로 안착한다. 10년 만에 스승을 찾은 샬롯의 목표는 리지가 아닌 오래전 완벽한 예술을 명분으로 성적 학대를 일삼았던 앤턴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던 것. 4개의 챕터로 쪼개진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흘러가며, 매번 판을 뒤집는 전개로 사악하고 괴랄한 쾌감을 선사한다.

레이디 맥베스(Lady Macbeth)

이미지: (주)씨네룩스

가난한 집안의 캐서린은 17세의 어린 나이에 늙은 지주에게 팔려간다. 자유를 빼앗긴 채 질식할 것 같은 고요한 저택에 갇혀 적막한 나날을 보내던 중 자신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하인에게 묘한 쾌감을 느끼고, 그때부터 통념을 거부하고 욕망에 충실하기로 한다. [레이디 맥베스]는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을 원작으로, 그 스스로 억압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거침없이 욕망을 추구하며 살기등등하게 변해가는 여성 캐릭터를 보여준다. 광기 어린 욕망에 사로잡혀 폭군처럼 변해가는 인물을 연기한 플로렌스 퓨의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엘르(Elle)

이미지: 소니 픽쳐스

폴 버호벤 감독과 이자벨 위페르가 만난 [엘르]는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고 도덕적인 관념을 넘어서는 인물을 내세운다. 주인공 미셸은 좀처럼 종잡을 수 없다. 어떤 사회적 통념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처한다. 미셸은 평화로운 휴일에 정체불명의 침입자에게 성폭행을 당하지만, 울부짖지 않고 담담하게 일상으로 돌아간다. 후에 범인이 앞집 남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와 모종의 관계를 유지하며 은밀한 쾌감을 즐긴다. 하지만 위험한 관계가 통제를 벗어날 조짐을 보이자 거침없이 단죄한다.

유 아 넥스트(You’re Next)

이미지: ㈜영화사 백두대간

무자비한 살인이 연속되는 슬래셔 무비에서 대다수의 여성 캐릭터는 성적 대상화되거나 공포에 질린 채 비명만 지르다 무참하게 희생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근래 들어 납작하게 눌렸던 여성 캐릭터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데, 그중 [유 아 넥스트]는 관객을 기분 좋게 배반하는 영화다. 주인공 에린은 남자친구의 가족 모임에 정체불명의 괴한이 습격해 무차별적인 살상을 저지르자 두려움에 물러서지 않고 강인한 생존력과 기지를 발휘해 통쾌한 반격에 나선다.

데쓰 프루프(Death Proof)

이미지: Dimension Films

짜릿하고 통쾌한 복수가 기다리고 있다. 쾌락을 위해 교통사고를 가장한 살인을 저지르는 스턴트맨 마이크. 그가 이번엔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 사이코 변태 살인마의 새로운 희생양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스턴트를 즐기려던 여성들. 마이크의 도발에 당황했던 활기 넘치는 친구들은 물러서지 않고 받은 만큼 철저하게 되갚아주기로 한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답게 B급 감성이 전면에 배치되고 회심의 일격을 가하기까지 꽤 수다스럽게 흘러가지만, 마이크를 확실하게 응징하는 마지막 장면이 전하는 속 시원한 쾌감을 놓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