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쯤이면 여름휴가로 들떠야 할 텐데, 올해 여름은 어쩐지 우울하다. 코로나19로부터 안심할 수 없어 해외여행은 꿈도 꿀 수 없고, 그나마 국내로 눈길을 돌리자니 장맛비가 지루하게 내린다. 요즘처럼 답답함이 쌓여갈 때는 환상적인 로케이션으로 ‘눈호강’의 즐거움이 보장된 작품들을 보는 건 어떨까. 인기 관광지(였던) 유럽의 매력이 담긴 해외 드라마를 보면서 직접 갈 수 없는 아쉬움을 해소해보자.

나이트 매니저(The Night Manager)

이미지: BBC

존 르 카레의 첩보 소설을 호화롭게 각색한 [나이트 매니저]는 영국(데번, 런던), 스페인(마요르카), 스위스(체르마트), 모로코(마라케시)를 오가며 6부작 내내 이국적인 정취를 뽐낸다. 전직 군인 조너선 파인이 냉혹한 무기 거래상 리처드 로퍼가 구축한 호화로운 세계에 입성해 복수를 펼치는 이야기로, 당시 회당 300만 파운드의 제작비를 들여 편당 약 800만 시청자를 끌어모았다. 조너선 파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환상적인 경치를 자랑하는데, 그중 눈길을 끈 곳은 단연 리처드 로퍼의 화려한 은신처일 것이다. 17세기에 해적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요새로 건설됐던 마요르카에 있는 섬으로 2011년 영국의 한 자산가가 개인 휴양지로 구입한 곳이다. 덧붙여 초반부에 조너선 파인이 근무했던 호텔은 극중 배경인 이집트의 카이로가 아닌 세금 감면 혜택이 있는 모로코의 마라케시에서 촬영이 진행됐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Sex Education)

이미지: 넷플릭스

무어데일 고등학교 10대들의 이야기는 때때로 배경이 1980-90년대가 아닌지 혼란스럽다. 손에 쥔 스마트폰을 보면 분명 현재가 맞는데, 복고풍의 옷차림과 소품, 동화 같은 전원 풍경을 보면 시간이 잠시 멈춘 것 같기도 하다. 이는 시청자의 착각이 아니었다. 제작진은 존 휴즈 감독(조찬 클럽)의 작품에 영감을 받아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듯한 공간적 특색을 부여했다. 오티스, 메이브, 에릭, 에이미, 애덤이 다니는 시계탑이 우뚝 솟은 고풍스러운 외양의 무어데일 고등학교는 2016년 문을 닫은 사우스웨일스의 카를레온 캠퍼스에서 촬영했고, 오티스와 진의 안락한 보금자리인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의 목조 주택은 울창한 숲과 강이 있는 관광지 시몬즈 야트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워리어 넌: 신의 뜻대로(Warrior Nun)

이미지: 넷플릭스

지난 7월 2일에 공개된 [워리어 넌: 신의 뜻대로]는 신비의 힘을 얻고 죽음에서 부활한 에이바와 악에 맞서는 수녀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재가 소재인 만큼 판타지적 설정을 돋보이게 하는 로케이션이 무척 인상적인데, 드라마의 대부분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세비야, 말라가, 코르도바 등에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을 배경으로 흘러간다. 온몸이 마비된 에이바가 학대를 받으며 성장한 고아원은 실제로는 말라가에 있는 문화원이고(외벽은 18세기 교회 건물), 10부작 내내 등장하는 십자검 결사단의 본부가 있는 성당은 안테케라에 있는 500년 된 교회 건물로 주로 콘서트와 전시회를 위해 사용됐다. [왕좌의 게임]을 봤다면 낯이 익은 곳도 등장한다. 중세 시대의 전투 장면에 등장한 성은 [왕좌의 게임] 시즌 7의 하이가든, 9~10화에 등장하는 세비야의 로열 알카자르는 도른왕국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영 포프(The Young Pope)

이미지: Sky Atlantic, HBO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기 전까지, 역사적인 도시 바티칸은 매년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지만 영화와 드라마 제작진에겐 굳게 닫힌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제아무리 이탈리아의 명망 있는 감독 파올로 소렌티노라 해도 말이다. 주드 로가 미국 출신의 독선적인 성격을 가진 젊은 교황을 연기하는 [영 포프]는 상상력을 발휘하고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웅장하고 화려한 바티칸을 재현했다. 약 45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바티칸이 아닌 로마 주변의 여러 건축물과 정원 등지(Villa Lante, Villa Medici, Villa Doria Pamphili 외)에서 촬영했고, 시스티나 성당은 아예 실물 크기의 세트를 지었다. 올해 초 공개된 후속 시리즈 [뉴 포프] 역시 제작진이 접근할 수 없는 바티칸을 대신해 로마와 아부르초, 베니스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킬링 이브(Killing Eve)

이미지: 왓챠

지난 28일, 산드라 오와 조디 코머, 피오나 쇼가 나란히 에미상 주연상과 조연상 후보에 오른 [킬링 이브]는 유럽 전역을 광범위하게 누빈다. 이브의 거주지인 영국은 기본,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루마니아 등을 오가며 이브와 빌라넬의 부정할 수 없는 케미스트리를 선보인다. 여러 장소를 이동하는 역동적인 전개에도 강렬한 인장을 새겨 넣는데, 그중 몇몇 도시를 떠올려보자. 사치스러운 핑크 드레스를 입은 빌라넬이 콘스탄틴을 기다렸던 파리의 방돔 광장, 킬러로서 창의적인(?) 능력을 보여줬던 암스테르담의 레드라이트 구역, 시즌 2 마지막에 이브와 빌라넬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던 로마의 유적지 티볼리, 시즌 3에서 빌라넬의 새 거주지로 등장하는 무어풍(Moorish)의 화려한 건축양식이 돋보이는 바르셀로나의 아파트, 그리고 이브가 반쯤 정신을 놓고 일했던 식당은 한국인이 밀집한 런던 외곽의 뉴몰든이란 곳으로 산드라 오도 촬영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곳이라고 한다.

다운튼 애비(Downton Abbey)

이미지: ITV

영국 시대극을 대표하는 [다운튼 애비]는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그랜섬 백작 일가와 고용인들의 이야기를 우아하게 펼쳐 보인다. 주 이야기가 상류층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만큼 차 문화부터 패션, 소품, 공간에 이르기까지 시대상을 꼼꼼하게 재현해 호사스러운 재미를 더하는데, 그중 압권은 귀족들의 삶이 펼쳐지는 거주 공간인 ‘다운튼 애비’다. 보기만 해도 웅장한 외관이 멋스럽고 기품이 느껴지는 이곳의 실제 명칭은 하이클레어 성으로 런던에서 차로 2시간쯤 걸리는 햄프셔에 있고, 후손들이 거주하며 관리한다. 2016년에 종영한 후 3년 만에 나온 영화의 중반부에 나오는 왕실 퍼레이드 장면은 [해리 포터] 시리즈와 [오만과 편견] 촬영지로도 유명한 고즈넉한 분위기의 라콕 마을에서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