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히어로 세계에서는 다르다. 상황에 따라 영웅에서 악당으로, 또 악당에서 영웅으로 변하는 캐릭터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특히 악당에서 영웅이 되는 캐릭터는 생각지 못한 모습으로 놀라움을 전하는 동시에, 이러다 또 나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묘한 긴장감을 조성해 극의 재미를 더한다. 개과천선의 올바른 예일까? 또 다른 위협을 위한 빌드업 일까? 악당에서 영웅이 된 히어로 영화 속 인물들을 살펴본다.
로키

로키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페이즈 1의 대표적인 빌런이다. 오딘의 양자이자 토르의 동생으로 히어로 집안의 기대주였으나 형에 대한 콤플렉스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악한 짓을 일삼았다. 물론 그의 야망은 토르와 지구의 어벤져스에 의해 무너졌지만. 악의 카리스마가 넘쳤던 그의 포지션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토르: 다크 월드] 때부터였다. 다크 엘프와 결전을 앞둔 토르에게 자신의 힘을 빌려줬고, [토르: 라그나로크]에서는 아스가르드를 구하기 위해 헬라와 싸우면서 전편보다 더 뛰어난 활약을 보여줬다. 형제는 용감했다고 했던가? 토르와 함께 하면서 로키는 이전과는 다른 믿음직스러운 모습으로 거듭났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는 타노스의 위협에 다시 배신의 카드를 꺼내 드는 것 같았으나 역습을 가하고 아스가르드의 전사로 명예롭게 죽음을 맞았다. 다행히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과거의 악당이었던 로키가 죽지 않고 시간 여행의 틈을 이용해 탈출에 성공, 디즈니 플러스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이다.
스칼렛 위치

스칼렛 위치는 복수와 분노로 악의 길을 선택했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 영웅이 된 케이스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스칼렛 위치는 울트론과 함께 어벤져스 멤버를 공격했는데, 자신의 부모가 스타크 인더스트리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울트론의 사악한 본심을 깨닫고, 호크 아이의 진심 어린 이야기를 듣고 각성하면서 어벤져스에 합류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에서는 연인 비전을 잃은 슬픔을 뒤로하고 타노스를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블 페이즈 4에서는 드라마 [완다비전]과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인 멀티버스 오브 매드니스]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갈 예정이다. 다만 가족과 연인을 잃은 계속된 불행 때문에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스칼렛 위치가 흑화되는 게 아닐까 하는 전망도 있다.
스톰 쉐도우

이병헌이 맡아 더욱 화제가 된 스톰 쉐도우는 [지. 아이. 조] 시리즈의 전체 이야기를 흔들어 놓는 중요한 캐릭터다. 세계를 지배하려는 코브라에 소속된 암살자이자, ‘지 아이 조’ 소속인 스네이크 아이의 라이벌이기도 하다. 1편에서는 지. 아이. 조의 아지트를 습격하고 파리에서 테러 행위를 벌이는 등 영화 속 코브라가 일으킨 악행 대부분을 주도했다. 마지막에 스네이크 아이즈와 겨루다 패배한 뒤 행방이 묘연했는데, 2편에 다시 등장해 변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스톰 쉐도우는 전편처럼 테러를 일삼는 악당이 아니라 복수를 꿈꾸며 지.아이.조.에 합류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스승을 죽인 자탄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냉정하고 잔혹한 모습 때문에 마지막까지 적인지 같은 편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결국 지.아이.조와 함께 싸워 자탄의 목숨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선악의 구분이 명확한 캐릭터가 많은 [지.아이.조] 시리즈에서 자신의 이익에 따라 진영을 바꿔 긴장감을 불어넣는 스톰 쉐도우의 포지션은 독특했다. 2021년 개봉 예정인 스핀오프 [스네이크 아이즈]에서 스톰 쉐도우 역은 이병헌이 아닌 다른 배우가 맡는다.
스폰

토드 맥팔레인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 97년 개봉작 [스폰]은 부패한 상사에 의해 죽은 CIA요원 알 시몬스가 지옥의 군대를 이끌고 부활하는 이야기다. 얼핏 설정만 보면 스폰은 공포영화의 주인공 같지만 악마의 유혹을 이겨낸 특별한 히어로다. 모든 것을 잃고 분노에 가득 찬 알은 악마의 대변인 바이오레이터의 꼬임에 넘어가 불멸의 전사 스폰으로 부활하나 자신을 죽인 상사와 세계를 위협하면서 점점 악에 물들어간다. 하지만 가족을 만난 뒤, 분노와 복수가 덧없음을 깨닫고 가족과 세상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힘을 준 바이오레이터에 맞선다. 주인공의 참혹한 설정과 세기말 분위기로 인기를 누린 [스폰]은 히어로 영화 붐이 불면서 리부트 요청을 많이 받았다. 블룸하우스에서 제이미 폭스를 주인공으로 한 새로운 [스폰]을 발표, 지옥의 전사가 다시 돌아올 예정이다.
네뷸라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 타노스의 양녀이자 로난의 부하로 등장한 네뷸라는 스타로드 일행을 괴롭힌 빌런 중 하나였다. 그가 가오갤을 공격한 것은 로난의 명령도 있었지만 자신을 배신한 언니 가모라에 대한 증오가 더 컸기 때문이다. 2편에서도 여전히 가모라를 뒤쫓지만, 타노스의 학대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누군가가 필요했다는 고백을 하면서 심경의 변화를 드러낸다. 이후 가모라와 네뷸라는 더 이상의 의미 없는 싸움은 뒤로하고 새로운 악당 에고의 위협으로부터 우주를 지키기 위해 손을 잡는다. 네뷸라의 영웅적인 활약은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더욱 돋보이는데, 타노스와 맞서 싸운 것은 물론, 시간 여행을 떠나면서 파괴된 세상을 원래대로 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타노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네뷸라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3]에서 가오갤 멤버로 처음부터 합류해 새로운 모험을 떠날 예정이다.
베놈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인기 빌런인 베놈은 2018년에 개봉한 솔로 무비에서 역할이 조금 달라진다. 외계에서 온 물질 심비오트가 에디 브록에 기생해 베놈이 되는 건 원작과 변함없지만, 설정을 하나 더 추가해 캐릭터의 변화를 자아냈다. 욕망에 충실한 베놈과 정의감 넘치는 기자 에디 브룩이 대립하면서도 자신들을 위협하는 적에게는 힘을 합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심비오트를 이용해 거대한 야망을 꿈꿨던 진정한 흑막 칼튼과 맞서 뜻밖의 평화를 이뤄낸다. 솔로 무비에서 빌런이 아닌 다크 히어로의 진면목을 보여줌에 따라 베놈은 스파이더맨이 아직 합류하지 않은 소니 마블 유니버스의 구심점이 되었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또 다른 빌런인 카니지와 한 판 대결을 예고한 속편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할리 퀸

할리 퀸 역시 [베놈]처럼 영화화되면서 빌런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진 캐릭터가 되었다. 코믹스 원작에서는 조커의 연인으로 온갖 범죄를 같이 저지르는 파트너였지만 영화에서는 영웅적인 활약이 더 돋보였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는 마녀 인챈트리스에 맞서 세상을 구했고, [버즈 오브 프레이]에서는 고담의 악명 높은 범죄왕 로만에게 고통받는 이들과 팀을 이뤄 통쾌하게 응징했다. 두 작품에서 할리 퀸의 활약은 거창한 정의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내키는 대로 했던 행동이 결과적으로 세상을 구하는 좋은 결과를 내놓았다. 더욱이 악당을 심판하려고 해도 도덕적인 딜레마에 갇혀 답답한 선택을 했던 고지식한 히어로보다 할리 퀸처럼 본능에 따라 화끈하게 나서는 모습이 보는 이들에게 더 속 시원한 쾌감을 전했다. 이제는 악당보다 악동에 더 가까운 할리 퀸의 다음 활약은 2021년 개봉 예정인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만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