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장마가 물러나는 듯하니 한동안 주춤했던 코로나19가 다시 고개를 든다. 참으로 유난한 여름이다. 더위와 습도에도 마스크를 잠시도 벗을 수 없는 요즘, 잠시나마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영화를 보는 게 어떨까. 올해는 여러모로 여름날을 만끽하기 어려웠으니 청명한 계절감이 담긴 영화로.

리틀 포레스트(2018)

이미지: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리틀 포레스트]는 일상을 멈추고 고향으로 내려온 혜원을 차분히 따라가며, 도시에서 느끼기 힘든 계절의 변화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정취를 고스란히 전한다. 올해 여름이 어느 해보다 유난하기 때문일까. 영화 속 혜원의 여름 나기가 어쩐지 부럽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가며 일하는 게 고생스러워 보이긴 해도 시골의 여름은 여유롭고 정겨운 운치가 흐른다. 특히 부드럽게 달빛이 비치는 한여름밤 개울가에서 다슬기를 잡고 친구들과 돌다리에 둘러앉아 속 얘기를 나누며 쉬어가는 모습이 마스크로 쌓인 피로감을 풀어주는 것만 같다.

최악의 하루(2015)

이미지: CGV아트하우스

늦여름, 서촌을 찾은 은희의 하루는 평소보다 정신없이 흘러간다. 연기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출판 업무차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 소설가를 우연히 만나 차를 마시고, 이후에는 남산 산책로에서 드라마 촬영으로 바쁜 남자친구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만난다. 데이트의 설렘보다 실망감을 안고 돌아서는 길에는 잠시 한때 만났던 이혼남과 마주친다. 영화는 은희와 세 남자의 관계를 따라가며 설레고, 유치하고, 이기적이며, 불안정한 사랑의 속성을 경쾌하게 그린다. 서촌 골목길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풍경이 익숙하면서도 한 번쯤 걸어보고 싶은 기분을 들게 한다.

호우시절(2009)

이미지: (주)NEW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 [호우시절]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시인 두보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의 한 구절을 제목으로 택해, 미국 유학 시절에 가깝게 지냈다 자연스레 멀어진 두 남녀가 우연히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중국 출장길에 오른 동하와 관광가이드를 하는 메이가 만나 짧은 기간 새로운 추억을 쌓아가며 변화하는 감정을 허진호 감독 특유의 섬세하고 담백한 화법으로 담아낸다. 여름을 마주한 늦봄의 싱그러움과 비주얼 커플 정우성과 고원원의 매력이 돋보이며, 특히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두보 초당의 푸르른 풍경이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나비잠(2017)

이미지: ㈜트리플픽쳐스

베스트셀러 작가가 알츠하이머에 걸려 점차 기억을 잃어가는 사이 생의 마지막 사랑에 빠진다. [나비잠]은 얼핏 흔한 신파 멜로 같지만, 녹음이 신비롭게 우거진 오프닝 시퀀스처럼 기분 좋은 향긋함이 감도는 영화다. 일본 소설에 매료된 찬해가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가 유명 작가이자 교수인 료코를 만난 후, 그의 집에 머물며 함께 소설을 완성하고 사랑을 쌓아가는 과정이 여름의 청명함을 품고 감상적으로 펼쳐진다. 인물 간의 감정이 조금씩 건너뛰는 것 같고, 통속적으로 마무리되는 흐름이 아쉽긴 하지만, 여름날을 그린 수채화를 보는 듯한 예쁜 영상미와 나카야마 미호, 김재욱의 조합은 시선을 뺏기에 충분하다.

하나식당(2018)

이미지: (주)영화사 오원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하나, 지칠 대로 지친 세희. 두 사람은 오키나와에서 미처 돌보지 못했던 행복과 휴식의 의미를 찾아간다. [하나식당]은 힐링 영화로 불리는 [카모메 식당], [리틀 포레스트]처럼 각박한 일상에서 벗어난 인물들의 소박한 하루를 비추며 일상을 환기할 여유를 전하고자 한다. 차별점 없이 진부하고 밋밋한 전개로 일관해 영화 자체는 아쉽지만, 오키나와의 현지 느낌이 물씬한 전통 주택부터 멋스러운 유명 명소까지, 자유롭고 느긋한 여름 풍경이 매혹적이다.

경주(2014)

이미지: 인벤트 디

[후쿠오카]로 마무리한 장률 감독의 도시 3부작의 시작은 박해일, 신민아가 주연을 맡은 [경주]다.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교수 최현이 7년 전 보았던 춘화의 기억을 더듬어 충동적으로 경주로 향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경주]는 한여름밤의 꿈같은 최현의 짧은 여정을 따라가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역사 도시 경주의 신비롭고 고즈넉한 매력을 정겹고도 멋스럽게 담아낸다. 특히 늦은 밤 술기운에 취한 최현이 고분능을 오르는 모습이 기묘하면서도 아름답다.

보희와 녹양(2018)

이미지: KT&G 상상마당

엄마에게 새 남자친구가 생기고, 죽은 줄 알았던 아빠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린 성격의 보희. 연이은 충격에 둘도 없는 단짝 친구 녹양과 함께 아빠를 찾기로 결심한다. [보희와 녹양]은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소심한 중학생 보희를 중심으로 10대들의 우정, 고민, 방황을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낸다. 여름날의 맑은 햇살 같은 풋풋한 청량감이 엉뚱하고도 진지한 모험에 나선 10들의 여정을 부드럽게 감싸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굿바이 썸머(2018)

이미지: (주)인디스토리

[굿바이 썸머]도 [보희와 녹양]처럼 여름의 청아하고 싱그러운 향취가 묻어나는 10대들의 이야기다. 시한부를 소재로 삼았지만, 비관적이기보다는 순정만화를 보듯 풋풋하고 말랑말랑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현재는 평소대로 학교를 다니며 공부하고, 수민에게는 느닷없이 자신의 감정을 고백한다. 영화는 ‘현재’란 이름처럼 순간에 충실하며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현재와 주변 친구들의 일상을 차분하게 비추며 학창 시절의 추억을 아련하게 소환한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2017)

이미지: 롯데엔터테인먼트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킨 수아와 그를 변함없이 사랑한 우진이 새로운 추억을 쌓아가며 애틋한 감정을 나누는 이야기를 그린다. 장마가 시작되던 날에 수아가 돌아온 만큼 영화 곳곳에 여름날에만 만끽할 수 있는 산뜻하고 시원한 청량감이 짙게 배어있다. 비가 내리는 날은 우울하기보다 상쾌하고 깨끗한 느낌이 강하고, 비가 그친 풍경은 선명한 초록빛으로 물들어 보기만 해도 개운함이 밀려온다. 그 청명한 여름 풍경에 손예진, 소지섭 두 멜로 장인의 연기가 어우러지니 아름답고도 먹먹한 로맨스가 절로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