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봄동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관심과 우려 속에 시작된 제46대 미국 대통령 선거가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결과 불복 선언으로 차기 바이든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꽤나 두통을 앓겠지만, 많은 미국인들은 크리스마스가 한 달 넘게 남았는데도 이미 축제 분위기에 푹 빠진 듯하다. 특히 이번 대선에서는 주요 경합주들의 실시간 개표 현황이 웬만한 영화·드라마보다 ‘꿀잼’이었던 만큼, 할리우드의 다음 프로젝트들에 큰 영감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현실 못지않게 흥미진진한 정치 드라마를 감상하며, 2020년 미국 대선의 영상화를 머릿속으로 미리 그려보는 것도 재미있는 소일거리가 될 수 있겠다.

지정생존자 (Designated Survivor)

이미지: 넷플릭스

[지정생존자]는 사상 초유의 테러로 존재감 없는 학자 출신 장관에서 하루아침에 미국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톰 커크먼의 이야기다(시즌 3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제작). 한국에서도 지난해 [60일, 지정생존자]로 리메이크되었을 정도로 충격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설정 덕분에 인기를 끌었다. 비록 시즌 2부터 주인공의 아내 겸 영부인이 어이없이 사망하는 등 갖은 무리수가 펼쳐지면서 시청자들의 실망감이 커지긴 했으나,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톰 커크먼이 백악관에 입성하고 내외부의 온갖 압력에 맞서며 진정한 대통령으로 성장하는 서사만은 슈퍼히어로 그 자체였다. 키퍼 서덜랜드, 매기 큐, 칼 펜, 나타샤 맥켈혼 등 베테랑 배우들의 협연이 볼만하며, [어메이징 메리], [아이, 토냐], [힐 하우스의 유령] 등을 통해 차세대 주연배우로 자리매김한 맥케나 그레이스의 귀엽고 당찬 모습도 마냥 흐뭇하다.

시크릿 시티 (Secret City)

이미지: 넷플릭스

호주 수도 캔버라를 배경으로 한 정치 스릴러 [시크릿 시티]는 크리스 울만과 스티브 루이스가 공동 집필한 소설 『The Marmalade Files』 3부작을 각색한 시리즈다. 첫 화부터 분신자살과 익사체가 등장하며 엄청난 긴장감을 선사하는데, 살인사건 취재에 뛰어든 정치부 기자 해리엇 덩클리가 호주 정계에 뿌리 박힌 음모에 휘말려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과정을 건조하면서도 손에 땀을 쥐게 묘사한다. 진실을 좇는 언론인의 고군분투 속에 내포된 [시크릿 시티]의 특이점은 바로 미국-중국 양국의 압박 속에서 국익을 도모해야 하는 호주의 정치·첩보 관계자들이 벌이는 숨 가쁜 두뇌 싸움이다. 남북문제 등 각종 외교 이슈로 상시 미국 및 중국과의 관계에 촉각을 세워야만 하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공감과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한국 넷플릭스에서는 시즌 2까지 시청할 수 있는데, 시즌 3 제작 여부는 아직 미정이다.

여총리 비르기트 (Borgen)

이미지: 넷플릭스

덴마크하면 『인어공주』등 안데르센의 아름다운 동화들이 주로 떠오르지만, 해외 드라마를 좀 본 덕후라면 [여총리 비르기트]를 제일 먼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덴마크 소수당 대표에서 첫 여성 총리로 거듭나는 비르기트 뉘보르의 이야기로, 실제 덴마크 정계의 구조와 주요 정치인들을 연상시키는 사실적인 묘사 덕에 유럽 각국의 시청률을 휩쓴 이후 미국, 한국 등 해외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저마다의 내공을 지닌 여성 정치인들이 속속 두각을 드러내는 가운데, 가족 및 측근과 갈등을 빚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타협해야만 하는 비르기트의 고독한 싸움은 여전히 시청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반갑게도 지난 4월 네 번째 시즌의 2022년 방영 계획이 발표되었으니, 그전에 넷플릭스에서 시즌 1~3을 정주행하며 비르기트의 복귀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려 보자.

베르사유 (Versailles)

이미지: 넷플릭스

영국에 [튜더스]가 있다면 프랑스엔 [베르사유]가 있다. 프랑스-캐나다 합작 사극 [베르사유]는 유럽 전제군주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긴 루이 14세의 정치적 성장과 여성 편력을 화려하게 그린다. 첫 화부터 이성, 동성을 가리지 않고 수놓아진 정사 장면들은 영국 BBC 방영 당시 ‘황금시간대의 포르노’ 논란을 불렀을 정도로 수위가 센 편인데, 루이 14세와 그의 각양각색 정부들, 주변 귀족들을 둘러싼 권모술수와 암투 역시 이에 맞먹는 자극적인 맛을 자랑한다. 다만 루이 14세의 실제 집권 기간(72년)이 매우 길었던 데 비해 [베르사유]는 시즌 3를 끝으로 종영한 게 아쉽다. 비슷한 성격의 [튜더스]가 헨리 8세의 말년과 최후까지 잘 담아냈던 걸(후반으로 갈수록 힘이 다소 떨어지는 게 보이긴 했지만) 감안하면 더더욱.

로마 (Rome)

이미지: HBO

잔인함과 선정성 측면에서 빠지면 섭섭한(?) 또 하나의 드라마는 바로 [로마]다. 역사 기록에선 이름만 한 줄 언급되는 두 주인공 루키우스 보레누스와 티투스 풀로의 눈에 비친 로마의 격동기를 실감 나게 연출한 대작이다. 당시 시청자들의 기대에 비해 굵직한 주요 전쟁들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만 보여주고 끝난 게 큰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HBO 드라마답게 엄청난 제작비가 투입되었음에도 시청률과 인기가 영 만족스럽지 않아, 결국 두 개 시즌만으로 완결된 것 역시 극중 분위기만큼 비극적인 요소다. 어쨌든 고대 문명의 정점에 달한 로마 제국의 화려함 속 야만성에 주목하면서 실존 인물들을 색다른 시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는 두고두고 기억할 만한 작품이다.

에디터 봄동: 책, 영화, TV, 음악 속 환상에 푹 빠져 사는 몽상가. 생각을 표현할 때 말보다는 글이 편한 내향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