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권나연

새해가 밝았다. 작년은 통 시원찮았지만 새해부터는 산뜻하게 새 출발을 해보기로 다짐한다. 올해의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하나둘 꼽아 새해 목표를 작성한다. 어느덧 제법 길어진 목록을 다시 쭉 읽어 보니, 아차! 무엇 하나 쉽지 않다. 도대체 무엇부터 시작할지, 뭐라도 할 수나 있을지 여간 막막한 게 아니다. 여러분의 이야기 같은가? 그럼 주목하시라. 지금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해본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다. 아무리 당신의 버킷리스트가 난공불락처럼 보여도 가장 쉬운 것을 해결해 체크 표시를 해두면 그다지 어려운 목표가 아니라는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다. 요즘 같이 VOD와 스트리밍 서비스가 발달한 인터넷 환경에서 영화 감상처럼 쉬운 일이 또 없다. 하물며 신나는 블록버스터 오락 영화라면, 더욱이 전 세계적인 흥행으로 대중성이 증명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 영화라면 부담 없이 2021년 새해 목표의 대장정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 글은 “마블 영화는 너무 많아서 보기가 좀 그래. 관심은 있는데….”라고 말하던 당신을 위한 글이다.

소설의 첫 문장, 사람의 첫인상, 처음의 중요성은 유구하게 강조되었다. “영화가 줄 수 있는 놀람과 재미는 첫 장면에서 거의 결정된다.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은 영화를 보아줄 인내심 있는 관객은 그리 많지 않다.” 영화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영화를 시작하는 첫머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영화의 첫 장면은 관객이 이야기 속으로 부드럽게 빨려 들어갈 수 있게끔 인물이나 배경을 소개해주고, 전체적인 극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주제를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 MCU 영화의 첫 대사를 통해 ‘입문작’을 소개해본다.

아이언맨 – “어째 군법 재판에 끌려가는 기분이네.”(토니 스타크)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특별한 순서가 없는 학습 만화 전집을 보아도 무조건 가장 첫 편부터 봐야 성미가 풀리는 사람이라면, [아이언맨]으로 시작하는 것이 옳다. 오늘날 MCU의 신화를 가능케 한 메가 히트작으로, 마블 스튜디오의 첫 영화임에도 현재 북미 박스 오피스 기준 24편의 마블 영화 중 13위의 성적을 보유하고 있다. [아이언맨]의 첫 대사는 주인공 ‘토니 스타크’가 던진 농담이다. 외딴 사막에서 무기 거래를 성사시킨 사업가가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가는 길에 어색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유쾌한 성격이 돋보인다. 직후 그는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해 납치되고, 테러 조직의 손아귀에서 무기 거래상으로 살았던 지난 삶의 업보를 직면한다. 수많은 죽음을 초래하는 최첨단 무기를 만들어 팔았던 죄로 심판대에 오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주인공의 첫 대사는 자기예언적이며 시적이기까지 하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 “피터야. 엄마가 널 찾는다.” (할아버지)

이미지: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주)

[아이언맨]이 “나는 죽지 않아”를 힘차게 외치는 AC/DC의 “Back in Black”을 벗 삼아 막을 올렸다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반어법으로 사랑을 속삭이는 그윽한 분위기의 7080 팝송을 벗 삼아 시작한다. 임종을 앞둔 어머니가 병상에서 아들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어린 주인공은 끝내 엄마의 손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우주로 납치된다. 십 수년이 지나 어른이 되어서도 ‘피터 퀼’의 마음속에는 그날 그 순간의 경험이 못 박혀 있다. 주인공의 엄마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끝내주는 노래 모음집’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주인공을 찾고 있다. 과연 소년은 마침내 엄마의 부름에 응답할 것인가.

블랙 팬서 – “아빠(Baba).” (소년 에릭 스티븐스)

이미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라면, [블랙 팬서]는 아빠와 아들의 이야기이다. Father나 Dad가 아닌 Baba라는 호칭부터 소년이 아프리카계 출신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국 와칸다의 전설을 들려준다. 겉으로는 세계 최빈국으로 알려진 가상의 국가 와칸다는 실상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첨단 국가로 [블랙 팬서]의 주 무대이며 노예제라는 착취의 상흔에 대응하는 흑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상징한다. 첫 대사를 읊는 소년 ‘에릭’과 주인공 ‘트찰라’가 행동에 나서는 동기는 각자의 아버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얽히고설킨 두 가지 부계 서사에 주목해 감상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스파이더맨 홈커밍 – “다시는 예전 같지 않을 거야.” (에이드리언 툼즈)

이미지: 소니 픽쳐스

마블은 90년대 금융 위기를 맞았을 때 캐릭터의 영화화 판권을 팔아넘기지 않고서는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파이더맨의 판권을 사간 것은 소니였다. 2002년 샘 레이미 감독의 트릴로지와 2012년 마크 웹 감독의 [어메이징] 시리즈까지 총 5편의 소니 실사 영화가 제작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어느덧 스파이더맨이 다시금 리부트되어 MCU에 적을 두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모두가 기다리던 왕의 귀환이었다. [스파이더맨 홈커밍]은 또 하나의 아버지이자 영화의 주요 악역인 ‘에이드리언 툼즈’의 대사로 시작한다. 영화 내적으로는 [어벤져스]에서 있었던 외계인 침공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영화 외적으로는 2번의 리부트와 5편의 영화를 겪은 관객들에게 하는 말임에 틀림없다. [홈커밍]에서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스파이더맨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고, 스파이더맨이 있는 MCU는 다시는 예전과 같지 않을 거라고, 기대해도 좋다고.

캡틴 마블 – “지금이 몇 신지 아는 거야?” (욘 로그)

이미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주인공 ‘비어스’의 지도자로 소개되는 인물 ‘욘 로그’의 첫 대사를 보다 근본적인 질문으로 읽고 싶다. 주인공은 매일 밤마다 기억의 파편 같은 알 수 없는 꿈을 꾸는 기억상실자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힘과 능력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지 못한다. 우연한 기회로 지구에 불시착한 비어스는 무의식 속에서 애타게 찾아 헤맸던 질문의 답을 하나하나 얻어낸다. 영화가 마무리될 무렵이면 비어스는 이제 모든 것을 안다. 지금이 몇 시인지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누구인지, 진짜 적이 누구인지, 진정으로 무엇을 지켜내야 하는 지를 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던가. ‘나’를 아는 캡틴 마블은 누구보다도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