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권나연

마블 코믹스에서 스타로드 피터 퀼을 바이섹슈얼이라고 공식적으로 컨펌했다. 코믹스에 대해 눈이 밝은 사람들은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겠다. “스타로드 죽지 않았어?” 2020년 2월 발매한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 #2에서 그가 올림푸스의 신들을 막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 죽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개월 뒤 발매한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 #9에서 뜻밖에 재등장한 스타로드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직후 사후세계를 암시하는 낯선 행성에서 눈을 뜬다. 그곳에서 스타로드는 수백 년의 세월을 보내며 남성형 휴머노이드 외계인과 여성형 휴머노이드 외계인 두 사람과 동시에 연인 관계를 맺는다.

이미지: 마블

양성애에 비독점적 다자 연애(폴리아모리)까지. 스타로드가 맞은 성지향성의 변화는 언뜻 갑작스럽게 보이지만, 코믹스가 낯선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이러한 결정이 대단히 놀랍다거나 의외라고는 할 수 없다.

이미지: 마블

그 이유는 첫째, 지난 10년 동안 마블의 행보를 돌이켜보면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마블은 2012년에 자사 최초로 동성애자 엑스맨의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렀다(‘어스토니싱 엑스맨’ #51). 수십 년 전에 있었던 미스 아메리카라는 금발 백인 캐릭터가 아메리카 차베즈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하여 최초의 LGBTQ+ 라틴계 여성 슈퍼히어로로 맹활약하게 된 것은 2013년의 일이다. 2014년 이래로 북구의 신 로키는 바이섹슈얼이자 젠더플루이드로 재차 언급되며 마블의 대표적인 퀴어 캐릭터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2015년에는 원조 엑스맨 멤버인 아이스맨 바비를 게이로 커밍 아웃시켰다(‘언캐니 엑스맨’ #600). 심지어 2019년부터는 스타로드의 최측근 여성 캐릭터 문드래곤과 파일라 벨 두 사람이 레즈비언 부부로 등장하는 형국이다. 스타로드가 커밍아웃하기 이전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의 작가 앨 유잉은 『엠파이어』 이벤트에서 팬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청년 동성애자 커플의 결혼을 써냈다. 리스트를 읊자면 끝도 없다. 마블은 최근 10년 동안 LGBTQ+ 커뮤니티를 작품 내에 적극적으로 포용하였으며, 이에 따라 이번 스타로드의 다양성 표현은 어색하지도 않고 갑작스럽지도 않다.

이미지: 마블

두 번째 이유. [토이 스토리]의 우주비행사 캐릭터 버즈 라이트이어가 이렇게 말했다.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마블 유니버스는, 특히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가 주요 무대로 삼고 있는 우주라는 공간은 말 그대로 무한하게 뻗어있다. 그야말로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일진대, 일개 행성일 뿐인 지구의 이분법적 성관념이 우주의 일반 법칙이라면 그거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은 확률 아닐까? 너른 우주를 여행하며 태양을 위협하는 적과 싸우고 어둠의 신과 대적하는 이 기상천외한 이야기 속에, 이성애가 아닌 형태의 사랑이 하나쯤은 없을 리 없지 않은가.

이미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소식을 접한 팬들은 즉각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 스타로드의 실사 배우 크리스 프랫에게 이목을 집중했다. 2019년에 엘리엇 페이지가 지적했듯 비인도적인 동성애자 전환 치료를 지지했던 전적이 있는 안티 LGBTQ 교회인 힐송 교회를 다니는 크리스 프랫이 과연 원작에서 퀴어로 천명한 스타로드를 무사히(?) 연기할 수 있느냐고 질문이 쏟아진 것이다.

버즈피드에서 소개한 해외 팬들의 반응은 대체로 회의적이다. 일부는 신이 빚어낸 아이러니에 비웃음과 비아냥을 남겼다. 이러한 경향은 마블 코믹스가 스타로드를 바이섹슈얼로 확정 짓기 불과 2달 전에 트위터 타임라인에서 할리우드의 4대 크리스들의 사진과 함께 “한 명만 뺀다면?” 이라는 질문을 담은 트윗이 크게 유행하며 크리스 프랫을 향한 부정적 시선이 널리 확대 재생산된 탓이다. 이에 외신은 크리스 프랫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트럼프 지지자인지 아닌지 팩트 체크에 나섰다. 크리스 프랫 본인이 공개적으로 정치적 성향을 발언한 적이 없으니 그전까지는 알 길이 없고, 어디까지나 팬들의 ‘합리적 의심’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원작 코믹스에서 캐릭터의 성지향성과 성정체성을 전과 달리 천명한다고 해서 실사화 각색판이 반드시 그것을 따라야 하는 법은 없다. 코믹스는 영화를 만드는 데에 있어 어디까지나 소재와 주제를 참고할 수 있는 기초 토대 자료일 뿐, 그 둘은 결코 붕어빵처럼 100퍼센트 일치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법이다. 다만 하나의 지표가 되어줄 수 있다. MCU가 10주년을 맞이한 것도 어느덧 3년 전이다. 그동안 MCU에 작품 내에서 공식적이고 공개적으로 퀴어로 등장하는 캐릭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원작 코믹스와 실사 영화는 별개다. 하지만 원작에서 한 가지 가능성을 열어준 이상, 영화 역시 그 기대에 부응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