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봄동

이미지: tvN, 넷플릭스

송중기, 김태리 주연의 SF 대작 [승리호]가 이름에 걸맞게 승승장구하고 있다. 지난 5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승리호]는 개봉 하루 만에 한국 등 16개국에서 넷플릭스 인기 영화 1위를 차지했다. 개봉 전만 해도 천문학적인 제작비에 비해 유해진의 로봇 연기만 남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었으나, 뚜껑을 열어 보니 다행히 그 이상의 실속을 갖춘 작품인 듯하다. 우주로 진출한 각양각색 출연진 중에서도 ‘장 선장’으로 변신한 김태리의 아우라는 선명하게 빛난다. 풋풋함과 야무짐을 동시에 뽐내는 이 배우를 이미 덕질 중이라면, 혹은 방금 빠져 버렸다면, 그의 TV 시리즈 데뷔작 [미스터 션샤인]을 정주행하며 김태리의 매력을 흠뻑 즐겨 보길 바란다.

[미스터 션샤인]은 일본과 서구 열강들이 노골적으로 조선을 침탈하던 1900년대 중반, 부모를 따라 의병이 된 조선 최고 사대부 가문의 자손 고애신(김태리)과 조선인 노비 출신의 미국 해병대원 유진 초이(이병헌)의 사랑과 성장을 그린 시대극이다. 여기에 신분 차별이 심한 조선을 증오하여 일본 낭인이 된 구동매(유연석), 탐욕스러운 대지주 집안의 한량이었지만 애신을 통해 언론인으로 각성하는 김희성(변요한), 친일파의 딸이면서도 애신과 같은 목표를 두고 비밀리에 움직이는 호텔 사장 쿠도 히나(김민정) 등 세 사람이 더해지면서 이들은 엇갈린 애정 속에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연민 혹은 공감을 느낀다. 또 주변의 의병대, 미국 공사관 및 해병대, 친일파, 일본군 등 숱한 인간들과 엮이면서 시대의 격류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휩쓸리게 된다.

1. ‘애기씨’가 대폭 확장시킨 김태리의 연기력

[미스터 션샤인]의 애신과 김태리의 [아가씨]의 숙희는 공교롭게도 정반대 되는 지점에 서 있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든 등골을 뽑아 먹든 아랑곳없이, 숙희는 그저 한 밑천 단단히 잡아 조선 땅을 뜨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개인주의의 화신 같은 인물이다. 영화 데뷔작에서 이처럼 도발적인 주인공을 소화한 김태리는 첫 TV 주연작 [미스터 션샤인]의 애신을 통해 본인이 장르와 환경에 구애받지 않는 배우임을 증명해냈다. 혼기를 놓쳤다는 이유로 주변의 눈총을 받아도 꿋꿋이 영어 공부에 매진하고, 조국을 위해 의병의 길을 걸으면서도 갓 찾아온 ‘러브’에 들뜨고 혼란스러워하는 애기씨. [미스터 션샤인]의 대박을 이끈 일등 공신은 누가 뭐래도 본인을 녹여 모든 장르, 모든 시대에 스며드는 김태리다.

2. 항일 투쟁과 만난 김은숙표 러브 스토리

김은숙 작가의 이전 로맨스들은 유치한 느낌이 짙어 호응만큼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미스터 션샤인의 러브라인에 대해서는 유독 호평 일색이다. 당초 김태리와 이병헌의 나이차 때문에 “몰입이 제대로 되겠냐”는 우려도 높았으나, 이들은 반대의 목소리가 무색해질 만큼 프로다운 호연으로 시청자들의 심장과 눈가를 적셨다. 다섯 남녀(애신, 유진, 동매, 희성, 히나)가 얽히고설켜 서로를 이해하고 지키려는 과정이 격렬한 항일 투쟁으로 자연스럽게 확대되면서 [미스터 션샤인]은 기대를 뛰어넘은 명작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유진이 열차에서 스스로를 희생하며 애신을 떠나보내고, 홀로 만주에 도착한 애신이 의병들을 양성하며 미소 짓는 엔딩은 격동의 시대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낭만을 불사른 젊은이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3. 애기씨를 지킨 조선, ‘국민이 곧 국가‘라는 증거

애신은 명문가의 영애라는 높은 신분에 목매지 않고 의병으로서 나라를 구하기로 결심하면서부터 줄곧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다. 가족이나 다름없던 함안댁을 눈앞에서 잃고, 역시 일본군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 애신을 결정적으로 구한 것은 유진도, 동매도 아닌 이름 모를 조선 백성들이었다. 총을 들이대며 위협하는 일본 장교의 윽박에 겁먹어 눈물을 흘릴지언정, 서로 굳게 낀 팔짱을 절대 풀지 않은 채 애신을 둘러싸 보호하는 조선인들은 조선이, 나아가 현재의 대한민국이 끝내 살아남은 이유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조선이 사라져 가는 절망 속에서 처절한 저력을 드러낸 민중들은 미스터 션샤인의 주제 그 자체이며, 주권자인 국민이 있는 한 국가가 존재한다는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끊임없이 상기한다.

에디터 봄동: 책, 영화, TV, 음악 속 환상에 푹 빠져 사는 몽상가. 생각을 표현할 때 말보다는 글이 편한 내향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