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리틀빅픽처스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강남 1970] 등 선 굵은 작품을 연출해온 유하 감독이 본인의 색을 덜어내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범죄 오락 영화로 돌아왔다. ‘도유’라는 다소 생경한 소재를 캐릭터들 간의 엎치락뒤치락 팀플레이로 풀어낸 [파이프라인]이다. 서인국, 이수혁, 음문석 등 스크린보다 안방극장에서 친숙한 배우들이 108분 러닝타임을 신선하게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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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프라인]은 도유 업계 최고의 천공기술자 ‘핀돌이’가 수천억의 기름을 빼돌리려는 위험천만한 작전에 합류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한탕을 노리는 거대한 판에는 프로 용접공 ‘접새’, 땅속을 훤히 꿰고 있는 전직 공무원 ‘나과장’, 힘이 장사인 인간 굴착기 ‘큰삽’, 작전이 진행되는 호텔에서 이들을 감시하는 ‘카운터’가 있다. 그리고 뒤에는 먼저 판을 짜고 전문가들로 팀을 꾸린 뒤 쉴 틈 없이 밀어붙이는 냉혹한 기업 후계자 ‘건우’가 있다. 캐릭터 구성은 기존 범죄 오락 영화에서 많이 본 듯한 모양새다.

또한 ‘기름을 훔친다’는 설정만 새로울 뿐, 작품의 얼개는 팀이 아슬아슬한 위기를 겪으며 작전을 성공시킨다는 케이퍼 무비의 문법에 충실하다. 핀돌이가 주축이 된 팀은 도유 과정에서 이해관계와 방향성의 차이로 사사건건 충돌한다. 특히 제 이익만 쫓는 접새가 까칠한 성격의 핀돌이를 자극하며 트러블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한다.그러나 내부의 잡음보다 더 큰 문제는 외부에 있다. 건우는 팀 내부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결국 궁지에 몰린 이들은 한뜻으로 뭉치고 반격을 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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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다고 나쁜 게 아니다. 예측 가능한 흐름에서도 캐릭터를 어떻게 활용하느냐, 이야기를 어떻게 진행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파이프라인]은 뻔한 재미조차 찾기 힘들다. 나름 구색을 갖췄지만, 팀플레이를 펼칠 캐릭터의 매력이 보이지 않는다. 핀돌이와 건우의 갈등에 주력하느라 각기 다른 매력과 사연을 가진 캐릭터들을 철저히 기능적으로만 소비한다. 내부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도 개연성이 없어 갑자기 갈등이 봉합되고 의리를 보이는 팀원들이 당혹스럽기만 하다. 게다가 캐릭터들은 평면적인 것도 모자라 올드한 인상을 준다. 그나마 음문석이 연기한 접새가 도드라져 극에 활력을 불어넣으나 이는 납작한 시나리오를 살린 배우의 공이 크다.

캐릭터를 고르게 활용하지 않으니 전개 역시 밋밋하다. 기상천외한 범죄 수업이나 기발한 팀플레이는 고사하고, 굳이 왜 ‘도유’를 소재로 삼았을까 생각이 들만큼 기존의 범죄물과 차별화된 지점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극적인 재미나 긴장감 없이 모든 게 익숙한 틀에서 흘러간다. 이 기시감은 한국 범죄 영화의 전철을 밟는 데서 선명해진다. 닳고 닳도록 본 깡패가 위협적으로 등장하고, 갈등과 위기가 고조되는 순간에는 조폭식 협박과 폭력을 꺼내 든다. 액션의 결은 감독의 전작들과 조금 다를지어도,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은 달라진 게 없다. 예산 때문인지 후반부의 CG는 아쉽고, 마무리는 싱겁다.

2019년에 완성됐지만 코로나 시국 등 여러 이유로 개봉이 미뤄졌던 작품이 이제라도 관객과 만나게 된 건 분명 반갑고 기쁜 일이다. 하지만 내용이나 완성도가 몇 년 사이 눈 높아진 관객의 기준을 따라가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