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은 [8월의 크리스마스], [덕혜옹주]의 허진호 감독이 TV 드라마 연출을 맡아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두 주인공이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끌리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는 담백하고 애잔하게 흘러가나, 서사 진행이 너무 느려 지루하기도 하다. 냉정하게 말해 시놉시스도 단순하고 평범하다. 6화까지 방영되는 동안 두 주인공이 직접 만나 중요한 사건을 일으킨 적도 없다. 그럼에도 드라마에 조금씩, 천천히 빠져드는 건 왜일까? 그 이유를 3가지 요소로 살펴본다.

류준열-전도연의 포커페이스 연기

이미지: JTBC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두 주인공 부정과 강재는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다. 좋은 작가가 되고 싶었던 대필작가 부정은 배우 아란과 모종의 사건으로 엮이면서 인생의 벼랑에 몰렸다. 다니던 직장을 잃고, 아이를 유산했으며,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남편 정수는 외도를 했다. 그때의 충격으로 부정은 우울증을 앓고 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내색하지 않는다. 마음은 곯아가고 있는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다며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

강재 역시 부정처럼 타인과 거리를 두며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산다. 스스로 1인 기업이라 부르는 호스트인 그는 직업 때문인지 모든 것들이 거짓으로 둘러싸여 있다. 자신을 찾는 사람들의 욕구만 충족시켜주기만 할 뿐, 강재에게는 꿈이나 목표가 없다. 손님이 웃음을 원하면 미소를 짓고, 슬픔을 바라면 대신 울어주면 된다. 그 와중에 진짜 자신의 감정은 어디에 두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드라마는 상실감에 빠진 두 사람의 포커페이스를 차분하게 그려낸다. 두 주인공을 맡은 전도연과 류준열은 감성적인 연기를 선보이며 시청자와 극중 인물의 거리를 좁힌다. 처절한 감정 폭발이나 극단적인 행동 없이도 부정과 강재에게 내재된 슬픔을 호소력 있게 드러낸다. 특히 서로에게 속 마음을 말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묘한 떨림과 설렘을 건네며 드라마만의 애틋한 감성에 더욱 빠져들도록 이끈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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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이란 제목답게, 아무리 주인공들의 사연에 공을 들여도 불륜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다만 작품이 그리는 삶의 태도는 불륜이라는 자극적인 소재에 묻히기엔 여러모로 아깝다. 삶의 소중함과 인생의 가치를 진지하고 사려 깊게 다루기 때문이다.

먼저 드라마는 부정과 그의 아버지의 관계를 비중 있게 보여준다. 두 사람은 겉으로 감정을 내색하지 않지만, 부정은 초기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는 아버지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아버지 역시 여러 일로 힘들어하는 딸의 모습에 몰래 눈물을 훔친다. 아버지와 딸의 애끓는 마음이 섬세하게 그려져 보기만 해도 먹먹해진다.

부정의 남편 정수와 한때 외도를 했던 경은이 죽음을 앞둔 남편을 진심으로 간호하는 모습은 꽤 뭉클하다. 그전까지 자기밖에 모르는 나쁜 캐릭터라고 생각했던 경은은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을 담담히 준비하면서 그 아픔을 속으로 삭인다. 그 과정에서 생과 사가 존재하는 병원에서 떠나는 자와 남겨진 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부정과 강재만 비추던 이야기가 두 사람의 주변 인물과 관계로 확장되면서 서사의 밀도는 높아진다.

공들인 감성의 빌드업,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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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실격]은 캐릭터와 분위기를 다루는 솜씨가 세심하지만, 서사가 느리고 어둡다. 부정과 강재의 관계를 섣불리 전개하기보다 둘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감정을 그려내는데 집중한다. 또한 부정의 남편 정수와 강재의 친구들 등 주변 인물들의 서사를 쌓아가며, 이들이 부정과 강재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을 암시한다. 결국 부정이 아이의 유산으로 힘들 때, 마음을 기대었던 사람이 강재의 지인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나면서 드라마의 큰 그림이 비로소 펼쳐진다.

특히 부정과 강재는 여러 차례 스치듯이 만나 감정을 공유했지만, 두 사람이 무언가를 함께한 적은 거의 없었다. 7화에서 부정은 자신의 상처 받은 마음을 위로해줄 ‘역할대행’이 필요했고, 그 사람이 바로 강재임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는 큰 전환점을 맞았다. 즉, 6화까지 정체됐던 이야기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두 사람이 앞으로 그려낼 사랑 혹은 그 이상의 묘한 관계 앞에 어떤 사건들이 펼쳐질지 궁금하다. [인간실격]의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된다.